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남부의 오찬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은 이쪽으로! 주민 등록을 해야 일자리도 나눠 줄 수 있어요!”
“일단 새로 온 사람들은 오두막 지어지기 전까지는 막사에 수용해. 쓸 수 있는 거주 시설이 제한되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또 마을로 들어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즐링턴의 숲에서 몇 날 며칠을 숨어 있었던 듯, 그들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초췌함이 묻어나 있었다. 마차의 창문을 통해 그 모습을 본 아델라인은 고민에 잠겼다.
“주변 분위기가 많이 안 좋나 봐요.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는 걸 보니.”
“주변 영지에서는 더욱더 영지민들을 쥐어짜고 있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세금을 부과하거나 어린 애들도 징병하려 하니, 이탈하는 속도는 더욱 빨라지겠지요.”
알렉스는 어젯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대원들의 보고를 아델라인에게 전했다. 여기에 온 지 3일째지만, 사람들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이즐링턴이 수용할 수 있는 인원도 무한한 건 아닌데… 영지 시설 정비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자리도 많지 않다고요.”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며칠 남지 않았어요. 극단적인 방법인 만큼 후폭풍도 꽤 있겠지만, 어떻게든 소화해 봐야겠죠.”
알렉스가 필즈먼의 ‘최후통첩’을 상기시켜 주자, 아델라인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며칠 남았죠, 그건?”
“오늘 포함 딱 일주일 남았네요. 이미 육군 본부에서는 남부로 헌병대와 감찰대를 파견했습니다. 저번에는 감찰과 현황 분석의 목적이 강했다면…….”
“이번에는 영지군의 해산. 이 목적인 건가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육군 중앙훈련소에서도 교관단이 파견되었습니다. 며칠 내로 영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해산된 영지군을 흡수해, 새로운 연대로 재창설 하는 역할을 맡겠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뭘까요.”
“뭐, 일단은…….”
알렉스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즐링턴을 나오자, 노골적으로 영지 경계에 천막까지 치고 자리 잡은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아델라인과 알렉스가 탄 마차를 대놓고 노려봤다. 당장 이즐링턴으로 들어간 영지민들을 끌고 나와야 그들도 살길이 있었다.
하지만 로피츠라는 공작가의 성과 황제가 직접 하사한 영지라는 위상, 그리고 숲으로 몰래 들어가도 순식간에 그들을 포착해 내는 진녹색 제복까지.
그 세 가지 요소가, 주변의 영주들이 함부로 이즐링턴에 손을 뻗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공작가와 척질 위세도, 황제와 대립할 입지도, 필즈먼 대장과 대적할 실력도 없었다.
“이즐링턴을, 영지의 독립성을 지켜 내는 것이겠지요. 그래야 그때 아델라인이 했던 말을 지킬 수 있겠지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는 것 말이죠.”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눈을 감고 생각을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 나올까요? 협박? 회유?”
“협박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비록 이즐링턴과 공작령을 잇는 길이 다른 영지를 지나긴 하지만, 그 길을 봉쇄한다면 우리가 뚫을 수 있습니다.”
“…힘으로요?”
“엄밀히 따지면, 전시 사령관이자 육군 본부장의 힘으로요. 군사 통행에 방해된다는 명분이면 봉쇄를 시도하는 것조차 각종 죄목으로 기소할 수 있으니까요.”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무릎 위에 얹어 놓았던 모자를 들어 보였다.
“뭐, 다른 방법이라면 이즐링턴을 통하는 하천 상부에 치수 시설을 지어 수자원 부족을 일으키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오래 걸리고, 또 돈이 많이 들죠.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회유밖에 답이 없겠네요. 저들로서는.”
“아니면 정말로, 정말로 극단적인 방법을 쓴다든지.”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역시, 오늘의 오찬에서는.”
“원론적인 대답만. 희망을 가질 법한 원론적인 대답만 말이지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말이죠?”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이야기를 마치자, 그 뒤로는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 가던 중, 마차는 한 저택의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도착했네요, 드레이크 경의 저택에.”
그 말에, 아델라인은 창밖을 바라봤다. 이즐링턴의 저택에 비하면 훨씬 큰, 어쩌면 공작령의 저택과 맞먹을 듯한 규모의 저택이었다. 그 저택의 현관에는 마치 위세를 과시하듯 수많은 사용인이 늘어서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라무스 후작령을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인물답게, 위세가 대단하군요.”
알렉스가 마차에서 먼저 내린 뒤, 그녀의 손을 잡아 에스코트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황후의 사촌 동생이랬나.”
아델라인까지 마차에서 내리자, 두 사람을 향해 중년의 남성이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남작님. 제 이름은 조슈아 드레이크라고 합니다.”
“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 이즐링턴의 남작, 아델라인 폰 로피츠입니다. 이쪽은 알렉스 매닝햄 대위. 이즐링턴으로 파견된 라이플여단 지원대를 이끌고 있지요.”
“알렉스 매닝햄입니다.”
“대위의 이름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군요.”
