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위기의 순간
황궁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수많은 가로등이 넓은 황궁 부지를 비추고 있었기에, 음료를 홀짝이며 눈요기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즐겁지는 않았다. 커튼이 막는 척 흘러 들여보낸 연회장 내부의 밝은 목소리와 현란한 악기 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외로움이 더 커지는 것 같았다.
“빨리 안 끝나려나.”
안으로 들어가면 또 자신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 오는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공작이 말했던 것처럼, 아군을 만드는 건 중요했으니 그들과의 대화를 소홀히 할 수도 없었다.
가기 싫다, 와 가야 한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던 아델라인은 결국 한숨을 푹 쉰 뒤 의자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도 부자연스러울 테니까.
바로 그때, 커튼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알렉스일까, 아델라인은 내심 기대하며 두어 발자국 물러나 상대를 기다렸다.
그러나 커튼 너머에서 나타난 건 알렉스가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남작님.”
아델라인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사람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샴페인을 권하던 청년. 좋게 말해도 미남은 아닌 얄팍한 얼굴의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벽을 칠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미소를 꾸며 내며 답했다.
“아, 네. 밤바람을 쐬니 그래도 한결 편안해지네요. 무슨 일이신가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그 청년은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전에, 샴페인을 드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물음에, 아델라인은 뭐지? 하는 표정으로 그를 잠시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능숙하게 청년의 질문에 답했다.
“아까 말했지 않나요? 아직 작위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어서 해야 할 일이 적지 않다고요. 오늘도 연회가 끝나면 업무를 해야 하거든요.”
연회에서 남이 건네주는 음료를, 그것도 생판 남이 건네주는 건 마시지 않는 게 상식이지만, 그 말은 기본적으로 상대를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아델라인의 답을 들은 청년은 아델라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며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그는 기이하리만치 붉은 눈동자를 아델라인과 마주했다. 그 눈을 본 아델라인은 숨이 순간 멎는 듯했다.
사냥대회에서, 그리고 세인트 조지 병원에서 본 눈.
자신을 노려 왔던 붉은 핏빛의 눈을 떠올린 아델라인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손가방 안에서 데린져 권총을 찾아 쥐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당신은, 제가 음료를 드렸어도, 물을 드렸어도 받지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많이 취하신 것 같네요. 일찍 들어가 보시는 게 어떨까요?”
“저는 멀쩡합니다, 당신 같은 위선자보다!”
그는 또다시 아델라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누구는 늦게 태어나서 다 허물어져 가는 저택 하나도 상속 못 받는데, 고작 천민들에게 수프 한 그릇 나눠 줬다고 작위와 영지를 거저 받고!”
“…….”
“분명 저같이 상속받을 가능성도 없는 삼류 귀족 나부랭이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제가 건넨 잔을 그리도 쉽게 내려놓았겠지요! 제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면서, 옆에 붙어 다니던 대위에게는 그렇게도 다정한 시선을…….”
아델라인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청년. 그녀는 손가방 안에 넣은 손의 손목을 비틀어 총을 내보이지 않은 채 총구를 그에게 겨눴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온다면 방아쇠를 당길 각오로. 아델라인은 웃음기를 지우고 긴장이 맴돈 얼굴로 청년을 바라봤다.
바로 그때, 청년의 뒷목이 잡혀 거칠게 뒤로 끌려갔다. 그러자 청년은 목이 졸린 채 뒤로 끌려 나가며 버둥거렸다.
“큭!”
그러나 버둥거린 보람도 없이, 그는 단 한 번의 손짓에 테라스 한쪽으로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그러자 그 뒤에 있던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술주정으로 치고 넘길 수 있는 건 지금이 마지막입니다, 로베르트 세드릭.”
아델라인의 상태를 보고 안도의 눈을 한 그는 다시 표정을 굳힌 채 남자를 향해 몸을 돌리며 경고했다.
“…너! 그래! 네놈!”
로베르트는 알렉스를 향해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보다 부족한 게 뭐길래, 평민에 불과한 너는 로피츠 영애의 곁에 붙어 있고, 나는 그 모습을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봐야 하는데!”
