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알현 궁 앞에서, 다시 한번
사교 시즌의 첫 시작, 알현식이 진행되는 알현 궁 앞은 작년 이맘때처럼 사람으로 가득 찼다. 그 인파들 사이에서, 아델라인은 손가방 하나를 들고 나이아와 함께 서 있었다.
“사람 많네.”
“작년보다도 어째 더 많은 것 같네요, 오늘은.”
“그러게, 사람 진짜 많다.”
아델라인은 사람들의 물결을 바라보며 길가의 시계를 바라봤다. 약속 시간까지는 10분 넘게 남아 있는 상황. 마차가 막힐 것 같아서 일찍 왔는데, 일찍 도착하고 보니 10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알렉스는 이걸 기다려 줬던 걸까. 자신이 매번 늦을 때마다, 우두커니 서서 자신이 올 때까지 의미 없이 시계를 보고 사람들을 보는 걸 반복했던 걸까.
“어쩐지 부끄러워지네.”
“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아델라인은 손을 내저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강조한 뒤, 다시 시계를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길 반복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오랜만에 뵙네요, 아델라인.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익숙한 목소리. 그렇기에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
아델라인이 고개를 돌리자, 피오나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표정이 일제히 굳었다.
“피오나, 루멘시아 영애.”
아델라인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하자, 피오나는 더욱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어머,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신데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말끝을 늘인 그녀는 보랏빛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아, 제가 드린 선물이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
“붉은 늑대와 카펜타리아. 꽤 훌륭한 선물이었죠?”
피오나의 말에, 아델라인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바로 그런 반응을 원했던 것인 듯, 그녀는 더더욱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발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아델라인의 눈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다칠 수도 있었다. 자신은 귀족이라 함부로 죽이지 못하겠지만, 힘없는 사람들은 그대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 생각을 하자, 더더욱 피오나가 용서되지 않았다. 고작 소설 속 여주인공이 되어 보겠다고 이 모든 일을 벌이고 있으니까. 속에서 쏟아 내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네가 보낸 선물은 단 한 명도 다치게 하지 못했고, 네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 맺어져야 하는 황태자는 사실 황제의 핏줄도 아니고, 네가 그렇게 무시한 알렉스가 황제의 핏줄이라고.
그러나 자신이 실수로 내뱉은 말이 피오나에게 어떤 이득이 될지 모르기에, 아델라인은 가만히 그녀를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피오나를 향한 분노로 감정적으로 변하고 있을 바로 그때, 아델라인의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뭐, 심심풀이는 되었습니다. 덕분에 말이지요.”
알렉스의 목소리.
그 짤막한 말을 담은 목소리가 대체 뭐라고, 가슴을 두들기던 심장 박동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알렉스의 차가운 손이 어깨에 얹어지자, 그 냉기가 흥분으로 자신도 모르게 달아올랐던 몸을 식혔다.
“…매닝햄 대위.”
“루멘시아 영애.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대위님과 같은 장교들 덕분에, 전쟁 중에도 평온한 삶을 보내고 있답니다.”
“다행이군요, 전우들이 기뻐할 겁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가는 두 사람. 그러나 여유 넘치던 피오나의 눈빛은 어느새 조금씩 경직되어 가고 있었다.
“대위님께서는 전선으로 나가시지 않는지요? 전선이 많이 후퇴했다는데… 참 걱정이네요.”
“여기서도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그건…….”
알렉스는 피오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루멘시아 영애께서 더 잘 아실 텐데.”
알렉스가 반걸음 앞으로 나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하자, 피오나는 반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제가 장교분들보다 더 잘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래도 안심이네요. 그러면, 안에서 뵙겠습니다.”
피오나는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걸음을 뗐다. 그렇게 두 사람을 피오나가 지나치던 그때, 알렉스가 입을 열었다.
“소설책, 잘 봤습니다. 꽤나 재미있던데요.”
그 말에 피오나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발소리가 멎은 걸 확인한 알렉스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흘겨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도… 주인공이 되었다는 착각에 할 짓 못 할 짓 가리지 못하고 다니시면.”
알렉스는 품속에서 그 책을 꺼내 보이며 피오나를 향해 말했다.
“이 책에 나온 악녀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겁니다.”
그 말에, 피오나는 알렉스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가 다시 걸음을 옮겨 알현 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알렉스는 품속에 다시 소설을 넣으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아델라인을 향한 알렉스의 눈은 언제 냉기를 띠었냐는 듯 다정함만 가득 머금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나요?”
“아, 아니에요. 작년에 알렉스가 저 기다린 거 생각하면.”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피식 웃으며 짓궂게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그때 거의 하루걸러 하루 늦고 말이야. 그것 때문에 가뜩이나 아픈 다리 더 아프고 그랬어요.”
그러자 아델라인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 잠시 눈에 담은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드레스 잘 어울리네요, 깔끔하고.”
