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가면무도회의 끝
“…잠들어 버렸나?”
아델라인은 몸을 일으켰다. 알렉스가 떠난 뒤, 계속되는 걱정에 잠이 오지 않아 서재에서 밤을 지새울 생각이었지만, 어느새 자신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아델라인은 급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녀의 어깨를 차가운 손길이 지그시 눌렀다.
“더 자도 괜찮아요, 아델라인.”
커튼이 바깥의 햇빛을 막고 있어 방 안은 어두웠지만, 그 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만으로도 알렉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일단 한숨 돌렸어요, 그러니까 자도 괜찮아요.”
알렉스가 미소를 띠며 그녀를 안심시켰지만, 아델라인의 코를 자극하는 비릿한 냄새는 있던 잠기운마저 쫓아내고 말았다.
“다쳤어요?!”
아델라인이 벌떡 일어나 그의 몸을 살피자, 알렉스는 고개를 저은 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다친 것처럼 보이나요?”
햇빛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알렉스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겉으로 보이는 알렉스의 모습은 몸에 걸친 모직 옷에 먼지만 묻어 있을 뿐, 확실히 멀쩡했다.
그러나 안심하기엔 일렀다. 아델라인은 마치 몸수색이라도 하듯 알렉스의 몸을 두 손으로 거칠게 탁탁 두들기고, 옷을 들치며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찾아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알렉스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그걸 아델라인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손을 거두고 나자, 알렉스는 침대에 몸을 누이며 말했다.
“거봐요, 왜 날 못 믿는대.”
“전과가 있으니까요. 전과가.”
아델라인도 알렉스를 따라 침대에 누웠다. 이내 알렉스는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진 듯, 옅은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고 있었다.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몇 번이고 몇 시간이고 잡아도, 손을 놓으면 안타까울 정도로 빠르게 식어 갔다. 그렇기에 더욱 놓을 수 없는 그의 손을 잡으며, 아델라인은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때, 나지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공녀님.”
나이아의 목소리에, 아델라인은 몸을 일으키며 입술에 검지를 가져갔다. 그러자 나이아도 발소리를 죽인 뒤 아델라인에게 다가왔다.
“오라버니께서 공녀님을 찾으셔요.”
“알겠어.”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얼굴을 잠깐 바라본 뒤, 손을 놓으며 침대에서 나와 나이아를 따라갔다. 1층의 응접실로 들어가자, 잔을 하나씩 들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복 차림의 라이플맨들이 보였다.
“그래서, 붉은 늑대하고 카펜타리아, 이 두 개 용병단이 야간 침투를 시도했다고.”
안드레이의 물음에, 스워포드는 지도를 집으며 말했다.
“이곳과 이곳에서 용병단의 지휘 체계는 궤멸시켰고 남은 잔당들은 흩어졌으니, 어차피 위협이 못 될 겁니다. 기껏해야 영지 경계 바깥에서 대기 중인… 오셨습니까.”
아델라인이 나타나자, 라이플맨 모두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이 살짝 부담스러웠던 아델라인은 급히 손을 내저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모두 앉아, 밤새 고생했을 텐데. 안드레이가 날 찾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네, 일단 진행 상황은 공유해야겠다 싶어서요. 중대장님께서는?”
“내 방에서 눈 붙이고 있어. 지금 상황이 어때?”
그러자 안드레이는 응접실 탁자에 펼쳐 둔 지도와 그 위에 올린 나무 말들을 보여 주며 설명했다.
“붉은 늑대 용병단과 카펜타리아 용병단으로 이뤄진 선봉대의 지휘 체계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적 선봉대의 손실은 최소 4할, 여기에 지휘 체계까지 무너진 만큼 이제 선봉대는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 쪽 다친 사람은 얼마나 돼?”
“아무도 없습니다.”
그 짧은 한마디에 묻어 나오는 자부심. 아델라인은 안드레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질문을 이어 나갔다.
“앞으로 위협이 될 만한 요소는?”
“선봉으로 들어왔던 용병단은 드라무스 후작가와 우호 관계에 있는 귀족 가문 영지들의 치안 유지를 맡던 전력입니다. 아직 드라무스 후작가의 본 전력은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
“다행이라면 드라무스 후작가 내의 치안 유지 및 영지민 통제로 발이 묶인 전력도 많아, 상대가 가용 가능한 전력은 푸른 매 용병대의 일부, 270명밖에 안 됩니다.”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첫날부터 주변 영지에 대원들 보내서 정보를 수집한 결과물입니다.”
