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데린져
드레스를 맞추며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굵직한 일정들은 정해졌지만, 여전히 일정이 비어 있는 날들도 많았다.
아델라인에게 나머지 일정을 모두 맡겨 버린 알렉스 덕분에, 그녀는 계속 고민을 이어 가며 초대장들을 뒤적였다.
그때, 나이아가 그녀에게 초대장을 하나 내밀었다.
“포사이스 교수님으로부터 초대장이 왔네요.”
그녀에게서 편지를 건네받아 훑어본 아델라인은 나이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학술 연구 발표회와 아카데미 여름 연회에 초대합니다…….”
직접 친필로 작성한 듯한 정성스러운 글씨체를 보자, 가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다행히 다른 연회와 겹치는 날은 아니었다.
그러나 학술 연구 발표회라는 단어를 보자,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대학 시절 때도 강의 절반은 자다 깨다를 반복했던 것 같은데. 만약 거기서도 졸아 버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어떤 분위기야? 약간 딱딱한 분위기야?”
반쯤 답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 질문을 하며, 아델라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이아를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딱딱하다 뿐이겠나, 분명 이해하기 어려운 수식들이 난무하는 학술의 장일 텐데.
“네… 뭐. 그리 재미있는 장소는 아니에요. 그래도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많아서, 유익한 건 확실해요.”
“유익… 나 같은 다 큰 성인에게 그런 건 필요 없지 않을까…….”
아델라인은 책상 위로 축 늘어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나이아가 소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포사이스 교수님께서 소포도 같이 보내셨어요. 여기 편지도 있네요.”
“어디.”
아델라인은 편지를 주욱 읽어 내려갔다. 두어 줄의 안부 인사를 지나자, 드디어 소포에 관한 내용이 나왔다.
[소포로 보낸 물건은 지원을 해 주신 이후 완성한 퍼커션 캡 기술을 이용한 새 총기입니다. 곧 사교 시즌이기도 하니, 호신용에 적합하도록 설계해 제작했습니다. 원래는 생일에 맞춰 완성해 전달하려 했으나, 안전을 위한 여러 테스트와 개량을 생략할 수 없었기에 늦어졌습니다.]
“…새 총기?”
아델라인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소포를 뜯어봤다. 그러자 나무로 짜인 함이 그녀를 맞았다. 아무런 문양도 없는 함을 열자, 손바닥만 한 조그마한 권총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렉스가 쓰는 피스톨이나 아델라인이 쓰는 리볼버보다도 훨씬 작았다. 멋들어진 각인이 마치 총이라기보단 총 모양의 액세서리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아델라인이 직접 총을 쥐자, 차가운 금속성의 감각과 묵직한 무게감이 자신의 존재 의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장식이 아니다.
사람을 해치고, 또 지키기 위한 무기이다.
“…안드레이를 불러와 줘.”
아델라인의 말에, 나이아는 곧바로 서재를 나섰다. 그사이, 그녀는 편지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보시는 바와 같이, 탄약 카트리지 연구의 첫 번째 갈래였던 종이 카트리지를 이용한 탄약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탄약은 실험을 진행 중이던 확장탄 기술 또한 적용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방식으로는 구현에 어려움을 겪었던 후장식 총기를 구현할 수 있었습니다. 이 총기는 그 결과물의 일환입니다.
사용법은 총기 함에 동봉했습니다. 구조가 간단하여 빠른 시간 안에 익히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늦지 않게 결과를 일부나마 선보일 수 있게 되어 기쁜 마음입니다. 이번 사교 시즌, 아카데미 학술 발표회와 여름 연회에서 뵐 수 있기를 고대하겠습니다.]
편지를 읽는 사이, 안드레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아델라인이 들고 있는 총을 바라보더니,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 총이 포사이스 교수님께 받은 총입니까?”
“응, 쓸만한지 알아보고 싶은데. 이런 총기는 시험 사격을 어떻게 해?”
아델라인의 말에, 안드레이는 턱을 손으로 잡고 골똘히 생각했다. 잠시 뒤,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방법이 있습니다.”
* * *
“그래서 불렀다고요?”