이성을 잃어버린 듯한 모습. 알렉스는 아랑곳 않고 아델라인의 손을 잡은 뒤 그녀에게 말했다.
“자, 돌아가죠. 커크만 교수께서 소개해 주실 아카데미 교수님이 있으시다네요.”
그는 아델라인과 눈을 마주친 뒤, 로베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 낭비하기엔, 아까운 밤이잖아요?”
그 말을 들은 아델라인은 로베르트를 바라본 뒤 곧바로 그의 손을 꼭 맞잡았다. 그러자 로베르트는 이를 뿌득뿌득 갈며 손에 있는 장갑을 한 짝씩 벗었다.
그걸 본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손을 놓은 뒤, 로베르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던지실 건가요?”
“모욕에는 명예를 건 결투로 싸울 뿐!”
“누구를 향해서 말인가요. 매닝햄 대위를 향해?”
아델라인의 물음에, 로베르트는 알렉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뒤늦게 알렉스의 위치를 떠올린 건지 한층 머뭇거리며 나머지 장갑을 벗었다.
수도는 한없이 평화로웠지만, 지금은 엄연히 전쟁 중이었다. 전시 상황에서 군대에 몸을 담고 복무하는 장교를 향해 결투를 건다는 건, 상식 밖의 무례한 짓이었다.
“아니면 저를 향해?”
아델라인이 질문을 비틀어 묻자, 로베르트의 눈에 맺혀 있던 붉은 기운이 사라지며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감당 가능하신지요. 그리고… 감당 가능한 입회인을 수배할 수는 있는지. 세드릭 가문의 삼남?”
아델라인은 로피츠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귀족 자제가 아델라인을 향해 결투를 건다는 건, 로피츠 공작가를 향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이런 일에 말려들고 싶어 하는 귀족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결투를 말리지 못하고 연루된다는 것 자체가, 귀족 사회에서는 불명예에 가까웠다.
“누구를 상대로 그 가벼운 입을 열고 있는지 항상 생각하세요.”
장갑을 던질 힘도, 각오도 없어진 채 팔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를 눈에 담은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팔을 잡아끌며 테라스의 커튼을 젖혔다.
“자, 돌아가요. 알렉스.”
그렇게 연회장에 들어서자, 아델라인의 눈에는 믿지 못할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 남자가, 황후를 향해 검을 뽑아 든 채 달려들고 있었다. 그 장면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느릿하게 눈앞에서 펼쳐졌다.
아델라인은 곧바로 손가방 안에 손을 집어넣고 데린져를 쥐었다. 그러나 일순간, 그녀의 머릿속에서 갈등이 일었다.
황후를 돕는 게 맞을까. 이번에 황후를 살려도, 계속해서 자신과 대립할 황후를 구하는 게 맞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려는 찰나, 아델라인의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온 폭음이 그 생각을 깨부쉈다.
하얀 연기가 눈 앞을 가렸고, 귀울림이 머릿속에 울리던 잡념을 산산이 흩어 놓았다. 곧이어, 또 다른 총성이 연회장을 울렸다.
그렇게, 흥겹던 연회는 일순간 산산조각 났다.
* * *
아델라인은 의자에 앉아 침을 계속 삼켰다. 남아 있는 귀울림이 머릿속 신경을 갉아 내는 듯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손바닥으로 귀를 눌러 보거나 침을 삼켜 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쉽사리 이명이 가시지 않았다.
바로 그때, 아델라인의 눈앞에 컵 하나가 내밀어졌다. 샴페인. 따라 놓은 지 꽤 시간이 지났는지, 탄산은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마시게나. 귀울림에는 뭔가 마셔서 턱을 열어야 해.”
고개를 들자, 휘태커 경감이 그녀에게 잔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잔을 받아 들어 샴페인을 들이켰다.
그러자 그제야 이명이 가라앉으며 주변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황후가 있던 자리 앞에는 한 남자가 포승줄에 묶인 채 엎드려져 있었다. 어깻죽지와 손에 감긴 붕대에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알렉스는, 주변을 둘러싼 라이플맨과 경비 대원들을 능숙하게 지휘하며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휘태커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좀 나아졌나?”