스워포드는 자부심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책상 한편에서 지도 귀퉁이를 누르고 있던 서류를 손으로 짚었다.
“여단에서 고르고 고른 파견 중대 중에서도 중대장님이 심사숙고해 추려 놓은 인원 아닙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요.”
그러자 안드레이가 곧바로 그의 미소를 격추했다.
“염병한다, 가위바위보 해서 져 가지고 왔으면서.”
안드레이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스워포드의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불쌍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
“이게 맞네, 찍었는데.”
안드레이의 추가타에, 결국 밑천이 바닥난 스워포드는 응접실 구석 소파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때, 안드레이의 옆구리로 나이아의 손이 다가갔다.
꽈악.
“끄아앗! 왜, 왜?!”
나이아의 손이 안드레이의 옆구리를 꼬집어 비틀었다. 영문 모를 공격에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이아를 바라본 안드레이였지만, 그녀는 그의 시선을 무시한 뒤 테이블 위의 주전자를 들고 스워포드에게 다가갔다.
“…계속하자. 그러면 오늘 밤에도 또 쳐들어올까?”
그러자 안드레이와 라이플맨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정보가 지휘 체계를 타고 위에 올라가는 건 꽤 오래 걸립니다. 이것만으로도 시간을 많이 잡아먹을 겁니다.”
“숲을 통과하는 건 불가능하단 걸 알았을 테고, 그렇다면 이즐링턴 중심으로 향하는 좁은 길만이 유일한 접근법인데. 과연 매복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밀어 넣을까요?”
“용병들이 지시를 따르지도 않을 겁니다. 용병대가 수백 명씩이나 들어갔는데 결과가 이 모양이면 위험 부담 때문에 지시를 따르지 않지요.”
“결정적으로…….”
“결정적으로, 드레이크 경의 입지도 위태로워서, 결정을 내리기 힘들 겁니다.”
“알렉스!”
알렉스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알렉스가 주인 없는 커피잔을 들고 설탕을 넣으며 안드레이의 말을 낚아챘다. 알렉스를 본 대원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손을 들어 경례했다.
“충성!”
그러자 알렉스도 천천히 손을 들어 경례로 답했다.
“충성, 다들 쉬어.”
“분명 잠을 자고 있었을 텐데…….”
“옆이 허전해서 자다가 깨 버렸지 뭐예요. 아무튼, 드레이크 경도 황후의 신임을 받아 드라무스 후작령을 경영하는 대리인일 뿐이에요.”
알렉스는 커피로 입술을 살짝 축인 뒤, 아델라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누군가는 영지군이 해산당하게 되는 상황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데. 과연 황후가 드레이크 경을 몸 던져 보호해 줄까요? 황후가 그러지 않는데, 누가 순순히 그의 지시를 따를까요.”
알렉스는 바닥이 드러난 커피잔을 아쉽다는 듯 흘긋 본 뒤,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자, 그러면 날도 밝았으니 슬슬 영지 경계로 나가 보죠. 어쩌면 드레이크 경과 대화를 나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으니.”
그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준비할게요.”
아델라인의 승낙이 떨어지자, 알렉스는 대원들을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기다릴게요. 너희들도, 환복하고 무장해서 대기. 가면은 더는 쓸 필요가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 * *
정오가 조금 지난 한낮, 가보로서 대대로 전해지던 화려한 갑옷을 입은 드레이크는 한껏 어깨에 힘을 넣은 채 이즐링턴 경계에 설치한 막사를 찾았다.
로피츠 가의 애송이가 고용한 사냥꾼의 아홉 배나 되는 수를 밀어 넣었으니, 제아무리 라이플 여단의 정예라도 이겨 낼 도리가 없을 터였다.
