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함께 기억하게 해 줘요
아델라인의 작위 수여가 이뤄지고 일주일 뒤. 아델라인은 공작령의 저택에 있는 자신의 침실에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하늘색 천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몸이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머릿속에 가득 찬 근심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영주. 자신이 영주가 된단다. 그것도 저 한구석에 박힌 시골 동네가 아니라, 아무런 기반도 없이 귀족들의 횡포를 피해 사람만 잔뜩 몰려든 이즐링턴의 영주. 우선 알렉스의 말대로 안드레이를 내려보냈지만, 대체 어떤 상황일지 두려움이 앞섰다.
“하아.”
아델라인이 근심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걱정 가득한 생각을 떠나 보내던 찰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델라인, 혹시 자나요?”
알렉스의 목소리. 아델라인은 허겁지겁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앞에는 유리병 하나와 육포 한 묶음을 든 채 미소를 지어 보이는 알렉스가 있었다.
“안 자고 있었네요.”
“잠이 별로 안 와서. 그건 뭐예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양손에 든 사과주와 육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뭐, 저도 잠이 안 오는 건 마찬가지라. 가볍게 한잔 어때요?”
그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와요. 근데 그건 어디서 났대.”
“오다가 들렀던 여관에서 사 두고 까먹었지 뭐예요.”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아델라인은 물잔을 찾아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 맞은편에 앉은 알렉스는 사과주를 잔에 따른 뒤, 육포를 올려놓았다.
아델라인은 육포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육포를 입에 물자, 강렬한 짠맛이 그녀의 혀를 강타했다. 연회 같은 데서 제공하던 안주용 고급 육포가 아니라 군용 식량으로 보급되는 육포였다. 당연히 더 짜고, 더 건조했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강력한 짠맛이 아델라인의 혀를 자극하며 입 안의 수분을 가져가자, 그녀는 급하게 사과주가 담긴 잔을 집어 들고 크게 한 모금 머금었다.
달달한 사과주는 빠르게 아델라인의 혀를 달래 주었다. 가벼운 탄산이 그녀의 혀를 톡톡 건드렸지만, 그래도 육포의 자극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하아아…….”
그저 육포와 사과주일 뿐인데 극과 극을 달리는 아델라인의 모습을 보자, 알렉스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녀의 반응이 귀엽기도 하고 새롭기도 했다.
이제는 육포의 짠맛도 사과주의 탄산도 익숙해져 무뎌져 버린 자신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어때요, 사과주는?”
“맛있어요, 맘에 드네요.”
아델라인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사과주를 홀짝였다. 자신의 입을 괴롭혔던 육포를 향해서는 경계의 시선을 보내다가도 슬쩍 집어 조금씩 뜯어먹기를 반복했다.
야금야금 육포를 먹는 모습이 토끼가 당근 갉아 먹는 모습과 비슷해, 알렉스는 팔로 턱을 괸 채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알렉스의 시선을 느낀 건지, 아델라인은 육포를 내려놓으며 그에게 말했다.
“알렉스는 육포 안 먹어요?”
그러자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아델라인의 표정이 안주인데 뭐하러.”
“…….”
“칭찬이에요, 귀여워서.”
아델라인의 얼굴이 달아오르자, 마치 알렉스는 자신의 말을 입증하듯 사과주가 담긴 잔을 홀짝였다. 그래도 입이 심심한 건 어쩔 수 없었는지, 육포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그사이 간신히 얼굴의 열기를 가라앉힌 아델라인은 잔에 사과주를 채우며 중얼거렸다.
“걱정이 많이 되네요.”
그녀는 육포를 아주 조금 떼어 내 입에 넣은 뒤 씹으며 중얼거림을 이어 나갔다.
“던컨 중령님처럼 좋은 영주가 될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누구처럼, 이라는 생각을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요.”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그는 보충 설명을 하듯 말을 이었다.
“굳이 누구를 따라간다는 생각은 없어도 될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던컨 중령님도 그랬거든요. 소년병들에게 글을 가르친다던가, 채찍질로 규율을 잡는 대신 병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인정을 받는다던가.”
