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이즐링턴의 남작
로켓탄의 당황도 불꽃놀이의 여운도 가라앉아 가던 4월의 중순. 아델라인은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들을 읽고 있었다. 대부분이 로피츠 공작가에 관한 책이었다. 책의 수 만큼이나 공작가에 대해서 다루는 어조도 다양했다.
하지만 그 모든 책에서 빠지지 않는 단 한 가지 문장이 있다면.
“아데른, 로트겐, 레마겐, 그리고 로더럼의 공작이며 디크렌, 세덤, 노번의 후작이며 니더레지엔, 슐레비히의 변경백이며…….”
수많은 지역명으로 이어지는 작위들의 향연. 물론 책에 따라서 공작가를 찬양하는 수단으로서도, 공작가를 비판하는 수단으로서도 사용되었지만, 이것이 보여 주는 공통된 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구대륙의 귀족 사회에서 로피츠 공작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미 수십 번은 읽은 작위들을 훑던 아델라인은 낯선 지명을 보고는 고개를 들어 나이아에게 질문했다.
“그나저나 로더럼은 어디야?”
“저번에 가셨잖아요, 로더럼. 제국 내에 있는 가장 큰 영지가 로더럼이에요. 그래서 로피츠 공작령이라고 불리는 거고요.”
나이아의 말에, 아델라인은 새로운 지식을 머릿속에 넣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왜 다들 로더럼이라고 안 부르고 로피츠 공작령이라고 하는 거야?”
“그거야 뭐, 사람들 입에 좀 더 맞았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공작령이 조금 더 권위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요.”
나이아는 그렇게 말하며 서류를 팔락팔락 넘겼다. 아델라인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새삼스럽게 고마움을 느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게 다져 제가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만들어 와 준 그녀의 역할은 대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아델라인은 더욱더 그녀에게 고마움을, 그리고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월급 올려 줄까?”
“연말에 올려 주셨잖아요.”
“하는 일이 다른 시녀들보다 훨씬 많잖아. 더 받고 싶지는 않아?”
그러자 나이아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굳이 다른 시녀들과 차이를 만들고 싶지 않기도 하고… 그리고 저는 이미 큰 도움을 받았는걸요. 오라버니 관련해서.”
그녀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을 끝맺었다.
“그러니까, 지금만큼만 해 주셔도 충분해요.”
“그러기엔 너무 미안한데…….”
아델라인이 말을 흐리며 그녀의 눈을 응시했지만, 나이아는 곧바로 서류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단호한 모습에, 아델라인은 미안한 마음을 가슴 한편에 품으며 계속 책을 읽어 내렸다.
공작가의 외동딸이 공작가에 대한 책을 읽는다는,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이상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아델라인에게도 명분은 있었다.
로피츠 공작가에 대한 다른 이들의 시선을 알아본다는 명분. 그 명분은 꽤나 훌륭해서 바로 옆에 있는 나이아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던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델라인이 들어오라 지시하자, 시녀가 들어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매닝햄 대위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지난번에 잡아 놓았던 데이트 약속을 떠올렸다. 약속은 4시였을 텐데, 벌써 4시인가 싶어 시계를 바라보자, 4시와 3시의 딱 중간을 지나고 있는 시침을 볼 수 있었다.
30분밖에 안 남았던 건가. 아델라인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녀에게 지시했다.
“잠시 기다려달라고 전해 줄래?”
“네, 알겠습니다.”
아델라인은 침실로 향했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문제는 없었지만, 그녀는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그다음, 그녀는 보석함에 손을 뻗었다.
“역시, 잘 어울리네.”
알렉스가 선물한 목걸이와 브로치를 착용한 아델라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만족감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손가방을 챙긴 그녀는 안에 넣어 둔 리볼버의 약실에 재어 넣어진 탄약의 상태를 살폈다.
아직 습기를 덜 먹어 한 덩어리로 굳지는 않았지만, 재어 놓은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늦기 전에 약실의 탄약을 소모해야겠다 생각한 아델라인은 부싯돌의 상태를 확인한 뒤 손가방을 들고 응접실로 향했다.
진녹색 제복을 입고 있는 그를 보자, 아델라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도 아델라인을 본 건지,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많이 기다렸나요?”
“괜찮아요, 제가 너무 일찍 오기도 했고.”
알렉스가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자, 아델라인이 그에게 물었다.
“일하다 온 거예요? 간만에 제복 차림으로 보네요.”
“외근 나갔다가 바로 왔어요. 관사에 들러서 옷 갈아입고 오면 늦을 것 같아서.”
“잘했어요. 자, 그럼 바로 나갈까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나섰다.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오르자, 마차는 저택을 나섰다.
“오늘은 무슨 일로 외근을 나간 거예요?”
“장비 인수 절차 때문에, 교외에 있는 수도 사단 본부에 가야 했었어요. 새로 장비를 받을 게 많아서.”
