166화 아군이라면
“모두 집중. 역할을 나누겠습니다.”
아델라인이 간신히 종이의 내용을 이해하려던 찰나, 안드레이의 목소리가 사용인들의 이목을 모았다. 비록 집사로서 일한 경력은 길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와 몸짓에 스며든 관록은 그를 무시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나이아는 저택에서 대기. 오늘 일정 중에서 공녀님이 필요한 일정 더 남아 있어?”
“아니, 없어요. 앞으로 3일간은.”
“좋아. 만약 저택을 찾아오거나 약속을 잡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정 조율이 필요하다며 미뤄. 일정이 조율되면 먼저 연락하겠다고 하고.”
“알겠어요.”
“지금부터 따로 지시가 있을 때까지 모든 사용인은 저택 안에서 대기합니다. 지시가 없는 이상, 저택을 벗어나는 것은 금지입니다. 알겠습니까?”
안드레이의 물음에, 사용인들은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답을 들은 안드레이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품으로 인한 사고를 막기 위해, 주치의의 방 열쇠는 집사장과 주치의 본인만 가지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항상 잠그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요.”
“그, 그럼 어떡하지?”
“먼저 주치의 방 앞에 가 계십시오. 챙길 것이 있습니다.”
안드레이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걸음을 옮겨 주치의 방 앞에 서서 문고리를 잡자, 그의 말대로 문이 잠겨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도 일반 나무문이 아니라 철제문. 이걸 어떻게 열겠다는 거지, 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안드레이가 더플백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건 뭐야?”
“장비 가방입니다.”
더플백에서 꺼낸 건 카빈 한 자루. 안드레이는 탄약포 두 개를 뜯어 화약을 재어 넣은 뒤, 탄환은 하나만 굴려 넣고 꽂을대로 다졌다.
그다음 공이를 당기며,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해, 문을 부수고 들어가야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을 구하는 그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뜻대로 해.”
“알겠습니다. 귀를 막으십시오.”
안드레이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으로 귀를 덮었다. 아델라인을 흘끗 본 그는 총구를 열쇠 구멍에 들이댔다.
쾅. 손으로 귀를 막았음에도 그걸 뚫고 전해지는 강렬한 폭음이 아델라인의 고막을 울렸다. 본능적으로 감아 버린 눈을 뜨자, 걸레짝이 되어 버린 문고리가 보였다.
손으로 그 문고리를 뜯어낸 안드레이는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방 안을 주욱 훑어본 안드레이는 책상 위의 서류철 서너 개를 집어 들어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도 도울게. 어디서부터 보면 돼?”
“아닙니다, 찾았습니다.”
안드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서류철 하나를 펼쳐 보였다.
“다음은 내복약인데… 이런 개 씨…….”
방금까지 내보이던 관록은 어디로 가고, 안드레이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당황이 물들었다. 갑작스러운 격한 반응에, 아델라인은 알렉스가 들고 있는 서류를 바라봤다. 그러나 무슨 의미인지 모를 단어들만 한가득 쓰여 있는 서류.
바로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이게 무슨… 공녀님!”
아델라인이 뒤를 돌아보자, 주치의가 부서진 문짝 너머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아델라인에게 서류철을 넘긴 안드레이가 주치의를 바라봤다.
쾅!
한순간이었다. 주치의의 멱살이 안드레이의 손아귀에 잡혀, 주치의가 복도의 벽에 부딪혔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안드레이의 행동에, 아델라인은 미처 말릴 생각도 못 하고 얼어붙고 말았다.
그건 주치의도 마찬가지. 순식간에 막힌 호흡에 살기 위해 안드레이의 손목을 잡으며 버둥거리던 주치의를 향해, 안드레이는 살벌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모르핀.”
안드레이가 읊은 한마디에, 아델라인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모르핀이라는 단어를 모를 리 없었다. 대학교 전공 수업 때 심심찮게 들었던 단어.
한때 가장 범용적으로 쓰였던 진통제이자, 마약.
“이 미친 새끼가… 의사라는 새끼가!”
“잠깐, 서, 설명을…….”
주치의가 간신히 입을 뻐끔거리며 말하자, 안드레이는 그의 멱살을 놓았다. 호흡이 돌아오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채 한동안 숨을 몰아쉰 주치의는 안드레이를 올려다봤다.
“나, 나도 처방하고 싶지 않았다네, 자네가 화내는 이유도 알아!”
“다른 진통제도 많았잖습니까, 아편 정제도, 대마도!”
“그걸로는 더는 안 먹히니까!”
주치의의 말에, 아델라인의 머릿속에서 공작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대화를 갑작스럽게 끝내야 했던 공작의 격한 기침 소리가, 아델라인의 귓가에 맴돌았다.
“…둘 다 목소리 낮추세요. 그리고 안드레이. 뒤로 물러나.”
아델라인의 말이 안드레이에게 향했지만, 그는 못 들은 척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그를 향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안드레이.”
“…알겠습니다.”
아델라인이 한 번 더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안드레이는 뒤로 물러났다.
아델라인은 안드레이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모르핀의 위험성은 어느 정도 되지?”
“여단에서도 모르핀 투여는 철저히 제한합니다.”
“대중 기준으로.”
아편, 모르핀, 코카인 등등. 모든 항정신성 약물은 그 위험성이 알려지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그걸 가늠하기 위한 아델라인의 물음에, 안드레이는 잠시 머뭇거린 뒤 질문에 답했다.
“…대중들의 인식은 그저 조금 더 효과 좋은 아편 추출물일 뿐입니다. 중독성과 부작용은 일선 의료진의 과다 처방으로 책임을 돌리니.”
