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예상치 못했던 선물
“…이건.”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온 소리에, 두 사람은 벙찐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갑자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슨 상황일까.
서던 퓨질리어 연대가 부활한다는 건 뭐고, 아델라인이 이즐링턴의 남작이 된다는 건 또 무엇인가.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으며 단서를 찾아 기억을 헤집던 아델라인의 머릿속을, 목소리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생일 선물은 따로 준비했으니, 기대해도 좋네.’
“…생일 선물.”
아델라인이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알렉스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뭐라고요?”
“황제와 이야기를 나눌 때, 생일 선물은 따로 준비했다고… 기대해도 좋다고 했었어요.”
아델라인은 길거리에 뿌려진 호외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것일 줄은 몰랐는데.”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그녀를 향해 또 한 번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요?”
그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뭘 할 수는 있는 걸까 싶기도 했다. 고민을 이어 가던 중, 파티션이 살짝 열리며 종업원이 두 사람의 앞에 전채 요리를 놓았다.
두 사람은 마치 말을 잊은 사람들처럼 말 한마디 없이 전채 요리를 먹었다. 전채를 먹은 뒤에는 메인 요리를 먹고, 디저트를 먹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혀에는 그 어떤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간신히 디저트를 마무리하고 차를 홀짝일 즈음에야 두 사람의 정신이 간신히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일단 오늘은 돌아갈까요?”
알렉스의 제안에, 아델라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 연극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방금까지 입에 넣은 음식들의 맛도 기억이 안 나는데, 연극을 본다고 내용이 기억이 날까.
“그래요, 저택으로 가서 상황을 알아봐야겠어요. 같이 가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래도 이렇게 헤어지기에는 아쉬워, 아델라인은 알렉스에게 같이 가길 권했다. 그러자 알렉스도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부탁에 응했다.
“알겠어요.”
두 사람은 계산을 마친 뒤 마차에 올라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직 해가 완전히 저물지 않은 주홍빛 하늘을 바라보며,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향해 물었다.
“이즐링턴의 남작이라… 받아도 되는 걸까요?”
“뭐 받기 싫다고 안 받을 수 있는 건가요. 작위라는 게.”
“그렇겠죠…….”
아델라인은 고민에 빠졌다. 이즐링턴의 남작이라는 작위를 주는 이유가 뭘까. 대체 왜,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나 고민은 고민만 낳을 뿐,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오자, 낯선 마차 한 대가 현관 앞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황실의 인장을 단 마차였다.
“일단 호외가 가짜는 아닌 건 확실하네요.”
“그렇네요. 궁내부에서 온 사안이면.”
알렉스도 아델라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마차를 바라봤다. 그때, 그녀가 알렉스에게 질문했다.
“알렉스. 하나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말해 주세요.”
“…서던 퓨질리어 연대가 다시 창설된다면, 알렉스는 어떻게 하고 싶나요?”
잠시 머뭇거리다 어렵게 질문을 던진 듯한 그녀에,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잠시 바라봤다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민을 이어 가던 그는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한 채 말했다.
“원해서 깬 건 아니지만, 깨진 알껍데기에 미련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물론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찾아가겠지만…….”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눈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지었다.
“그래도, 라이플 여단에 남아 있을 수 있을 때 계속 있어야죠. 그래야 돈을 벌지요. 그리고…….”
당신의 곁에 설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지요. 라는 말이 목구멍 바로 앞까지 솟구쳤지만, 이내 그는 그 말을 삼킨 뒤 다른 말로 간신히 얼버무렸다.
“그래야 변호사 협회 회비도 내죠.”
“변호사 협회 회비는 얼마나 하는데요?”
“연 1파운드요.”
“비싸네.”
“비싸죠. 그래도 언젠간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해서, 계속 넣고 있어요.”
마차가 멈춰 서고 저택의 사용인들이 문을 열자,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집사 중 한 명이 아델라인에게 다가왔다.
“궁내부의 토마스 풀턴 경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중입니다.”
익숙한 이름에, 아델라인은 지난번 마주했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 혹시 제 서재에서 나이아와 함께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집사가 두 사람에게 말을 덧붙였다.
“풀턴 경이 가능하면 대위님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다고 하셨습니다.”
“…나도?”
알렉스가 집사를 향해 묻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알렉스는 곰곰이 고민하더니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고 싶나요?”
그 질문에, 아델라인은 그를 바라봤다. 그의 존재는 자신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알렉스의 손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같이 가 주실 수 있나요?”
그러자 알렉스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차가운 손이었지만, 아델라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강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응접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었다. 가끔씩 쓸모없이 넓고 길다고 생각했던 복도가 순식간에 걸음 뒤편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응접실을 앞두고 있을 때,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손을 놓으며 그를 바라봤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네요.”
아델라인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알렉스의 팔이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갑작스러운 알렉스의 포옹에 당황한 아델라인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이내 그의 품에서 느껴지는 미미한 온기에 몸을 잠시 맡겼다.
“잘 해낼 거예요, 아델라인.”
그는 아델라인의 등을 툭툭 두드려 준 뒤,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응접실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안으로 들어서자, 차를 마시고 있던 풀턴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좋은 저녁입니다, 늦은 시간에 찾아뵙게 되어 실례가 많습니다.”