다음 날, 아델라인에게서 전후 사정을 들은 알렉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되물었다.
“네. 안드레이가 알렉스에게 물어보는 게 더 편할 거라고 해서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시험 사격 한 번 안 해 보고 총을 지니고 다니기는 힘들겠죠.”
“근데 시험은 어떻게 하는데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옆으로 물러나며 말했다.
“이제부턴 여기, 클린턴 경위가 설명할 겁니다. 혹시나 해서 데리고 온 게 정답이었네.”
그러자 클린턴 경위가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한 뒤 아델라인에게 설명을 했다.
“일단 남작님께서 이번에 습득하신 총기가 총포류를 취급하는 상점이나 공방을 통해 얻은 게 아닌 만큼, 총기 제원에 관한 서류를 작성해서 접수하셔야 합니다.”
“그렇군요.”
그때, 스워포드가 소매로 땀을 닦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설치 다 끝났습니다. 수조에 물도 채웠고.”
그러자 클린턴 경위는 고개를 끄덕인 뒤 설명을 이어 나갔다.
“총탄이 어떤 형태인지, 강선이 있는지 없는지. 격발 방식은 어떻게 되는지… 이것들을 조사해, 총기 사건 발생 시 빠르게 범죄자를 특정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그 점에서, 협조에 감사를 표합니다.”
“아니에요, 제 쪽에서도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아델라인이 미소를 살짝 지으며 말하자, 클린턴 경위는 마주 고개를 끄덕인 뒤 알렉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대위님. 도와주시겠습니까?”
“시작하면 되나?”
“네, 그렇습니다.”
그사이 설명서를 숙독하고 있던 알렉스는 부름에 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델라인,”
“여기 있어요.”
알렉스는 아델라인이 건넨 권총을 받아들었다. 처음에는 그 자그만 크기에 한 번, 손에 든 뒤에는 그 자그마한 권총이 품고 있는 냉기와 무게에 또 한 번. 탄약을 장전하며 그 편리함에 마지막으로 한 번.
소리 없이 감탄사를 내뱉은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한번 쏴 보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스워포드가 설치한 장치 앞에 섰다. 스워포드가 물을 채워 놓은 물독 앞에 선 그는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라이플과 비교하면 훨씬 뻑뻑한 방아쇠가 알렉스의 손가락을 저항했다. 하지만 그가 방아쇠를 당기자, 총성과 함께 권총의 두 총열 중 아래 총열에서 연기가 터져 나왔다.
한 시간 동안 이어진 사격과 기록 끝에, 드디어 모든 절차가 끝났다. 그동안 장전과 사격을 반복했던 알렉스는 얼얼해진 손을 휙휙 털며 중얼거렸다.
“후. 손가락 아프네.”
“어땠어요?”
그동안 뒤뜰에 가져다 놓은 의자에 앉아 있던 아델라인이 다가와 찻잔을 내밀며 묻자, 알렉스는 자신도 자각하지 않고 있던 갈증을 차로 달래며 답했다.
“뭐… 완벽한 총이라고 부르기는 힘듭니다.”
알렉스는 찻잔을 내려놓은 뒤 오른손을 왼손으로 꾹꾹 주무르며 말했다.
“방아쇠는 너무 뻑뻑해서 정확도를 기대하기 힘들어요. 총열 길이가 제가 지금까지 봐 온 총 중에서 제일 짧고요. 총열이 짧으면 정확도도 떨어질 테니 멀리 있는 사람을 향해 쏘기에는 한참 모자란 총이네요. 위력도 당연히 의심이 가고.”
한참 악평을 늘어놓자, 아델라인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좋은 뜻으로 만들어서 건넸을 텐데. 이런 반응이 나오다니 마음이 씁쓸했다. 개선을 위해서는 이 모든 단점을 기억해 뒀다가 전해야 할 텐데. 그럼 포사이스 교수는 얼마나 낙담할까…….
그렇게 아델라인이 걱정에 가득 찬 시선을 애꿎은 바닥으로 향하고 있을 때, 그녀의 귀에 알렉스의 마지막 말 한마디가 들려왔다.
“그래도… 잘 만든 무기입니다.”