안드레이의 말을 들으며 아델라인은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단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었다.
아무리 모르핀의 위험성이 공인되지 않았더라도, 어찌 되었든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좋지 않았다.
“모르핀을 처방한 지는 얼마나 되었죠?”
“…6월부터 처방을 시작했습니다. 아편 정제에 미량을 보탰을 뿐입니다.”
“6월부터의 처방전을 새로 쓰세요. 모르핀 투약은 생략하고. 그다음, 공작님께서 드시던 약을 챙기세요. 박사님은 저희 둘과 함께 의회로 갑니다.”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주치의에게 서류철을 건넸다. 그러자 안드레이가 그녀의 손을 가로막았다.
“이 새끼는 모르핀을, 공작 각하께 처방했습니다. 모르핀은 단순히 효과 좋은 아편 추출물이 아닙니다, 그건……!”
안드레이가 아델라인에게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아델라인은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알아. 아니, 안드레이 너보다 더 잘 알 거야. 네가 분노하는 이유도 알아.”
모르핀이 빚어낸 사회적 병폐를, 그리고 그 끔찍한 모습을 모를 리 없었다.
고통도 환희도 잊고, 오직 모르핀이 주는 자극에 취해 천천히 죽어 가는 이의 눈빛. 삶의 의미마저 잠깐의 거짓 행복에 팔아 버리고서 죽음을 기다리는 중독자들.
전장에서 뛰어다닌 안드레이에게는 개인이 본 과거를 바탕으로 한 통찰이지만, 간호학과 학부생 예은에게는 선명한 결과였다.
그렇기에 그런 끔찍한 약물을 함부로 처방한 주치의를 향한 분노는, 아델라인의 속을 끓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래도.”
아델라인은 안드레이의 양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통제할 수 없는 혼란은, 모두를 지옥으로 이끈다는 걸 알잖아. 호더빌에서, 직접 봤을 거 아니야. 거기에 있었다면서.”
아델라인의 입에서 나온 호더빌이라는 지명에, 안드레이의 눈이 번뜩 떠졌다. 결국 무언가를 말하려던 안드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
“알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알릴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델라인은 안드레이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한 물기가 차올라 있었다.
이 상황에 대한 분노가 아델라인의 가슴을 태우고, 처방전을 조작하라는 지시를 내린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시야를 흔들었다. 말을 뱉어 내야 할 목구멍은 치솟은 감정에 틀어 막혔고, 안드레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뻗었던 양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 상황이 우리 손을 떠나기 전에…….”
끝없이 흔들리며 흐려진 시야에는, 지금 이 순간 어느 누구 보다 가장 필요한 사람이 나타났다. 항상 자신을 향해 미소 지은 얼굴을 보이려 노력하는 알렉스의 얼굴이 나타났다.
복잡하고도 어두운 표정을 지은 안드레이의 얼굴에, 알렉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자신이 이런 판단을 내린 걸 알면, 알렉스는 분명 지금 안드레이가 내보이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아델라인은 그런데도, 눈앞에 나타난, 지금 자신의 곁에 있을 리 없는 알렉스를 향해, 온 힘을 짜내어, 떨리는 목소리로 간청했다.
“한 번만, 도와줘.”
* * *
그린우드는 창틀에 양팔을 걸친 채 바깥을 바라봤다. 의회당 의무실에서 바라보는 의회당 뒷골목의 풍경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손에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뱃대가 성냥 한 개비와 함께 들려 있었다. 담뱃대에 불을 붙이기 위해 성냥을 들어 성냥갑 한쪽의 사포에 그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그의 눈에는 병석에 누워 있는 로피츠 공작이 들어왔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의회의 모든 활동을 가장 중립적인 위치에서 제어해 왔던 거목이, 지금은 곪아 가는 속을 내보인 채 힘겨운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결국 그는 들고 있던 성냥개비를 성냥갑 안에 넣은 뒤, 담뱃대를 입에 물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로피츠 공작가…….”
그린우드는 담뱃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속으로 뒤에 이어 붙일 말을 삼켰다. 분노라기보다는 안타까움과 막막함에 가까운 감정의 중얼거림이었다.
지금 당장 병상에 누워 있는 공작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따지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지만, 그는 애꿎은 담뱃대에 화풀이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로피츠 공작은 지금의 정치 판도에서 대체역이 없는 인물이었다. 다양한 성향의 의원들이 모여 ‘중도’라고 퉁쳐진 황색당. 그와 달리, 로피츠 공작은 그 어떤 이해관계에도 얽매이지 않고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는 최다선 의원이자 제국 의회 의장이었다.
점점 전쟁이 길어지며, 남부당 소속 요인들은 대연정 체제 내부에서 일부러 엇박자를 내고 있었다. 이들을 제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쓰러진다면, 이다음 순간에는 그 어떤 폭풍이 몰아칠지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모를 리 없는 공작이, 속으로 골병을 앓다가 이렇게 무책임하게 쓰러지다니. 마음속으로는 온갖 문학적 표현을 동원해 욕을 쏟아붓고 있었지만, 그는 남아 있는 인내심을 간신히 긁어모아 감정을 억눌렀다.
그렇게 혼자 속으로 분노를 삭이고 있을 때, 병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부의장님, 이즐링턴 남작 외 2인. 접견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그린우드는 담뱃대를 집어넣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그는 공작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약속은 지키지요. 공작. 그녀의 아군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다만…….”
그린우드는 주머니에 파이프를 집어넣으며 덧붙였다.
“모름지기 아군이라면, 같이 싸워 주기를 기대해도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