“아, 네. 덕분에.”
아델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빈 잔을 내려놓을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휘태커는 새로운 잔을 건네며 그녀의 손에 들린 빈 잔을 들었다.
“남아 있는 잔이 별로 없구만. 샴페인이 아니라도 괜찮겠지?”
그렇게 말하며 휘태커가 잔 가장자리에 오렌지 슬라이스가 꽂혀 있는 음료를 건네자,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으며 그 잔을 받아 들었다.
“이편이 더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얼. 그나저나 자네 손가방 말인데.”
휘태커는 아델라인의 손가방을 내려다본 뒤 손에 들린 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꺼내지 않은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네.”
그러자 아델라인은 실소를 머금었다.
“알고 계셨나요.”
“클린턴 경위는 우리 제3 수도경비대 소속이라네. 뭐, 반쯤은 찍은 거지만… 그때, 손을 가방에 집어넣는 걸 봐 버려서 말이지.”
“…망설였을 뿐이에요. 개인적인 이유로.”
“망설임이 나쁜 건 아니지. 오히려 고민 없이 행동하는 것보다는 나은 처사라네. 자네는 민간인 아닌가.”
휘태커의 말에도, 아델라인의 마음속 한편에 남아 있는 찜찜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황후를 향해 달려드는 상대를 쏠 수 있었음에도, 그리고 소설 속 내용을 비틀기 위해서는 황후가 살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델라인은 데린져를 꺼내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방아쇠를 당기길 주저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휘태커가 알렉스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그녀를 향해 물었다.
“참 불합리하지 않은가? 임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목을 물어뜯으려 달려드는 들개도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한다는 것이.”
황후를 들개에 빗댄 적나라한 말에, 아델라인은 놀란 눈으로 휘태커를 바라봤다. 황후랑 적대하는지는 어떻게 알았느냐는 눈빛에, 그는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듯 그녀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클린턴 경위는 내 부하라네. 뭐, 그 때문에 그 목걸이 사건부터 자네나 알렉스 그놈과 계속 엮이는 건지도 모르지만.”
“…….”
“대위 같은 군인이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는 건 당연한 일이라네. 하지만, 자네마저 그렇게 변할 필요는 없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잔을 비운 휘태커는 아델라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대위 대신 의문을 품어 주고, 대위 대신 의문을 표현하며, 불합리에 항의하게. 그렇게 불합리한 상황으로부터 대위를 지켜 주게. 그것이야말로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걸세.”
그러자 아델라인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경감님.”
“오늘은 먼저 들어가게, 내가 말을 해 놓을 테니.”
그러자 아델라인은 주변을 둘러봤다. 사건이 터져 버려, 다른 내빈들은 경비 대원들의 인솔에 따라 다른 곳으로 안내되고 있었다.
“다른 분들은…….”
아델라인이 커크만 교수와 피츠허버트 백작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끝을 흐리자, 휘태커는 그녀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뭐, 간단한 조사 차원이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특히 의원이나 교수같이 신원이 확실하고 중책을 맡고 있는 이들은 우선으로 조사를 마치고 귀가 조치를 내릴 테니 수십 분 내로 돌아갈 수 있을 거네.”
그러자 아델라인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휘태커가 휘파람을 불어 경비 대원을 불렀다.
“경사, 남작을 마차까지 에스코트하게. 가는 길에 사용인 대기실에 들러서 사용인도 챙기고.”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그렇게 아델라인을 보낸 휘태커는 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뭔가 밝혀냈나?”
그러자 알렉스는 그에게 범인이 뽑아 들었던 검을 건넸다.
“한번 보십시오.”
그러자 그는 자연스레 검을 받아 든 뒤 꼼꼼히 살펴봤다. 다른 예식용 검과 다를 바 없는 화려한 장식이 달린 검…….
“어?”
예식용이기에, 무딜 수밖에 없는 검. 그러나 무딜 리가 없어야 하는 검.
휘태커는 손으로 칼날을 살짝 쥐어 봤다.
그 검의 날은, 사람을 해치기에는 한없이 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