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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138화 (138/200)

138화 자수의 의미

아델라인은 창틀에 기댄 채 마차의 진동에 몸을 맡겼다. 규칙적인 진동은 한껏 긴장한 아델라인의 마음을 약간이나마 누그러뜨려 주었다. 그런데도 지끈거리는 두통이 계속 느껴져, 아델라인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어제의 일이 기억이 났다. 풀턴이 알렉스에게 건넨 봉투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아델라인은 궁금증이 피어올랐지만,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지금 고민해 봤자 나오는 답도 아니니까.

아델라인은 나이아를 바라봤다. 마차에 타는 시간 중 상당수를 책 읽는데 쓰는 그녀마저도 책을 펼칠 생각도 못 하고 그냥 앉아 있을 뿐이었다. 연신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황후와 직접 대립각을 세우게 될 수도, 아니,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나이아의 마음속 한편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사실, 아델라인도 나이아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약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멋대로 사건의 흐름을 비틀기 위해 살린 황후가, 점점 큰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황후가 저지른 일들이 결국 자신이 황후를 살려서, 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고민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차가 멈춰 섰다. 마부가 문을 열어 주자,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렸다.

“몇 시간 남았지?”

“두어 시간 정도 남았어요. 풀턴 경께서 오라고 한 시간까지.”

“적지 않게 남았네. 그러면… 파견 중대 관사나 찾아가 볼까?”

아델라인의 말에, 어두웠던 나이아의 낯빛이 일순간 밝아졌다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헛기침을 한 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앞장서서 관사를 향해 걸어갔다. 뭐가 그리 급한지, 아델라인은 반걸음 뒤에서 나이아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며 그녀를 관찰했다.

바람이 불어왔다. 나이아의 귀에 걸려 있는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잠시 붕 뜨자, 나이아의 입꼬리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입꼬리는 살짝, 아주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걸 보자, 아델라인의 얼굴에도 미소가 꽃피었다. 그녀는 못 본 척 눈을 감고 나이아의 옆으로 가 나란히 걸었다.

나이아의 얼굴에 나타난 미소가 담고 있는 마음을 짐작하게 했지만, 그걸 나이아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미소는 감출 수 없었기에, 아델라인도 따라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다른 주제로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리본에 있던 자수 말이야.”

“네.”

“무슨 뜻인지 알아냈어?”

그러자 나이아는 잊고 있었던 듯 아, 하고 짧은소리를 낸 뒤 그녀에게 곧바로 답을 했다.

“며칠 전에 답장을 받았었는데, 그걸 말씀드리는 걸 잊고 있었네요.”

“그래? 무슨 문장이었는데?”

“이것이 끊어지기 전까지 함께 걷겠다, 라고 직역할 수 있대요. 의역하면 이것이 끊어질 때까지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말이라고 하고요.”

“다행이네, 이상한 말은 아니어서.”

“뭐,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 양식이기도 해서, 신대륙에서는 종종 쓰이는 문자래요.”

어느새 두 사람은 파견 중대 관사 앞에 다다라 있었다. 정문에는 스워포드가 다른 라이플맨과 잡담을 하며 경비를 서고 있었다.

“어? 공녀님께서 관사는 무슨 일이십니까? 나이아도 왔네?”

스워포드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오늘 황궁에 올 일이 있어서요. 알렉스도 함께해야 하는 일정이라, 조금 일찍 왔어요.”

“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중대장님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들어오시지요.”

스워포드의 말에, 아델라인은 나이아와 함께 관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나이아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두 분이서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

평소라면 아무런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아델라인은 미소와 함께 나이아를 몇 초간 관찰했다.

아델라인의 시선을 느낀 나이아는 무언가 찔리는 게 있는지, 귀를 살짝 붉히며 그녀에게 물었다.

“무, 무슨 용건이라도…….”

나이아답지 않게 말을 더듬는 모습까지. 어느 정도 갈피를 잡은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편하게 쉬고 있어.”

아델라인의 말에, 나이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식당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잠시 눈에 담은 아델라인은 미소와 함께 복도를 걸어 알렉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로 걸어가는 동안, 곳곳에서 말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이번 주 훈련 일정은 알고 있지? 각자 새로 지급받은 장비 제대로 챙기고…….”

“도수 박격포를 사격할 때는 탄젠트식 가늠자를 쓰지만, 급할 때는 눈대중으로 거리를 가늠하고 사격하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유념하고, 각자 연습할 수 있도록…….”

그 소리들을 지나,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집무실 앞에 다다랐다.

똑똑.

