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쓰러진 거목
[- 매닝햄 대위님이 떠나신 지 일주일. 공녀님의 눈은 빠르게 생기를 잃어 가고 있다.
- 식사량은 반으로 줄었으며, 침대에 누워 계시는 시간은 평소보다 1시간 늘었다. 그러나 공녀님의 안색을 봤을 때, 그 시간 동안 결코 숙면을 취하시지는 못하는 듯하다.
- 공녀님 말로는 매닝햄 대위님이 2주일 뒤에 돌아오신다던데, 그 전에 쓰러지시는 게 아닐지 모르겠다.
- 주치의가 제출한 약품 비용이 약간 증가했다. 주치의의 실력과 양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 의약품 장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나이아는 다이어리를 덮으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아델라인의 손에는 깃펜이 들려 있었다. 서명란을 현란하게 스치고 지나간 깃펜은 다시 잉크 통으로…….
“공녀님!”
나이아의 외침에, 아델라인이 흠칫 몸을 떨며 그녀를 바라봤다. 나이아의 시선은 그녀의 손에 들린 깃펜으로 향해 있었다.
아델라인은 깃펜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도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물컵에 담근 펜 끝에서는 검은 잉크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일. 상황을 자각한 아델라인이 뒤늦게 펜을 꺼내는 모습을 본 나이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에게 말했다.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아델라인은 애써 눈꺼풀 위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다.
로피츠 공작가는 언제나처럼 그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전쟁 채권과 주식을 균형 있게 사들인 공작가는 신문에서 들려오는 극적인 투자 성공담과는 거리가 멀지만, 제국 중앙은행의 기준 금리보다 살짝 높은 이익률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즐링턴도 빠르게 번화하고 있었다. 서던 퓨질리어 연대의 막사에 새로 자리 잡게 된 남부훈련소의 교관단이 머무를 관사가 완성되었고, 나무를 벌목한 자리에는 새로운 주택이 들어섰다. 목재 가공 공장은 일자리를 만들었고, 일자리는 사람을 불러 모았으며, 사람은 또 다른 일자리를 만들어 냈다.
한번 일으킨 선순환은 많은 사람의 손으로 점점 그 크기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서던 퓨질리어 연대가 이즐링턴에 자리 잡은 이후, 열세 명의 연대장 모두가 바라 왔던 꿈이 펼쳐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순풍을 타고 나아가고 있었다.
단 한 가지만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아델라인의 노력을 보상해 주듯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알렉스.
그가 탄 배도 지금 순풍을 타고 나아가고 있을까.
어디인지 모를, 언제 서게 될지 모르는 전장으로, 알렉스는 순풍을 타고 나아가고 있을까.
그 생각을 하자 머릿속에 껴 있던 먹구름이 더욱 짙어졌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무기력함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결국, 그녀는 책상 위에 엎드렸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앞에 찻잔이 놓였다. 도자기가 내는 자그마한 소리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들어 눈앞을 바라봤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싱그럽고 상쾌한 솔잎의 향이 아델라인의 코를 간질였다.
“분명 솔잎차는 다 마신 게…….”
“아, 요리사가 요리에 써 보겠다며 조금 빌려 간 게 있었거든요. 쓸 방도를 찾지 못해 구석에 뒀다고.”
나이아는 한 번 더 찻잔을 그녀에게로 살짝 밀었다.
“진짜, 마지막으로 남은 대위님의 솔잎차에요. 식기 전에 드세요.”
그 말에, 아델라인은 조심스레 양손으로 찻잔을 잡았다. 혹여나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그녀는 천천히 찻잔을 입으로 가지고 가 아주 조금, 입 안에 머금었다.
시원한 향이 입과 코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주 살짝, 단맛이 따라왔다.
알렉스와 함께 차를 마실 때 느껴지던 아련한 단맛. 그 단맛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흐려질 때쯤, 아델라인은 다시 한번 아주 조금 솔잎차를 입에 머금었다.
그리움이 잠깐 해소되었다가, 다시 파도가 치듯 몰려왔다. 그 그리움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아델라인은 다시 한번 입에 솔잎차를 머금었다.