오늘 아델라인이 입은 옷은 여느 때와 같이 정갈했지만, 특히 더 아름다웠다. 옷이 날개인지, 얼굴이 패션을 완성한 건지 구별이 어려울 정도였다.
아델라인의 가슴에 달린 훈장도, 그가 선물했던 브로치와 목걸이도 마치 드레스의 일부인 것 같이 잘 어울렸다.
“고마워요, 알렉스도 잘 어울려요. 변한 건 없지만.”
“최고의 칭찬이긴 하네요.”
“자,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알렉스의 권유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계단을 올랐다. 작년과 달리, 올해는 경비 대원들이 일일이 초대장을 확인하고 반입 금지 물품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생긴 줄 뒤에 선 두 사람은 줄어드는 줄을 따라가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 이거 말하는 거 까먹었는데…….”
알렉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오늘은 작년처럼 대원들하고 근무 서야 해요. 오늘하고 마지막 날, 황제 나오는 일정.”
알렉스는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이렇게 되어서…….”
그러자 아델라인은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미소와 함께 답했다.
“마음 쓸 거 없어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리고 누군가 해야 한다면, 당연히 가장 유능한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고요.”
아델라인은 그의 손을 꼭 잡아 주며 그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게 저는 오히려 더 편해요.”
진심을 담아 한 말이었지만,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배려라 생각했는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어느새 그들은 2인 1조로 검문을 수행하는 경비 대원 바로 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알렉스는 신분증을, 아델라인은 초대장을 건넸다. 그러자 경비 대원은 명단을 확인했다.
“알렉스 매닝햄 대위님. 확인되셨습니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고맙네.”
그사이 다른 경비 대원은 아델라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손가방 안을 확인하겠습니다.”
그러자 아델라인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 데린져 권총. 손가방에 넣어 두고는 빼놓는 걸 까먹어 버리고 말았다.
자칫하면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일단 검문을 받아야 하기에 아델라인이 경비 대원에게 손가방을 건네려는 찰나.
아델라인의 초대장을 확인하던 경비 대원이 다급하게 동료의 팔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그리고 이즐링턴의 남작, 아델라인 폰 로피츠 여사님… 확인되셨습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갑작스러운 동료의 반응에 당황한 경비 대원은 동료를 바라봤지만, 그는 미소를 지으며 직접 손으로 안을 가리켰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어리둥절하면서도 알렉스, 나이아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나이아는 들어가자마자 사용인들의 대기 장소로 향했고, 두 사람은 알현장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이미 주고받는 대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그녀가 처음으로 시선을 향한 곳은 다름이 아닌 천장의 통로. 통로에는 제3 수도경비대의 제복을 입은 경비 대원 몇몇과 함께 라이플맨들이 각자의 장비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즐링턴에서 안면을 익힌 몇몇 대원들과 눈을 마주친 아델라인이 살짝 손을 흔들자, 그들은 가벼운 경례로 그 인사에 답했다.
그 장면을 본 알렉스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작은 손짓으로 수신호를 보내자, 그들은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 연회장을 감시했다.
“질투하는 거예요?”
아델라인이 가볍게 묻자, 알렉스는 퉁명스레 답했다.
“아니거든요. 저쪽으로 가죠.”
“에이. 질투하는 거 맞네.”
“아니라고요.”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가볍게 투닥거리며 연회장 한구석으로 향했다. 익숙한 자리에 도착하자,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딱 작년 이맘때쯤에 이랬었는데. 참 세상일 알 수 없는 노릇이네요.”
“왜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사이가 이렇게까지 가까워질 줄은 몰랐었어요.”
그러자 알렉스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 처음 봤을 때 기억나요?”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죠. 그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위험하고 멍청한 짓이었어요.”
“우리 쪽도 난리였어요. 세이드 잡으려고 준비 다 하고 조용히 급습하려 했는데 갑자기 말 탄 여자 한 명이 뛰어들고 있다고 하니까.”
“그랬었어요?”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답했다.
“전투 벌어지는 중에 휘말리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것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먼저 스워포드한테 시켜서 석궁으로 말 쓰러트리고 잡아 오라 그랬던 거예요.”
“아하…….”
“그렇게 아델라인 잡은 채로 전투하고, 세이드까지 사살한 줄 알았는데 세이드는 살아 있다, 이러는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죠. 근데… 뭐.”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가 사살한 세이드는 가짜였다는 보고를 들으니까 난감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보내 줬던 거예요. 대체 뭔가 싶어서. 솔직히 그 뒤로 엮일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우연이 겹치고 겹쳐, 지금을 만들어 냈네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아델라인은 지나가는 시종의 손 위에 들린 쟁반에서 음료 두 잔을 집어 들어 알렉스에게 하나를 건넸다.
“뭐, 지금 이 순간을 있게 해 준 우연을 위해 건배나 할까요?”
그러자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우연을 위하여.”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