알렉스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으며 말을 맺었다.
“솔직히 영주로서 중령님이 어땠는지는, 그리고 그 이전의 연대장이자 영주들이 어떤 분이셨는지는 잘 몰라요. 하지만, 아델라인이라면 그분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거로 생각해요.”
“…고마워요.”
알렉스의 따듯한 말에, 머릿속에 남아 있던 걱정이 한결 누그러진 듯했다. 그렇게 잔은, 달이 차고 기우는 것만큼 느리게 비워졌다.
* * *
다음날 오전, 아침 일찍 저택에서 나와 이즐링턴으로 향한 아델라인과 알렉스, 그리고 라이플맨들은 이즐링턴의 초입에 잠시 멈춰 섰다.
“…여기가 맞나?”
아델라인은 마차에서 내려 길목을 바라봤다. 방치되어 있던 길목이 인부들의 손으로 정비되고 있었다. 그 인부들을 감독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자, 이내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남작님.”
안드레이에게 붙여 보냈던 집사 한 명이 아델라인을 향해 다가와 인사를 했다.
“어… 그래. 오랜만이네. 안드레이는 어디 있어?”
“레이크 집사는 이즐링턴의 서던 퓨질리어 연대 구막사에 있습니다.”
“알겠어. 그나저나 여기서는 뭘 하는 거야?”
아델라인이 묻자, 집사는 인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이주민들에게 일을 시키는 중입니다. 공작령에서 인부를 부를까 했지만, 레이크 집사가 반대하더군요. 최대한 이주민을 활용해야 한다면서.”
“잘하고 있네.”
뒤에서 다가온 알렉스가 맞장구를 쳤다.
“역시 해 본 경험이 있으니 얼타지 않고 바로 그림이 나오는 거지요.”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었나요?”
그 물음에, 알렉스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때는 실패했지만요. 이번에는 말 통하고 문화권도 같으니 훨씬 쉽겠지요.”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무작정 식량을 퍼 주는 것보단, 노동력으로 활용해야 이들을 정착시킬 수 있는 겁니다. 장기적으로도 그게 좋고요.”
알렉스는 인부들을 바라봤다. 귀족들의 횡포에 질려 도망친 이들의 시선에는 아델라인에 대한 우려가 깃들어 있었다.
“터를 잡은 고향을 떠날 만큼 절박한 이들입니다. 저들의 두려움은 기존의 영주뿐만 아니라 귀족 전체에 서려 있겠지요. 이들이 다시 떠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알렉스의 질문. 마치 답을 알고 있는 모습에 되물을 뻔했지만, 이내 아델라인은 입을 다물었나아가다다.
답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질문을 던진 건, 분명 의미가 있어서라는 생각에, 아델라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고민해 볼게요, 저도.”
“좋아요. 자, 그럼 안드레이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러 가 볼까요.”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마차에 올랐다. 포장도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비를 한 덕분인지 마차는 무리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뒤, 창밖으로 생소한 광경이 펼쳐졌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버려진 집 몇 채만이 뒹굴던 길가에는 십 수채의 오두막이 새로 세워져 있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고, 아낙네들은 빨랫줄에 빨랫감을 널고 텃밭을 가꾸며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사람 한 명 없던 이즐링턴의 풍경을 기억하던 아델라인에게는 꽤 생소하고 신기한 모습이었다. 잠시 그 풍경을 눈에 담던 그녀는 문득, 알렉스는 어떤 감정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후방 창문을 바라보자, 뒤따라오는 라이플맨들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을 이끌고 있어야 할 알렉스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일순간 걱정이 들었지만, 마차의 뒤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을 보자 걱정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이상한 조짐이 있었다면 저들이 먼저 눈치를 챘을 것이다. 반대로, 그들이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아델라인도 걱정을 사서 할 필요는 없었다.