알렉스는 손바닥 위에서 권총을 돌려 아델라인에게 손잡이 방향으로 총을 내밀며 말했다.
“…그렇게 단점이 많아도요?”
아델라인이 알렉스에게서 총을 넘겨받자, 알렉스는 찻잔을 다시 들며 말을 이어 나갔다.
“뭐, 단점 없는 총 어디 있겠습니까. 머스킷은 길이가 길고 무거워서, 제식 라이플은 장전 속도 느린 데다가 산탄도 마음껏 못 써서… 다 단점은 있는 법이죠. 하지만, 그들이 제식으로 채용된 이유는.”
알렉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아델라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권총은 훌륭한 물건이네요. 리볼버보다 더.”
그러자 아델라인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포사이스 교수에게 전할 희소식이 나왔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한결 편하게 만들었다.
그때, 서류의 작성을 마친 클린턴 경위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거의 다 작성을 마쳤는데, 한 가지 채우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질문 하나만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당연하죠. 말씀하세요.”
“혹시 총기의 이름이나 일련번호 같은 게 있을까요?”
물음에 아델라인은 머릿속을 뒤적였다. 그러나 실험용 총기, 시제품, 호신용 총기라는 편지의 단어들만 떠올랐다.
바로 그때, 아델라인의 머릿속에서 편지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연구실의 엔지니어 겸 석사 과정 학생인 데린져 군이 디자인한 도안을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데린져. 데린져 권총이면 될 것 같네요.”
그러자 클린턴 경위는 빠르게 빈칸을 채운 뒤 그녀에게 서류를 건넸다.
“서류 작성 다 끝났습니다. 이제 이 서류를 접수하기만 하면 모든 법적 절차가 끝납니다. 물론 접수 시에는 총포세가 부과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내민 서류를 받아 든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했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대단하군요, 역시.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는 게 체감됩니다. 부싯돌 없이 발사하는 총이라니.”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기술이에요. 그렇기에 공작가에서도 연구 지원을 이어 가고 있고요.”
“아하…….”
클린턴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은 뒤 모자를 벗어 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서류는 제3 수도경비대에 제출해 주시면 됩니다. 그때 총포세를 함께 납부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클린턴이 떠나자, 아델라인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저녁 같이 먹겠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퇴근 도장은 찍어야 하니까요. 자, 그럼 뒷정리는 스워포드에게 맡겨 두고 먼저 가 볼까요.”
그 말과 함께 아델라인의 손을 잡은 그는 저택 안으로 그녀를 이끌고 들어갔다. 분명 알렉스라면 같이 해체를 도울 거로 생각했던 그녀는 당황하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알렉스가 보내는 눈빛에, 그녀는 입을 다물고 얌전히 그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실내로 들어가자, 알렉스는 곧장 복도의 창문으로 향했다.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알렉스의 행동에, 아델라인은 당황하며 그에게 물었다.
“…뭐해요, 알렉스?”
“쉬잇. 이리 와 봐요.”
아델라인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아델라인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할 수 없이 그의 곁으로 가자, 알렉스는 소리를 내지 않고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뒤뜰에서는 스워포드가 혼자 장치를 해체하고 있었다. 부품들이 상자에 정리되어 차곡차곡 쌓여 갈 무렵, 뒷마당으로 또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스워포드 씨.”
“나이아! 무슨 일이야?”
“차 마시면서 하세요. 냉차에요. 혼자 하느라 힘들 텐데.”
나이아가 그렇게 말하며 잔을 건네자, 목이 말랐던 건지 스워포드는 벌컥벌컥 차를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다, 나이아는 손수건을 꺼내 그의 이마를 닦아 줬다.
그 장면을 본 아델라인은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얼굴을 화악 붉혔다. 말소리가 새어 나오려는 입을 막으며, 그녀의 눈은 정확히 두 사람에게 집중해 있었다.
“어쩐지… 알렉스는 알고 있었어요?”
그러자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사이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무슨 일을 했었는지… 일상적인 이야기가 오가고 나자, 스워포드의 입에서 질문이 나왔다.
“저… 나이아. 혹시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