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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163화 (163/200)

163화 마지막 날

분주한 나날들이 지나갔다. 수십 명의 명사와 안면을 텄고, 수백 명의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사교 시즌에서 만났던 사람을 한 번만 만나는 일은 더 드물었기에, 몇 번이고 마주치며 사교 시즌 이후의 약속도 잡았다. 그 곁에는 항상 알렉스가 있었고, 덕분에 아델라인은 때때로 찾아오는 곤란한 상황에서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만큼은, 술을 마시며 알렉스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거라 다짐한 아델라인은 그 어느 때보다 신경을 쓴 뒤 마차에 올랐다.

“오늘만큼은 샴페인도 실컷 마실 거고, 춤도 마음껏 출 거고, 알렉스와 함께 시간을 보낼 거야. 나 취하면 집에 잘 데려와야 해?”

“걱정 마시고 실컷 즐기다 오세요.”

나이아는 미소를 지으며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그녀의 일정은 강행군이나 다름없었다. 사교 시즌에도 가문의 일은 끊임없이 쏟아졌다. 거기에 더해 만났던 사람들을 정리하고 기억해야 했기에, 그녀가 해야 할 일은 훨씬 많아졌다.

그렇기에 그녀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하루를 시작했고, 두 시간 늦게 하루를 마쳤다. 연회에서 돌아와서도 내일의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신문을 읽었고, 만났던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내려갔다.

가장 분주했던 일주일이었다. 그러니 하루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나이아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큼은 마음껏 마시고 오셔도 괜찮아요. 당장 급한 일도 없으니까요.”

“그래, 그동안 음료수만 마시느라 얼마나 감질났는데. 술 취하면 일을 못 하니까.”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사교 시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날답게, 연회가 시작하기 한참 전임에도 불구하고 황궁으로 가는 길은 마차로 가득 차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들어가자, 알렉스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30분이 남아 있었다. 아직 알렉스는 관사에서 나오지 않은 모양인지,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관사에 있으려나.”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요.”

“가 보자.”

아델라인은 나이아와 함께 인파에서 벗어나 파견 중대의 관사로 향했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알현 궁 근처를 지나자 차분한 분위기가 그들을 감쌌다.

가끔씩 황궁을 순찰하는 경비 대원이나 이곳저곳을 청소하는 황궁의 사용인들만 마주치는 길. 그 끝에는 다른 황궁 건물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그만큼 사람 사는 분위기가 물씬 풍겨 오는 라이플맨들의 보금자리가 있었다.

…있었을 터였다.

“…사람이 없네요.”

나이아의 말대로였다.

평소라면 환기를 위해 열어 두었을 창문들은 모두 닫혀 있었고, 빨랫줄에 널려 있을 빨래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져 있었다.

말 그대로 인기척이 없어진 관사의 모습에, 아델라인은 당황하며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잠겨 있지 않은 문을 열자, 마찬가지로 인기척 하나 없는 복도가 나타났다.

마치. 마치…….

“알렉스.”

아델라인은 급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작년과 같은 풍경이었다. 사람 한 명 없었고, 물건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서둘러 알렉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집무실 문은 닫혀 있었다.

아델라인은 눈을 꾹 감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걸 돌리고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알렉스도 사라진 거라면. 급한 일이 생겨 자신에게 말조차 못 하고 떠난 거라면.

그럴 리가 없다, 생각하면서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아 하염없이 망설이고 있을 때, 그녀가 붙잡고 있던 문고리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아델라인?”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델라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이제 막 씻고 나온 듯, 알렉스의 머리카락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알렉스가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자, 아델라인은 깊은 안도감과 함께 몸에서 힘이 빠지는 듯했다.

“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인기척이 없길래…….”

“그런가요. 안에서 기다릴래요? 옷만 입으면 돼요.”

알렉스는 셔츠의 단추를 여미며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뒤를 따라온 나이아는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두 분이서 이야기 나누세요.”

나이아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인기척 없는 관사는 그저 평상시의 모습인지, 아니면…….

“오늘은 평소보다 더 아름답네요.”

아델라인이 입을 떼려는 찰나, 알렉스가 먼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칭찬에 맞장구를 쳤다.

“알렉스도요. 평소보다 더 멋있어 보여요.”

“제복을 안 입으니 아직 멋있어 보이는 거죠. 이거 입으면 길가에 굴러다니는 대위 한 명에 불과한데.”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옷걸이에 걸려 있던 붉은색 예복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의 말과 다르게, 제복을 입자 알렉스의 모습은 한층 멋있어졌다.

“멋있어요, 지금도.”

아델라인은 빈 의자에 앉아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알렉스는 부끄럽다는 듯 헛기침을 한 뒤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고마워요.”

잠시 대화가 끊겼다. 그사이, 아델라인은 그의 집무실을 한 바퀴 훑어봤다. 기본적인 집기만 남아 있는 집무실은 휑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상태의 집무실을 딱 한 번 본적이 있었다.

“…가나요?”

