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145화 (145/200)

145화 가면무도회의 핵심

“남부 훈련소 교관 단장 존 터너 중령입니다.”

“이즐링턴의 남작, 아델라인 폰 로피츠입니다. 이즐링턴까지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늦은 오후, 저택의 현관에서 아델라인은 눈앞의 중년 장교와 악수를 나눴다. 아델라인이 가볍게 대화를 트자, 터너도 자연스레 그에 응하기 시작했다.

“지원 요청을 받고 헌병대를 우선 파견하긴 했습니다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한 줄은 몰랐군요.”

“아닙니다, 저희 쪽 사람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으니 괜찮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차를 준비했습니다.”

아델라인의 말에, 터너 중령은 아델라인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복도에는 낮잠을 자고 일어난 라이플맨들이 제각각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아침까지 지도를 펼쳐 놓고 상황실 역할을 했던 응접실은 깔끔하게 청소된 채 다과와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델라인과 터너는 응접실의 소파에 앉은 뒤 찻잔을 들었다. 차로 어느 정도 목을 축일 만큼의 시간을 흘려보낸 뒤, 터너는 아델라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우선… 이 상황을 붙들고 해결해 주신 남작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상정했던 상황 내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상황이 위급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었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육군의 도움은 충분히 받았습니다.”

라이플맨들을 슬쩍 바라봤다가 다시 찻잔으로 시선을 옮긴 아델라인의 말에, 터너는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 그러면…….”

“의논을 해 보지요, 생각해 두신 방향이 있으신 듯하니.”

아델라인의 말에, 터너 중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 * *

장교단과의 저녁 식사까지 끝난 늦은 밤. 아델라인은 침대 위에 앉아 서류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아델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양팔에 짐을 한가득 안은 알렉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에, 아델라인은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러자 알렉스는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의문에 답했다.

“쫓겨났어요.”

“…….”

“비좁아졌다고, 대원들이 쫓아냈어요.”

그 말에, 아델라인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싶다가도, 아델라인이 봐 온 라이플맨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진짜요? 뭐, 저택에 방이 많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4인 1실로 바꾸기는 했는데. 교관단하고 헌병대 장교들을 밖으로 쫓아낼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저는 쫓겨났는걸요.”

“뒷마당에 천막 쳐 드릴까요? 날이 춥지는 않아서 괜찮을 거예요.”

아델라인의 짓궂은 농담에, 알렉스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뒤돌아 나가려 했다.

“뭐, 같이 지내고 싶다고 하면 안 될 건 없기도 한데.”

그러자 알렉스는 그 자리에 멈춰 서더니, 아델라인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같이 지내도 되나요?”

“잘 안 들리는데요?”

아델라인이 다시 한번 묻자, 알렉스는 질끈 눈을 감은 채 큰 소리로 외쳤다.

“같은 방에서 지내도 되겠습니까! 영주님!”

“입장을 허가하노라, 머물 곳 없는 나그네여.”

아델라인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알렉스에게 답했다. 그러나 영주님이라는 칭호를 알렉스에게서 들으니 아직 어색했는지.

“…그냥 아델라인이라 불러 주세요.”

“알아요, 한번 해 봤어요.”

미소를 되찾은 알렉스는 침실 한편에 짐들을 가지런히 놓은 뒤,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장교씩이나 되어서 대원들에게 밀려 쫓겨날 수도 있는 거예요?”

“장교 계급이 멍석말이를 막아 주지는 않잖아요. 쪽수에 장사 있나요.”

“그거 일리 있네요. 그러고 있지 말고 올라와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침대로 올라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서던 퓨질리어의 막사는 이제 다시 육군의 손으로 돌아갔어요, 대신 임대료를 매해 받기로 했고요. 우리는 포장도로와 상하수도, 그리고 장교와 부사관 관사를 짓기로 했어요.”

“돈이 꽤 들겠네요.”

“풀턴 경께서 주신 수표책을 써야 할 때인 거죠. 이제는 자재도 외부에서 들여와야 할 테니까.”

그 말과 함께 마지막 서류까지 검토를 마친 아델라인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알렉스의 옆에 누운 뒤,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이름 모를 도적단이 이즐링턴의 사냥꾼들과 그들의 함정에 걸려 자멸한 것으로 만들자고 했어요. 터너 중령이.”

그녀는 잠시 머뭇거린 뒤, 알렉스를 향해 질문했다.

“그렇게 해도 괜찮아요?”

“그렇게 해도 괜찮냐는 건.”

“용병들을 막아 낸 건 알렉스와 라이플맨들이잖아요. 분명 대단한 일일 텐데. 없는 일로 만들어 버려도 괜찮을까 싶어서…….”

그러자 알렉스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러려고 사복을 입고 싸운 거예요.”

“…네?”

“우리는 군인이니까, 귀족 간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개입할 수 없어요. 그것이 긴급하고 불합리한 상황이라도요.”

“그, 그럼…….”

“뭐, 사복을 입었다고 의심을 안 받는 건 아니겠지만… 가면무도회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어요?”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뻔히 누구인지 알면서도 서로 모른 척하는 거. 그게 가면무도회의 핵심이죠.”