“장비를 새로 받는다고요?”
“편제도 바꾸고 장비도 바꿔야죠. 화력을 늘리는 방향으로.”
그는 무심코 파견 중대를 떠나 버린 대원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얼굴을 스쳐 보낸 그는 슬픈 눈빛을 감추기 위해 애써 더 크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사람이 줄었으니, 그만큼 더 보충해야 하니까요.”
알렉스는 웃고 있었지만, 애써 웃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는 아델라인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알렉스의 차가운 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포개어 잡으며 말했다.
“…애써 웃을 필요는 없어요. 알렉스가 저번에 말했잖아요. 편한 사람 앞에서는 무표정이 나올 때도 있다고.”
그녀는 알렉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항상 웃고 있지 않아도, 저는 알렉스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
“그러니까, 제가 옆에 있을 때는 웃음을 꾸며 낼 필요는 없어요.”
그 말에, 알렉스는 머금고 미소를 천천히 거뒀다. 그런 다음, 자신의 어깨에 얹어진 그녀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
“사실.”
그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와는 다른, 깊은 고민을 품은 무거운 목소리였다.
“파견 중대 인원 100명이 88명으로 줄어든 상황이라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사람이 줄어든 만큼 화력을 높인다고 해도, 생각대로 될지도 모르겠고.”
그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여단 본부에서는 아직 대기하라는 명령만 내리고 있는 데다가, 전쟁은 점점 길어지고 있는 중이고요. 차라리 전장에 나가면…….”
“그런 말 하지 마요.”
아델라인이 단호하게 알렉스의 말을 끊었다.
“그런 말, 절대 하지 마요.”
알렉스가 전장에 나간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소식이 닿지 않아 마음을 졸였던 나날을 기억하면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그걸 다시 반복하기는 싫었다.
마부석 창문에 옅게 비친 아델라인의 얼굴을 본 알렉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자신이 무심코 한 말이, 아델라인의 상처를 건드렸다는 걸 깨달은 알렉스는 자신의 손을 온기로 덥히고 있는 그녀의 손을 꼭 맞잡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아델라인. 정말로.”
그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맞잡은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만으로도 두 사람의 마음을 달래는 데 충분했다. 며칠간, 같이 있지 못했던 시간을 보상받는 듯한 기분을 느꼈기에, 그 누구도 먼저 손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마차가 멈춰 섰다. 오늘 보기로 했던 연극을 보기 전, 저녁을 먹기 위해 알아본 식당이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놓고 마차의 문을 연 뒤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아델라인이 내리자, 알렉스는 살짝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어 식당 안으로 향했다.
“예약했던 알렉스 매닝햄이네.”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종업원의 안내를 따라가자, 거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2층의 창가 자리를 안내받았다. 종업원이 두 사람이 앉은 자리 주위로 파티션을 치는 동안 두 사람은 자리에 앉은 뒤, 전채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무엇으로 대화를 시작할까, 고민하던 아델라인의 귀에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연극도 레밍턴 극장인가요?”
“다른 곳에서는 주로 비극을 다루니까요. 우리는 비극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참 일리 있네요. 원래 다 죽는 결말은 싫어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더더욱 싫어진 것 같아요.”
그 말과 함께 웃음을 터뜨린 알렉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 뒤에는 무슨 결말이 찾아오는 걸까요?”
원작의 내용에 대해 묻는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1,000개의 댓글 중에는 작가를 기다리다 지쳐 결말을 직접 짜서 내놓은 독자들의 댓글도 있었다.
대부분은 피오나와 황태자의 해피엔딩이었다. 그들을 가로막고 견제하던 모든 장벽을 때려 부수고 황제와 황후로서 무한한 권력과 천수를 누리고 가는 엔딩은 가장 많은 추천 수를 받았었다.
“뭐…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그러하듯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게 아닐까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달갑지는 않네요.”
“그러게요. 그래도 많이 바꿔 왔으니까, 꼭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결정적으로 우리는 황후를 살렸잖아요?”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황후가 우리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 적은 없었지만요. 솔직히 후회되기도 하고.”
“그러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무시하고 일주일 푹 쉬는 건데.”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도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종이를 뿌리고 있었다.
“호외요, 호외!”
전쟁 중이니 일주일에 서너 번은 있는 일이었다. 사소한 승리마저 호외로 퍼뜨리며 여론을 이끄는 건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에 익숙해져 있을 사람들은 평소와 달리 소년들의 손에 뿌려진 종이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호기심을 담은 채 창밖으로 향했다. 대체 무슨 소식이길래 저렇게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호외지를 볼까. 그런 의문을 품던 찰나, 소년들의 입에서 의문에 대한 답이 나왔다.
“서던 퓨질리어 연대가 부활한답니다! 로피츠 여사가 이즐링턴의 남작 작위를 수여 받게 되었습니다! 호외요 호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