많은 것이 함축된 질문. 그러자 알렉스는 웃음이 걷힌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어도 2주일이면 돌아올 거예요.”

“…….”

“오늘까지는 시간이 있고요.”

“오늘까지, 인가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물어보긴 힘들겠죠. 보나 마나 어디 시골 마을 자원봉사 가는 건 아닐 테고.”

그러자 알렉스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면목 없다는 듯, 미안하다는 듯한 저자세의 모습에, 아델라인의 머릿속에서는 휘태커 경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불합리한 명령도, 군인이기에 따라야 한다는 말.

“이것만 말해 줘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옳지 않은 일인가요?”

그러자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옳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에요.”

알렉스의 대답을 듣자, 아델라인은 그의 눈을 응시했다. 알렉스의 눈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럼 적어도. 적어도 아델라인이 대신 걱정할 범주는 넘어선 상황. 자신이 대신 걱정해 준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침울한 모습을 보인다면, 위험한 일을 하러 가는 알렉스의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질 터였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걱정 때문에, 중요한 일을 그르치게 될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리고 오늘 하루만큼은, 최대한 밝고 맑은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아델라인은 심호흡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알렉스에게 말했다.

“일단 가요. 오늘 하루는 함께해 줄 거죠?”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그녀를 따라 일어나며 답했다.

“오늘만큼은 아델라인 곁에 계속 붙어 있을게요.”

“황후한테 또 누군가 칼 들고 달려든다고 해도요?”

“황후가 아델라인에게 칼 들고 달려들지 않으면요.”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그가 말한 상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과할 정도로 보석과 금장이 박힌, 몽둥이인지 구별도 안 될 정도로 날이 둔한 예식용 검. 그걸 들고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을 끌며 아델라인에게 달려드는 황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떠올리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금까지 품고 있던 근심이 사라질 정도로 한참을 웃어 댄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손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황후는 오늘도 몸져누워 있을 테니, 다행히도 그럴 일은 없겠네요. 자, 그러면 슬슬 가죠. 자칫하면 늦겠어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져 있었다.

* * *

아델라인은 눈을 떴다.

기대고 있던 창가에서 머리를 떼며 눈을 비비자, 뿌옇던 시야가 똑바로 잡히며 안개가 껴 있는 것만 같았던 흐릿한 기억이 다시 돌아왔다.

그래. 분명 술도 실컷 마시고 춤도 실컷 춘 뒤, 알렉스가 가야 하는 항구까지 데려다준다고 억지로 그를 마차에 태웠지.

아델라인이 기억을 떠올리며 앞을 보자, 고개를 푹 숙인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알렉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태위태한 모습을 보자, 아델라인은 자리를 옮겨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그의 머리를 살포시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 그녀는 알렉스의 손을 잡았다.

크고 거칠고 곳곳에 굳은살이 배긴 손. 그렇기에 의지가 되는 손.

아델라인은 그 손을 잡으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늦어도 되니까… 다치지 말고 돌아와요.”

기다릴 수 있었다.

기다림이 익숙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도 기다리라 한다면 기다릴 수 있었다. 그가 무사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돌아올 때까지.”

아델라인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알렉스의 손을 잡은 손에 살짝 더 힘을 주었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그녀의 귀에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을 생각 없어요.”

자고 있으리라 생각한 알렉스의 목소리에, 아델라인은 화들짝 놀라 마차 벽에 바싹 붙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본 알렉스는 창문의 커튼을 들춰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 걸릴 일은 아니니까. 늦지는 않을 거예요.”

“…일부러 자는 척한 거예요?”

“그렇게 귓가에 속삭이는데, 잠이 안 깰 리가 있나요. 그래도…….”

그녀의 이마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걷어 낸 그는 아델라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기다려 준다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 볼게요.”

알렉스는 얼굴이 붉어진 아델라인을 응시한 뒤, 마부석의 창문에 가볍게 노크했다. 마차가 멈춰 서자, 알렉스는 직접 문을 연 뒤, 모자를 쓰며 마차에서 내렸다.

어느새 마차는 부둣가에 도착해 있었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마차의 문을 닫으려 했다. 바로 그때, 아델라인의 손이 닫히는 문을 잡아 세웠다.

“잠깐. 놓고 간 게 있어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주머니를 탁탁 손으로 만져 보며 아델라인에게 다가갔다.

“놓고 내린 게 있었나?”

그렇게 그가 방심하고 있을 때, 마차 문밖으로 얼굴을 내민 그녀는 알렉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잠깐, 그의 이마에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알렉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변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향해 몇 번이고 당부하듯 말했다.

“몸조심해요, 꼭!”

잠시 얼어붙은 알렉스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아델라인은 마차의 문을 탁 닫고 마부에게 신호를 보냈다.

아델라인의 지시에 후다닥 자리를 뜨는 마차를 보며, 알렉스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노력해 볼게요.”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부두로 고개를 돌렸다.

한적한 부두에는 낯익은 범선이 닻을 내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HMS Hellion]

뱃머리에 달린 명패가, 유난히 밝은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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