그러자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입에서 나왔던 ‘가면’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잠시 뒤, 또 다른 의문이 따라왔다.

“그러면… 만약 한 명이라도 죽거나 다쳤으면…….”

그러자 알렉스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랬으면 당연히 연금이나 위로금을 받기는 힘들겠죠.”

“…….”

“대원들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아델라인을 인정했기에 나온 결과고요.”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델라인이 이뤄 낸 거니까,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뭐, 검술 연습은 슬슬 시작해야겠지만요.”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직 이름을 다 들어보지도 기억하지도 못했는데,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내일 요리사에게 부탁해서 맛있는 거 해 달라고 할게요.”

“그 정도면 좋아할 겁니다… 그나저나.”

알렉스는 웃음기를 거두고 아델라인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뭐 없나요?”

그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해맑게 웃으며 알렉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어요?”

그러자 알렉스는 등받이에서 등을 뗀 뒤, 침대에 옆으로 누워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알렉스의 깊은 눈을 마주하게 되자, 그녀는 새삼스레 얼굴을 붉혔다.

“키스해 줘요.”

몇 번이고 했던 키스인데, 분위기가 이렇게 되니 부끄러움이 가득 차올랐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입에 버드 키스를 남겼다.

짧은 입맞춤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이 정도면 괜찮죠?”

아델라인이 멋쩍은 듯 웃어 보이자, 그는 잠깐 한숨을 쉰 뒤, 아델라인을 또렷이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부턴 아델라인 책임이에요.”

그 말과 함께, 알렉스의 손이 아델라인을 끌어안았다. 잠깐의 입맞춤이 무색할 정도로, 두 사람의 몸은 서로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 * *

늦은 저녁. 황후는 꼬리처럼 달고 다니던 시녀들조차 물린 채 황궁 한구석의 공터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친위대가 전장으로 떠나간 이후, 강박적으로 시녀들과 함께 다니던 황후였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먼저 와 계셨군요, 황후 마마.”

“…이렇게 불러낸 이유가 뭐죠, 공작?”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을 모를 이유가 없었다. 뒤를 돌아보자, 어둠 속에서 갈색 눈동자만을 빛내는 로피츠 공작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한 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황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유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후작령에서도 전령이 갔을 테니.”

무기질적인 표정. 궁내부에서 일할 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을 마주한 그녀는 차분히 표정을 가다듬은 뒤 공작을 향해 말했다.

“용건을 말하세요.”

그러자 공작은 황후의 눈을 응시하며 묵직한 목소리로 황후의 지시에 응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황후.”

“…….”

“그 아이는 내 딸입니다. 내 아내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고, 공작가의 유일한 적통입니다.”

공작은 짚고 있던 지팡이를 다시 한번 고쳐 짚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드레이크 경과 그 수하들로 인내하겠습니다. 다음번에는, 대리인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약간의 서늘한 날카로움까지 품고 있는 듯한 공작의 말에, 본가에서 보내진 서신을 떠올린 황후의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는지 잊은 것 같군요, 공작. 이런 불쾌한 대화를 하기 위해 서신을 보낸 건가요?”

일단 발뺌을 하기 위해, 황후는 얼굴을 붉히며 공작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공작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황후를 내려다봤다.

“황후야말로, 누구를 상대로 말하고 있는지 잊은 듯합니다.”

“뭐, 뭐라고?”

예상치 못했던 공작의 반응에, 황후가 흠칫 몸을 떨었다.

“저는 제국 의회의 의장이기도 하나, 그 이전에 한 아이의 아비이기도 합니다. 그 아이를 상처 입힌다면, 황후께서도 그만큼 상처 입으실 각오는 하셔야 할 겁니다.”

공작이 한 단어씩 무게를 실어 가며 말하자, 황후의 기세는 점점 약해져 갔다. 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린 그녀는, 공작을 향해 비꼬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로피츠 공녀의 이름 한가운데에 ‘폰’이 들어가게 된 건가?”

황후의 말에, 공작의 동공이 한순간 진동했다. 그걸 놓치지 않은 황후는 계속해서 공작을 향해 몰아붙이듯 말을 이어 나갔다.

“하도 사랑스러워서, 제국 밖으로 치워 버리려 제국식 이름이 아니라 도이치식 이름을 지어 준 건가? 바다 너머 루거 가문의 영식과 결혼시키기 위해?”

“…….”

“한 아이의 아비라.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공작.”

그러자 공작은 잠시 고개를 푹 숙인 뒤, 다시 고개를 들어 황후를 마주했다.

“할 말은 그게 다입니까, 황후?”

“…….”

“나도 내가 한 실수를 잊은 것이 아닙니다. 미련하게도 세간의 소문에 오랫동안 휘둘려, 한때는 품지 말아야 할 감정을 죄 없는 아이에게 품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천천히 황후에게 다가가 한 발자국 거리만을 남긴 상태에서 멈춰 섰다. 공작의 체격은 황후의 몸에 그림자를 드리우기 충분할 정도로 컸다.

“그렇다고 황후가 선을 넘는 걸 좌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그는 눈을 깔아 황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로피츠 공작가의 힘은, 지금까지 내보인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직접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