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생각지 못한 우군
“그 검이 어떤 검이라고요?”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낙찰받은 샴쉬르를 들어 보이며 으쓱였다.
“6세기 전에 있었던 성전에서 노획한 물건이래요. 빈 살만 앗딘이라는 아부카말 토후국 연맹 소속 소드마스터의 곡도라는데요.”
“얼마 주고 낙찰받았죠?”
“20파운드요.”
“바가지 썼네. 노먼 중위님 곡도가 주문 제작해서 12실링이라는데.”
“그러려고 온 거 아니겠어요?”
“그렇긴 하죠.”
아델라인은 지나가던 사환에게 검을 맡기고는 시선을 돌렸다. 경매장은 어느새 연회장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 경매장에서 구한 물건들을 내보이며 돈을 얼마나 썼는지 자랑하고 있었다.
물건의 가치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물건의 가치보다 비싸게 산 것이 이곳에서는 자랑거리니까.
“노먼 중위가 차고 있던 검이 제 거랑 같은 것 같던데, 한번 가져가서 무슨 이야기가 얽혀 있는지 물어봐 줄 수 있나요?”
“기회가 된다면 한번 물어봐 줄게요.”
“좋아요. 그러면…….”
마침 들려오기 시작한 춤곡. 그러자 연회에 참석한 내빈들 몇몇은 짝을 지어 연회장 한가운데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춤 한번 추고 시작할까요.”
“좋죠.”
두 사람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가자, 악단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춤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음악에 맞춰 한 박자씩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이내 그 조심스러웠던 발걸음은 악기들이 만들어 내는 선율에 올라타 유연하고 과감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남들 앞에서 춤을 춰 본 게 몇 번이나 될까. 그러나 그 숫자가 무의미할 정도로,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만큼 완벽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그 흐름을 타 다른 사람들의 대화에 녹아드는 건 쉬운 일이었다. 오늘의 행사에서 가장 많은 물품을 제공하고, 또 많은 기증품을 사 간 아델라인은 모두에게 환영받는 상대였다.
그렇게 대화 역시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누군가의 입에 의해 주제가 바뀌기 전까진.
“그나저나, 다들 오늘 오전에 뿌려진 호외를 보셨나요?”
누군가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황후 마마께서 중태에 빠지셨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얼씨구, 말을 지어내는구만.
아델라인은 웃음을 꾸며 내면서도 ‘중태’라는 말을 꺼낸 여성을 향해 속으로 비꼬듯 중얼거렸다.
호외지의 짤막한 기사 그 어디에도 황후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없었다. 그저 두루뭉술한 내용뿐이었다. 그야말로 활자 조합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구체적으로 말을 지어낸다는 건…….
저 여자도 호외지와 같은 역할을 받은 걸까.
아델라인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맞장구를 쳐 줬다.
“하긴, 호외에서는 아직 궁내부가 발표를 미루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델라인이 기사의 내용으로 가볍게 반응을 해 주자 조금 더 일이 수월해졌다고 판단한 건지, 그녀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무얼 숨기고 있는 건지. 친위대가 경비 임무를 맡았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말이지요.”
“하긴… 이번에는 수도경비대와 육군이 경비 임무를 맡았지요. 그래서 이렇게 일이 생긴 걸까요?”
“뒤처리도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고요. 다들 바쁜 사람인데, 일일이 조사를 하느라 아침까지 사람들을 붙들어 두고 말이지요.”
분위기가 점차 수도경비대와 육군을 향한 비난으로 흘러가려는 찰나. 아델라인의 옆에서 누군가가 그 흐름을 멈춰 세웠다.
“멀리서 보기는 했지만, 황후께서는 안전하셨던 거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범인도 생포해 이송하더군요.”
고개를 돌리자, 경매 행사를 진행했던 외과의, 다니엘 로크가 사람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물론 총성이 울린 다음에 바라보긴 했지만, 범인은 손과 어깨에 총상을 입고 검을 놓쳤더군요. 대략 황후로부터 3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위치였습니다.”
그러자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이끌어 가던 여성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 뒤로는 천장에서 진녹색 제복을 입은 이들이 내려와서는 팔과 어깨를 무릎으로 누르며 제압했었습니다. 물론 군대는 가 본 적 없지만, 그래도 실력 있는 이들이라는 것은 알겠더군요.”
“팔과 어깨를 눌렀다는 건… 총으로 쏜 부분을 일부러 누른 건가요?”
그 말에, 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만적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미 제압까지 했는데 그렇게 고통을 주려 하다니.”
“제 생각은 다릅니다.”
로크는 아델라인을,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알렉스를 향해 시선을 던진 뒤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고통을 주려면 총상을 직접 눌렀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총상을 피해서 압박했습니다. 아마 출혈을 줄이려는 의도겠지요. 실제로 그 직후에 한 병사가 다른 병사들과 함께 응급 처치를 실시했고.”