그렇게 조금씩 차를 축내며 잔을 반 정도 비웠을 때, 아델라인은 찻잔을 입에서 떼며 물었다.
“…이럴 때가 있었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나보낸 적이요?”
아델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이아는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었죠. 문제가 생기면 여기로 연락하라고, 어딘지도 모르는 주소 하나 적힌 짤막한 편지만 남기고 3개월 동안 연락이 끊겼었어요.”
“…….”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는 너무 무서웠어요. 가뜩이나 한창 아카데미 입학한 첫 학기여서, 안 잡히는 펜을 억지로 잡아 가며 공부했어요. 간신히 들어온 아카데미인데, 낙제하면 안 되니까.”
나이아는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3개월이 지나고, 무언가 거무튀튀한 게 묻어 있고 잔뜩 주름진 편지지가 가득 든 편지를 받았을 때는, 읽어 볼 생각도 못 하고 기숙사에서 이불 뒤집어쓴 채 밤새도록 울었었죠.”
“그 안에는… 무슨 내용이 있었어?”
“기억도 안 나요. 너무 옛날 일이라. 그저… 그저 제 걱정만 잔뜩 있었던 것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
“공녀님이 대위님을 걱정하는 만큼, 대위님도 공녀님을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생각보다 훨씬 많이.”
나이아의 말에, 아델라인은 어느새 미지근해진 찻잔을 들었다. 잠시 남아 있는 온기를 손바닥으로 느껴 본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남아 있는 찻물을 벌컥, 들이켰다.
“…알렉스를 걱정시킬 수는 없지. 차 잘 마셨어.”
“찻잔 가져다 놓고 올게요. 간식도 좀 가져오고. 오늘은 궁내부의 풀턴 경이 오시는 날이니까요.”
나이아는 아델라인에게서 찻잔을 건네받은 뒤, 서재를 나왔다. 문 바로 옆에는 저택의 요리사가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 가득한 요리사의 눈을 바라보며 나이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요리사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발걸음을 돌려 복도를 걸어갔다.
“안 될 거로 생각했는데, 이게 되는군요.”
“운이 좋았어요, 양철통에 적힌 제조 일자와 같은 시기의 솔잎차를 구할 수 있었던 건. 그나저나 오늘 있었던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시죠?”
나이아의 말에, 요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비밀은 지킵니다. 그나저나 이런 생각을 어떻게 떠올리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요리사의 물음에, 나이아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겪어 봤으니까요. 그 어느 때보다 달콤한 거짓말의 힘을.”
고개를 살짝 숙여 표정을 숨긴 나이아의 목소리에 담긴 슬픔은, 잠시 대화를 끊기게 했다. 잠시 뒤, 그녀는 요리사를 향해 말했다.
“다과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요? 미리 만들어 둔 게 다 떨어졌다고 들었는데.”
“어제 다시 구워서 준비했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오늘 손님맞이 잘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나이아는 요리사에게 찻잔을 맡긴 뒤,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아델라인은 지난 일주일간의 방황으로 흘려보낸 시간을 메꾸기라도 하듯, 열정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저 모습이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나이아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자리에 앉아 할 일을 계속해 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노크 소리가 두 사람의 귀에 들려왔다.
“궁내부의 풀턴 경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응접실로.”
“알겠습니다.”
시녀에게 방침을 전달한 아델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이아와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로 가자,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풀턴 경이 눈에 들어왔다.
“좋은 오후에요, 풀턴 경.”
아델라인의 인사에, 풀턴은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인사했다.
“좋은 오후입니다, 남작.”
“편히 앉으세요. 이곳이 괜찮지 않으시다면 저번처럼 서재로 가도 좋고요.”
그러자 풀턴은 잠시 고민한 뒤,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비밀을 요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늘은 어디까지나 궁내부의 일을 위해 방문한 것이기에.”
그 말에, 아델라인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들며 풀턴을 바라봤다. 용건을 말해 달라는 눈짓에, 풀턴은 곧바로 저택을 찾은 목적을 꺼냈다.
“황후께서 황태자비를 찾고 계십니다. 궁내부 내부 회의에서는…….”
잠시 아델라인을 바라본 풀턴은 그녀의 손에 들린 찻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갓 따른 차는 모락모락 김을 피워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찻잔은, 잔뜩 힘이 들어간 아델라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걸 본 풀턴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델라인에게 부탁했다.