그래. 진작에 이렇게 해야 했다. 좋게좋게 대화로 풀어 나가려 해도 말을 안 들으니, 실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로피츠 공작이 제국 의회의 의장이라고 하지만, 이미 대연정을 통해 남부당의 의원들 여럿이 내각에 심어진 이상 의장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도 없었다. 이리 생각하니, 왜 진작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멍청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렇게 희망찬 미래를 그리며 한껏 도취한 그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서 내렸다. 주위를 둘러보자, 그의 귀에 앓는 소리가 여럿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용병 여럿이 몸 곳곳에 붕대를 감은 채 바닥에 누워 처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긍정적인 광경은 아니지만, 드레이크에게는 이마저도 장밋빛 미래의 일부로 보였다. 무력 충돌이 있었는데, 사람 하나 안 다쳤다면 말이 안 되지. 인심 써서 보너스까지 쥐여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 안에서 부하들에게 들은 보고는, 그의 머릿속을 마비시킨 취기를 단번에 걷어 냈다.
“…용병대가, 궤멸했다고? 용병 대장들은 다 실종되거나 죽었고?”
“그렇…습니다.”
머리를 가득 채우던 취기가 걷히자, 그 반동은 오롯이 몸으로 되돌아왔다. 종잇장같이 가볍던 갑옷은 어느새 족쇄가 되어 손발을 구속했다. 화사하던 눈앞은 캄캄해졌으며, 부상자의 신음마저 달콤하게 들려오던 귀는 더 이상의 정보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의 눈 앞을 가리던 장밋빛 미래가 걷히자, 그 뒤에는 심연처럼 깊고 어두운 절망만이 끝없이 펼쳐졌다.
영지군은 해산될 것이고, 가산은 압류될 것이며, 명예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대대로 내려오며 명예와 역사를 써 내려간 각 가문의 기사단 또한, 영지군과 함께 해산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것도 평민 출신의, 경보병 출신의 천박한 필즈먼 그자의 손에 의해.
그렇게 암담한 미래 속에서 한 줌 희망이나마 찾아보려 헤매던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붙들었다.
“드레이크 님, 정신 차리십시오. 이즐링턴의 남작이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초점을 잃은 그의 눈에 기이한 광기가 깃들었다. 까마득한 심연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희망을 찾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 나가야지.”
그는 실실 웃음을 지으며 천막을 나갔다. 그러자 막사 바로 앞에 서 있는 아델라인과 그 옆에 서 있는 알렉스, 그리고 그 뒤에 병풍처럼 선 라이플맨들이 눈에 들어왔다.
“좋은 오후입니다, 경. 며칠간 잘 지내셨습니까?”
아델라인의 얼굴에 꽃핀 미소를 보자, 마음속에서는 천불이 이는 듯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오히려 차분했다.
“그렇습니다. 남작께서는 잘 지내셨는지요.”
앞으로, 몇 발자국만 앞으로 다가가면 된다. 그러면 멍청하게 갑옷도 입지 않고 자신 앞에 나타난 저 계집년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주하며 숨이 멎을 것이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영지의 업무를 보시느라 바쁘실 텐데, 여기는 무슨 일로.”
“아, 저번에 말씀해 주셨던 시정잡배들을 잡은 것 같아서. 처리를 논하기 위해 왔답니다.”
그 말을 하며 아델라인이 손을 들자, 라이플맨들이 옆으로 갈라서며 뒤에 감추고 있던 것을 내보였다. 자신이 보낸 용병들이, 줄줄이 밧줄에 묶여 있었다.
물러설 곳이 없어졌다.
“자, 어떻게 할까요?”
아델라인이 해맑은 미소로 묻자, 드레이크에게 남아 있던 일말의 인내심도 사라졌다. 그의 손이, 허리춤에 찬 검집으로 향했다. 평생 다뤄 온 검을 뽑는 건 순간이었다.
그러나 아델라인에게로 검을 겨누기 위해 고개를 정면으로 향하자, 그의 눈앞에는 리볼버의 시커먼 총구가 그를 맞고 있었다. 그의 몸이 순간 경직되어 멈추자, 아델라인은 차가운 눈으로 드레이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려놓으세요, 경. 같은 귀족으로서 베푸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그때, 제복을 갖춰 입은 이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붉은 제복을 입은 육군이었다. 그걸 보자, 모든 게 끝났음을 직감한 드레이크의 손에서 힘없이 검이 떨어졌다.
그가 손에 쥐려고 했던 모든 희망, 그리고 허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