“아니에요, 외출했을 때 거리에서 호외를 뿌리는 걸 봐서,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옅은 미소를 품고 잇던 풀먼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죄송합니다, 여사. 혹시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호외가 뿌려졌던데요. 제가 이즐링턴의 남작이 된다고, 서던 퓨질리어 연대가 부활한다고.”
그러자 풀턴의 손이 입가로 향했다. 한동안 손을 가져다 대며 입을 가린 뒤 고민을 이어 간 그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요청했다.
“여사, 혹시 자리를 옮겨도 되겠습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들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그 요청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세요, 경.”
풀턴에게 지시를 내린 아델라인은 서재로 향했다. 서재로 들어서자, 책을 읽고 있던 나이아가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인사를 했다.
“일찍 오셨네요, 공녀님. 뒤에 계신 분은……?”
“궁내부에서 오신 풀턴 경.”
“아, 응접실에 계신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나이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자, 풀턴은 그녀를 바라본 뒤 아델라인에게 질문을 했다.
“꽤 어려운 책을 읽고 있군요. 시녀치고는.”
“아카데미 졸업자입니다. 능력은 믿을 만합니다.”
“믿을 만합니까?”
“…제가 가장 믿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러자 풀턴은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들은 바는 있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맞댈 머리가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은 것이겠지요.”
“이야기가 길어질까요?”
“짧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나이아를 바라봤다. 무언의 지시를 받은 그녀는 문으로 향하며 세 사람에게 말했다.
“차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나이아가 서재를 나서자, 아델라인과 알렉스, 그리고 풀턴은 의자에 앉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침묵을 고수하던 알렉스의 입이 열렸다.
“경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습니다. 우선… 윗분께서 무슨 그림을 그리셨는지, 알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알렉스의 말에, 풀턴은 고개를 끄덕인 뒤 침묵에 빠졌다. 그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내보이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는 곤란함이 차 있었기에 두 사람은 구태여 재촉하지 않았다.
잠시 뒤, 나이아가 쟁반에 차와 다과를 담아 가져오고 그의 앞에 찻잔이 놓이자 차를 입에 머금은 그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좋습니다. 원래 계획은 이러했습니다.”
그는 알렉스와 아델라인, 그리고 나이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현재 이즐링턴은 황실 직할령이나 상주하고 있는 관료는 한 명도 없는 무주공산인 상태입니다. 이 정도는 알고 계시겠지요.”
“공작가에서 최소한의 행정을 지원하고 있지만, 주민은 매우 적은 상태라고 알고 있어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전쟁으로 귀족가가 부담해야 하는 ‘도의적인 부담’이 늘자, 남부의 귀족들은 그 부담을 평민들에게 전가했습니다.”
풀턴은 한숨을 쉰 뒤, 몇 가지 예시를 들어 보였다.
“영지민들에게 소작료를 인상하고 물레방아와 우물들에 사용료를 부여하는 간접세를 늘리고, 어떤 곳에서는 군적의 미비를 메꾸기 위해 강제 징병까지 이뤄지고 있다는 게 보고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즐링턴으로 영지민들이 몸을 피하는 상황입니까?”
알렉스의 물음에, 풀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여사의 생일 전후로 작위를 하사할 계획이셨으나, 이러한 이유로 인해 보류되었던 상황입니다.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유관 부처 간의 비공개회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지금 이즐링턴은 어떤 상황입니까.”
“공작께서 미리 남부의 가문들에게 언질해 두어 상황은 평행선을 달리는 중입니다. 그러나 언제 상황이 급변할지 모릅니다. 귀족 가문들이 이즐링턴으로 사람을 보내 영지민들을 잡아갈 수도 있지요.”
“제국민들의 통행권 및 이주권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보장된 권리 중 하나에요. 황실 직할령에 일개 귀족의 수하가 사람들을 잡아 오는 일이 문제가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르진 않을 텐데요.”
나이아의 물음에, 풀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전시 사령관 직위의 필즈먼 대장이 남부 영지들을 대상으로 감사를 진행하는 중이고, 몇몇 영지는 4월 말까지 모든 것을 정상화하라는 최후통첩을 받은 상태이기도 합니다.”
“…뒤가 없는 상황이군요.”
아델라인이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풀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야 빌릴 수 있지만, 사람은 쉽게 구해 올 수 없으니.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는.”
“황실과 척을 져서라도 사람을 채워야겠다는 심산인가요? 귀족 사회에서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을?”
아델라인의 질문에, 알렉스가 턱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어쩌면…….”
그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간결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황후가 뒤를 봐주고 있다는 보장이 있다면, 무모한 수는 아니지. 맞습니까, 경?”
알렉스의 눈빛이, 풀턴에게 향했다. 이 상황에서는 긍정이나 다름없는 침묵을 흘려보낸 그는 알렉스와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 작위를 하사하실 예정이고, 이와 함께 이와 관련한 지시도 내려질 것입니다. 대위께서도 동행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풀턴은 알렉스에게 이름 없는 봉투를 내밀었다. 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인장만이 입구를 봉하고 있는 봉투를 전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알렉스에게 말했다.
“그분께서 준비하신 조그만 선물입니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