“찻잔을 내려놓아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자 아델라인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그에게 답했다.
“…걱정 마세요. 풀턴 경께서 주도하셨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아델라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풀턴은 그녀에게 말했다.
“일단 제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귀족 영애이신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어찌 되었건 의사를 여쭤야 하는 상황이라는 게 내부 회의의 결과입니다.”
“…….”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가장 훌륭한 한 쌍입니다. 황후 마마께서도 거절하시지는 않겠지요.”
“로피츠 공작가를 황실이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 맞나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풀턴은 침묵으로서 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곧바로 그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제가 맡고 있는 직책이 여럿 있는지라. 애석하게도 사양할 수밖에 없겠네요. 제가 맡은 책임에서 도망칠 생각은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는 안부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황후 마마께서도 정하신 분이 있으신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에, 아델라인은 그를 향해 질문했다.
“정하신 분이요?”
그러자 풀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정보를 풀었다.
“요 근래, 황후 마마와 루멘시아 백작가의 접촉이 잦아지기 시작했더군요. 특히 루멘시아 백작 영애와.”
그러자 아델라인의 눈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황후와 피오나가 손을 잡는다고?
“…혹시 아시는 게 있으신지요?”
아델라인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풀턴은 조심스레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나 아델라인은 풀턴을 한번 바라본 뒤, 표정을 풀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몇 번 만나보기는 했는데, 나쁘지는 않은 사람이었어요.”
“그렇습니까.”
풀턴은 큰 고비를 넘겼다는,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차를 홀짝였다. 그러자 아델라인도 몸의 힘을 살짝 풀고 등받이에 기대며 차를 머금었다.
그렇게 차로 입술을 축인 뒤, 풀턴은 찻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즐링턴에 계시며, 수표책을 단 한 번 쓰셨더군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유요? 딱히 이유랄 것도 없는데.”
“그분께서 궁금해하십니다.”
풀턴이 덧붙인 말에, 아델라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눈을 감으며 잠시 고민했다.
이유. 근본적인 이유라면…….
“…필요한 자재를 제때 들여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번 써야 했었어요. 그분께는 죄송하고, 또 감사하다 전해 주세요.”
그러자 풀턴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예상 밖의 대답에 잠시 차를 홀짝이며 생각할 시간을 가진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아델라인에게 물었다.
“그게 다입니까?”
그러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후임으로서 전임자의 소망을 이어받아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저는 그들을 완전히 잇지는 못했으니까요.”
아델라인은 다시 잔을 들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일단은 그 정도로만 답할 수 있겠네요.”
그러자 풀턴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분께서 남작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를 알 것 같군요. 차, 잘 마셨습니다.”
“즐겨 주셨다니 다행이네요. 현관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아델라인은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뒤, 현관까지 그를 배웅했다. 그렇게 현관문을 나서려는 그때.
“집사장님, 집사장님 어디 계신가! 주치의는!”
공작가의 집사이자 의회에서 상주하는 공작의 보좌관이 한 손에 편지를 든 채 숨을 고르며 다른 사용인들에게 집사장의 위치를 묻고 있었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상황에, 아델라인은 그 집사에게 다가가 질문을 했다.
“무슨 일이지? 집사장이라면 잠시 외부에 볼일이 있어 나갔고, 주치의는 약재 구입을 위해 아직 나가 있는데.”
그 말을 듣자, 집사는 아델라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정말이십니까?”
그때, 안드레이가 집사에게 다가가 말했다.
“집사장님께서 잠시 제게 대응 업무를 맡기셨습니다. 아들러 집사.”
“레이크 집사. 그렇다면…….”
아들러 집사는 안드레이에게 봉투를 건넸다.
그러자 안드레이는 곧바로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꺼냈다. 잠시 그 내용을 훑어본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런 젠장.”
그의 손에 들린 종이 위에는, 급하게 흘려 쓴 문장 한 줄과 서명 하나만이 올려져 있었다.
[의장 실신. 의식 불명. 의회 의무실로 긴급 후송. 내복약 및 의료 기록 요청. 부의장 피터 그린우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