그의 말에, 사람들은 흥미를 잃었다. 생각보다 시시한 일이었다는걸 알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흩어지고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바람잡이 역할을 하던 여성마저 자리를 뜨자, 결국 그 자리에는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자 로크는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으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제가 괜히 끼어든 걸까요. 목격자일 뿐인데.”
그러나 알렉스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공짜 변호사는 언제나 환영이지요. 라이플 여단 파견중대장, 대위 알렉스 매닝햄입니다.”
알렉스가 손을 내밀자, 로크는 그 손을 잡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세인트 조지 병원 외과의, 다니엘 로크입니다.”
그러자 알렉스는 손을 흔들어 악수한 뒤 기억 속에서 한 가지 정보를 끄집어내 대화를 이어 나갔다.
“들어본 이름 같은데… 이번에 혹시 소독약 관련해서 논문 쓰신 적 있습니까?”
“아, 그 논문. 운 좋게 학회지의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지요. 혹시 의술도 익히셨습니까?”
“간단한 응급 처치만. 대신 우리 중대에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의료 인력이 있어서 말입니다. 저 같은 엉터리 의무병 말고.”
“아… 사실 아직 실험 단계에 불과한 내용인데요, 그 내용은.”
“보관도 사용도 힘든 페놀산보다야 낫겠다고 하더라고요.”
아델라인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의학이라는 의외의 지점에서 대화 주제를 찾은 두 사람의 대화는 이내 다른 의사들을 끌어모았다.
그렇게 얼마 동안 대화를 이어 나갔을까, 알렉스는 잠시 잔을 비운 뒤 음료를 가지러 가겠다며 몸을 돌려 아델라인에게 다가왔다. 한번 불이 붙은 대화는 알렉스가 빠져도 끊기지 않았다.
그 대화의 장을 흘끗 바라본 알렉스는 곧바로 시선을 돌리고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후우 내쉬었다.
“절반은 못 알아먹는 이야기였네요.”
그러자 아델라인은 실소를 흘리고는 음료 바를 향해 그와 함께 걸어갔다.
“절반이나 알아듣다니 대단한걸요, 저는 일찌감치 도망쳤잖아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짤막하게 한마디로 장난스럽게 쏘아붙였다.
“비겁자.”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도망쳐도 된다고 알렉스가 직접 가르쳤잖아요.”
“아군을 버려도 된다고 한 적은 없는데.”
“알렉스라면 잘 빠져나올 거라 생각했어요.”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향해 음료 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러자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잔을 받아들었다.
“저를 너무 맹신하네요.”
“신뢰라고 해 주세요, 별 차이가 있겠냐마는.”
그러자 알렉스는 피식 웃으며 그녀와 잔을 맞부딪혔다. 맑은소리가 들려오고, 잔을 반 정도 비웠다.
먼저 잔에서 입을 뗀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나눴어요?”
“뭐… 로크 씨와 이야기 나눈 건.”
알렉스는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팩. 그놈을 의사로 만드는 법에 대해 잠시 이야기 나눴어요.”
“파코프스키 병장 말인가요?”
그러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실전 경험도 많고, 지식도 스스로 독학해서 쌓아 왔으니… 기회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뭐, 본질적인 이유는…….”
알렉스는 쓰게 웃으며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당장 부족한 장교 한 명 만들 구실이지만요. 여단 본부에서도 군의관은 무조건 임관을 허가해 주니까.”
“…많이 힘든가요?”
“많이 힘들기도 하고… 많이 삐걱거리기도 하고. 높아진 화력에는 그걸 지휘할 장교도 더 필요하니까요.”
알렉스는 잔에 남은 음료를 들이켜며 말했다.
“뭐, 내일 필즈먼 대장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요. 무작정 상부에 찌르는 것보다는 위아래로 의견을 같이하는 게 훨씬 절차가 빨라질 테니까.”
그러자 아델라인은 놀란 눈으로 알렉스를 바라봤다.
“필즈먼 대장님이 오신다고요? 내일 육군성 연회에?”
“일단은 육군이잖아요? 내각 회의에 참석하느라 수도에 온 김에 들르시는 것이겠죠. 이런 연회를 굳이 찾아서 참석하는 성격은 아니시니까.”
말을 마치고 새로운 잔을 집어 든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질문을 했다.
“저번에 만나 뵙지 않았나요?”
그러자 아델라인은 과거의 기억을 뒤져 봤다. 딱 1년 전, 딱 한 번 필즈먼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아, 그랬었죠. 분명 그때도 황궁에 볼일이 있어서 오셨던 거라고 알고 있었어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잠깐 만났던 것뿐이지만, 이번에는 좀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을 거예요.”
“이야기라…….”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확실히, 필즈먼과 오래 이야기를 나눌 첫 기회였다. 가장 처음으로 필즈먼을 대면했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아델라인이 생각을 이어 나가고 있을 때, 알렉스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옷 맞출 때 말이에요. 그때 무슨 옷을 저 몰래 준비하신 거예요?”
“궁금해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참아요, 내일 알게 될 거예요. 아, 참.”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향해 한마디 당부를 했다.
“내일은 라이플 여단 제복 입고 와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