잠시 뒤, 아델라인이 탄 마차는 막사 안으로 들어가 멈춰 섰다. 아델라인이 마차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안드레이가 다가왔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일주일간 잘 지냈나요, 안드레이?”
“어떻게든 꾸려 나가는 중입니다. 자세한 보고는 안에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위님께서는?”
안드레이의 물음에, 뒤따라오던 지원단 중 한 명인 스워포드가 그 질문에 답했다.
“중대장님께서는 어디 들르실 곳이 있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좀 걸리실 거라는데.”
스워포드의 말에, 안드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냐? 뭐… 때 되면 돌아오겠지. 영주님께서는 이쪽으로.”
안드레이의 ‘영주님’ 호칭을 듣자, 자꾸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아델라인은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안드레이를 따라갔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어느 정도 갖춰진 사무 공간이 나왔다. 안드레이는 그중 한 묶음의 서류를 건넸다.
“자세한 내용은 서류에 있으니 간략한 개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흡수한 이주민은 대략 600여 명입니다. 기존에 있던 이즐링턴 외곽의 사냥꾼 마을과 합하면 약 1,000명에 달합니다.”
“좋아, 오는 길에 보니까 이주민들을 동원해 도로를 정비하고 있던데. 임금은 어떻게 주고 있어?”
“식량을 일당으로 주고 있습니다.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현금으로 지불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식량으로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식량은 로피츠 공작령의 여분 곡식을 이용해 유상 공여 형태로 전달받아 진행 중입니다. 뒷사정이 어떻게 되었든, 다른 영지이니까요. 나중에 장부 정리할 때도 그편이 더 편할 거고요.”
안드레이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안드레이를 보내라는 알렉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 뒤로도 한참 보고와 의논이 이어졌다. 대부분은 안드레이가 미리 정해 둔 계획을 검토하고 허락하는 일이었지만, 그마저도 수십 분가량 시간이 걸렸다.
안드레이와의 일을 끝내고, 막사 안을 구경하던 아델라인은 막사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양귀비꽃이 비석들 사이사이에서 빽빽하게 꽃을 피워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석 중 한 비석 앞에, 알렉스가 우뚝 서 있었다. 아델라인은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말은 필요 없었다. 아델라인은 그저 생각에 잠긴 알렉스의 손을 잡아 줄 뿐이었다. 갑작스레 손에서 느껴진 온기에 당황하던 알렉스도 잠시 아델라인을 보더니 다시 비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델라인의 온기가 알렉스의 손을 어느 정도 덥힐 때쯤, 알렉스의 입이 열렸다.
“사실, 서던 퓨질리어가 다시 만들어지든 말든 상관없다고 한 건 거짓말이었어요.”
“…….”
“여기에 이렇게 방치되어 잊히는 걸 떠올리면 너무나도 씁쓸해서. 하지만 무언가를 하기에는 시간도 여력도 없어서. 그저 애써 마음속에 묻어 놓으려 노력했어요, 항상.”
알렉스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씁쓸했다.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너무 추워서, 아델라인은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을 느껴서인지,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렉스는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낸 뒤,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미안해요. 한참 전 일인데…….”
말끝을 흐리며 아델라인의 곁을 떠나려던 알렉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채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멈춰 섰다.
아델라인의 손이, 알렉스의 손목을 힘껏 잡고 있었다.
“내가 기억할게요.”
그의 발이 멈춘 걸 확인한 아델라인은 팔을 끌어당기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알렉스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떨어질 듯 위태하게 매달린 눈물이, 햇빛을 받아 시리도록 빛나고 있었다.
그걸 보자 알렉스의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응어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맘 편히 털어놓을 수 없는 감정이, 아델라인의 마음에도 전해져 왔다.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손을 단단히 깍지 껴 잡으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함께 기억하게 해 줘요.”
그 말에, 알렉스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뚝. 뚝. 한 방울씩 떨어졌다. 잠시 뒤, 알렉스의 팔이 아델라인의 몸을 끌어안았다.
소리 없이, 아델라인의 어깨가 젖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