아델라인이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그의 말에, 아델라인은 천천히 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 무얼 그리 열심히 보는지, 알렉스는 문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서류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일이 많았던 건지, 그의 책상 한쪽에는 두꺼운 서류 뭉치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아델라인은 발소리를 죽이고 알렉스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델라인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도, 알렉스는 여전히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러자 아델라인의 마음에서는 약간의 장난기가 감돌았다.

어떻게 골려 줘야 할까. 어떤 장난을 쳐 볼까. 그런 고민을 하던 찰나,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무슨 장난을 치려고 시간을 그리도 오래 끌어요?”

“힉!”

제풀에 놀란 아델라인이 새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나자, 알렉스는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 본 뒤 그녀를 바라봤다.

“일찍 오셨네요?”

알렉스의 물음이 그녀의 귀에 들려왔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심장이 떨어져 나갈 뻔했던 그녀의 귀에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알, 알고 있었어요?”

“그림자.”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답했다.

“그림자가 지더라고요, 가까이 다가오니까.”

“…….”

“그나저나 일찍 오셨네요? 두 시간 정도 남지 않았나.”

“온 김에 알렉스 얼굴 보려고 했죠. 서로 바쁘니까 틈이 안 나기도 하고.”

“그렇기는 하죠. 차 한잔 드릴까요?”

“…부탁드릴게요.”

아델라인이 알렉스의 제안을 수락하자, 그는 미소와 함께 스토브로 다가갔다. 아델라인은 소파에 앉아 집무실 안을 스윽 둘러봤다. 뭐가 달라졌을까 싶었지만,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때, 아델라인의 코에 싱그럽고 상쾌한 향이 다가왔다.

솔잎차.

아델라인은 지난날들의 기억을 되짚어 봤다. 알렉스를 로피츠 공작령에서 다시 만난 이후로는 솔잎차를 마신 적이 드물었다. 어쩐지 알렉스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아델라인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꽃피웠다.

잠시 뒤, 그녀의 앞에 찻잔이 놓였다.

“여기, 솔잎차에요.”

“고마워요.”

아델라인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에 입김을 두어 번 불고는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달았다. 설탕과 같은 직관적인 단맛은 아니었지만, 혀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아련할 정도로 은은한 단맛이 입 안을 감쌌다.

“되게 오랜만에 마시는 것 같아요. 이거.”

아델라인의 말에, 그녀의 옆에 앉은 알렉스는 고개를 갸웃, 했다.

“솔잎차 가져간 거 아니에요?”

“다 먹은 뒤로는 딱히 더 마실 기회가 없었어요. 손이 가는 것도 아니었고.”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때 가져간 솔잎차도 여기서 먹는 만큼 맛있지는 않더라고요.”

“칭찬인가요?”

“칭찬이에요. 아무튼.”

아델라인은 차를 홀짝이며 그를 바라봤다. 아직 그는 진녹색 제복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생각해 보니 오늘 같은 날은 예복을 입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던 찰나.

“예복은 이따가 갈아입을 거예요. 예복은 뻣뻣하기도 하고 너무 딱 맞아서 영 불편하단 말이죠.”

“…이젠 생각까지 읽는 거예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미소를 싱긋 지어 보였다.

“왠지, 그런 말을 할 것 같아서. 다행히 맞아떨어졌네요.”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그 모습을 보며, 아델라인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차를 홀짝였다.

“그래도 미리 입어 둬요, 다 돼서 허겁지겁 입지 말고. 중요한 날이잖아요?”

“내가 작위 받는 것도 아닌데요, 뭐.”

알렉스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말하자, 아델라인도 피식 웃었다. 사실 뭐가 좋은 건지는 모르겠다. 새삼스레 이즐링턴의 남작이 되었다고 해 봤자 실감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걸 받고서 해야 하는 일만 늘어날 텐데.

“그래도. 함께 해 줄 거죠?”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그녀의 머리를 묶고 있는 리본을 바라봤다. 리본은 멀쩡했다. 그걸 본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알렉스는 대답한 뒤, 고개를 돌려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가 뗐다. 간만의 입맞춤에, 아델라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델라인이 무엇을 하든, 제가 떠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항상 곁에 있어 줄게요.”

그 짤막한 한마디가 뭐가 좋다고. 아델라인의 마음속에 얹어져 있던 짐들이 한결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물론 그가 항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따듯한 한마디만이 아델라인의 귓가에 맴돌았다.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변함없이 차가운 그의 손을 조금이나마 자신의 온기로 덥히며, 아델라인은 그에게 말했다.

“항상 힘이 되어 주어서 고마워요, 알렉스.”

그녀는 마치 알렉스에게서 받은 마음의 온기를 손으로 전해 주려는 듯 그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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