알렉스를 바라보는 드레이크의 눈빛이 바뀌었다. 마치 더러운 것을 보듯 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보자, 아델라인의 마음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며 드레이크를 바라봤다.
아델라인의 시선을 느끼자, 드레이크는 알렉스에게서 시선을 거둔 뒤 몸을 돌려 두 사람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드레이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내부는 넓고 화려했다. 수많은 보물이 복도와 방을 장식하고 있었으며, 저택을 관리하는 사용인들 또한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아델라인의 머릿속에서는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마치 쓰러지기 전, 허세를 부리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복도를 지나 식당에 들어서자, 긴 테이블 한가득 음식이 늘어 놓여 있었다. 드레이크는 한쪽 자리에 앉으며,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남부의 식재료로 차린 부족한 식탁이지만, 마음껏 즐기시길.”
드레이크의 말에, 두 사람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을 가리키면, 옆에서 대기하던 사용인이 접시에 덜어 주는 식이었다.
그렇게 다양한 요리를 즐기고 있을 때, 드레이크의 입이 먼저 열렸다.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네, 본가의 요리사가 내놓는 음식만큼 만족스럽네요.”
아델라인의 말에, 드레이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요즘 영지 분위기가 말이 아니라, 손님 대접이 미비하면 어쩔까 걱정이 많았었는데.”
그는 포도주로 목을 축인 뒤,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요즘 영지를 꾸려 나가는 건 어떠신지요.”
“뭐, 처음이라 모든 게 어렵지만, 유능한 이들이 곁에 있으니 어찌어찌해 나가는 중입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염려되는 바가 있어 마음이 편치 않군요.”
그러자 아델라인은 드레이크를 응시했다.
“이즐링턴으로 적지 않은 부랑자와 시정잡배가 숨어들었다는 보고를 들어서 말이지요.”
본론. 드레이크가 자신을 부른 본론이 나오자, 아델라인의 손이 잠시 멈칫, 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능숙하게 다시 손을 움직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군요. 우려가 되는 사안이기는 하네요.”
아델라인이 슬쩍, 미끼를 흘렸다. 그러자 드레이크는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급한 사안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의논하고 싶은 사안이 있습니다.”
그때, 알렉스의 입이 열렸다.
“급한 사안이라면.”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드레이크를 향해 말했다.
“우리 지원단이 도울 수 있을 듯하군요.”
알렉스의 말에, 드레이크는 애써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알렉스에게 말했다.
“라이플 여단의 유능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요. 하지만, 이곳은 남부이고 그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더 잘 알고 있으니, 대위의 역할은…….”
“급한 사안이니, 도움을 주는 사람을 가릴 처지가 아니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경?”
알렉스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드레이크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식기를 내려놓은 뒤, 드레이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위의 말이 일견 옳은 것 같네요. 관련 정보를 우선 서신으로 넘겨주시면, 라이플맨들과 함께 방법을 모색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론적인, 그렇기에 피하고 싶었던 답. 드레이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급한 목소리로 아델라인을 향해 말했다.
“아니, 처음 영지를 다스리시는데 부담을 더 얹어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그저, 제 영지의 문제를 처리하는 업무일 뿐인데요. 부담이랄 것도 없습니다.”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으며 드레이크의 말을 끊은 뒤, 알렉스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즐거운 식사였습니다, 드레이크 경. 저는 다음 일정이 있어서 이만.”
아델라인과 알렉스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뒤, 식당에서 나갔다.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드레이크는 식탁을 강하게 내리쳤다.
쾅!!
“…빌어먹을!”
완전히 흐름을 내주고 말았다. 얻은 건 하나도 없었다.
“능구렁이 같은 연놈들…….”
마치 한 편의 단막극을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이 주고받는 흐름에 휘말리고 말았다. 계획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원래라면 적당히 꾀어 도움을 준다는 명분으로 이즐링턴에 사람을 보내, 도망친 자신의 영지민들을 잡아 오는 것이 계획이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필요하다면, 약간의 위협을 할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 오지 않았다.
보란 듯이 진녹색 제복을 입고 온 매닝햄 대위. 그에 대해서는 사촌 누이로부터 적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 왔었다.
라이플 여단의 장교이자, 리안 필즈먼 대장의 피후견인. 황자를 죽여 놓고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은, 후안무치한 반역자. 그리고…….
“천한 것 주제에…….”
감히 주제도 모르고 황좌를 넘보는 사생아.
주제에 필즈먼 대장을 후견인으로 두고 있어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지만, 로피츠 공작가까지 곁에 두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
수를 써야 했다. 필즈먼의 손아귀는 자신을 비롯한 남부 귀족들의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장부와 군적을 채우지 못한 채 4월이 지나고 나면, 그들의 손에 있던 최소한의 무력인 영지군 마저 해산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북부의 평민 자본가와 명예도 모르고 그들과 손을 잡은 북부의 귀족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진다.
“결국, 이 방법밖에 없나…….”
그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옆에서 대기 중인 시종을 향해 말했다.
“가신들을 모두 불러 모아라.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