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맘대로 되는 일이 없어요, 진짜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은 상황에, 아델라인은 바위 너머를 바라봤다. 주변에는 온통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있었고, 그들이 앉아 있던 벤치는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
두 동강 난 벤치를 보자, 아델라인의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알렉스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쪼개지는 건 벤치가 아니라 자신의 머리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간신히 알렉스의 팔을 잡아 버틴 뒤 그를 바라봤다. 그는 면목이 없다는 듯, 아델라인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린 알렉스는 급하게 반으로 갈라진 벤치로 향했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 그는 벤치 아래에서 흙에 파묻힌 무언가를 꺼내고는 상태를 살폈다. 뭔진 몰라도 영 상태가 안 좋은 건지…….
“하아아… 이걸… 진짜…….”
한참을 쪼그려 앉고 머리를 쥐어뜯는 알렉스의 모습은 안쓰럽기도 했고, 어째서인지 귀엽기도 했다. 조금 더 지켜보자, 그도 시선을 느낀 건지 터덜터덜 아델라인을 향해 걸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상자의 귀퉁이들은 찌그러져 있었고, 상자를 감싼 리본은 흙먼지가 묻어 본래 가지고 있던 색을 잃은 상태였다. 과장을 조금 더해, 누가 보면 쓰레기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
아델라인 앞에 서서 잠시 앓는 소리를 낸 그는 그녀를 향해 말없이 상자를 내밀었다.
부끄럽고, 면목 없다는 듯 흙먼지 묻은 얼굴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은 그를 보자, 아델라인의 머릿속에 있던 잡다한 생각들이 씻겨 내려갔다.
알렉스가 황제의 아들이라느니, 황태자가 황제의 혈육이 아닐 수도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몸을 던지는 알렉스는 변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다시 본 것만으로도, 자신의 생일 선물로는 충분했다. 알렉스가 자신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몸을 던질 것이라는 믿음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나 옵션 증서 같은 것은, 그에 비하면 한없이 사소하기 그지없었다.
알렉스가 건넨 선물 상자를 받아 든 아델라인은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까치발을 들고 그를 끌어안았다. 따스한 그의 품이 아델라인의 마음을 녹이다 못해 훈훈하게 데워 줬다.
“고마워요.”
짤막한 감상을 그의 귀에 속삭이자, 알렉스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그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인 뒤, 고개를 들고 눈을 감은 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잠시 후, 아델라인의 입에서는 흙먼지의 텁텁함마저 묻어 버릴 정도의 달콤함이 느껴졌다.
그들은 벤치 근처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었다. 주변에서는 붉은 옷을 입은 포병대 병사들이 라이플맨들과 함께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양동이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옷에 먼지가 묻는 것도 모르고 알렉스가 건넨 선물을 소중히 끌어안은 아델라인은 알렉스에게 물었다.
“왜 물 양동이를 저렇게 들고 다니는 거예요?”
그 말에, 알렉스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불발 난 로켓이라도 안전하지는 않으니까요. 회수하기 전에 물을 뿌려서 혹시 남아 있을 불씨를 끄고 화약을 젖게 만드는 거죠.”
그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홱 돌려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러면 알렉스가 조금 전 벤치로 갔던 건?
“그럼 방금은…….”
“뭐, 안 터졌으면 장땡 아닐까요.”
알렉스가 밝게 미소를 지어 보이자, 아델라인은 순간 욱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퍽.
아델라인의 주먹이 알렉스의 옆구리에 꽂히자, 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아델라인은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숙인 그를 향해 질책했다.
“미쳤어요? 그러면 좀 기다렸다가 가면 될 것이지 왜 그렇게 아무런 대책도 없이 움직인 거예요?! 다치면 어쩌려고!”
“안 터졌으면 된 거 아닐까요…….”
알렉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항변했지만, 아델라인의 사나운 눈빛을 받자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해 있는 알렉스를 보자, 아델라인도 계속 그를 쏘아볼 수는 없었다.
“알렉스 몸 먼저 챙겨요, 그게 최고의 선물이에요.”
“알겠어요.”
알렉스의 답을 받은 아델라인은 그를 향해 싱긋 미소를 보인 뒤 선물로 시선을 옮겼다. 상자를 열자, 보석함이 그녀를 맞았다.
“비싼 거 필요 없는데…….”
“제가 받은 것도 많잖아요, 이 정도는 무리도 아니에요. 열어 봐요.”
그의 권유에, 아델라인은 보석함을 상자에서 꺼내 열어 봤다. 그러자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브로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보석함 안에 있는 보증서를 보자, 저번에 상점가 나들이를 갔을 때 둘러봤던 공방의 브로치임을 알 수 있었다.
“…다 준비했던 거예요?”
알렉스는 멋쩍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보석함을 닫은 뒤 팔을 뻗어 알렉스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고마워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때, 벤치 근처에 떨어진 불발탄을 처리한 대원들이 무언가를 들고 알렉스에게 다가왔다.
“여기, 이건 멀쩡하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에게 바구니를 넘긴 대원들은 알렉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자리를 비켜 줬다. 알렉스가 바구니를 열자, 다행히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샴페인 병과 반합이 보였다.
“뭐에요?”
아델라인이 슬쩍 고개를 돌려 바구니 안을 보려 하자, 알렉스는 샴페인 병과 반합, 그리고 양철 컵을 꺼내 들었다.
“그냥, 불꽃놀이 하면서 먹으려고 했던 것들이에요. 뭐… 불꽃놀이는 이제 그른 것 같지만.”
알렉스는 반합을 열고 와인 오프너를 손에 들며 그녀에게 말했다.
“가볍게 한잔, 할까요?”
“좋아요, 샴페인은 제가 따 봐도 되나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오프너와 샴페인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서툰 손길로 간신히 오프너를 코르크 마개에 박아 넣고 마개를 뽑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잠시 뒤, 아델라인이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을 주자 마개가 맑은 소리를 내며 빠졌다. 그리고 뒤이어…….
“어, 어? 어?!”
로켓탄의 충격으로 한 번 크게 흔들렸던 샴페인 병의 주둥이에서 거품이 솟구쳤다. 당황한 아델라인은 주변을 둘러보며 안절부절 어떻게 해야 할지 헤맸고, 알렉스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만 말고 도와줘요!”
“아, 알겠어요.”
살짝 울먹이는 듯한 아델라인의 요구에 응해 알렉스가 손수건을 꺼냈을 때쯤에는 이미 솟구치던 거품도 기세를 잃은 상태였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에게서 샴페인 병을 거둔 뒤, 그녀의 손을 닦아 줬다. 그런 다음, 잔에 샴페인을 따라 아델라인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많이 놀랐어요?”
“샴페인이 흔들렸을 거라는 걸 생각하지 못한 제 잘못이네요…….”
“귀여웠어요, 그 모습.”
알렉스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내보이자, 아델라인은 살짝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는 샴페인을 홀짝였다. 붉어진 얼굴을 잔으로 가리기 위해 마시는 둥 마는 둥 잔을 얼굴로 가져갔지만, 정작 덩달아 붉어진 귀는 감출 수 없었다.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따라 천천히 샴페인을 홀짝이고 안주를 집어 먹었다. 크래커와 치즈, 햄으로 만든 간단한 간식이었지만, 이 순간을 즐기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게 잔이 한 번 비워지고 다시 채워질 때 즈음, 아델라인이 저 멀리 들판을 바라보며 알렉스에게 말했다.
“오늘, 사실 황궁에 갔었어요.”
그녀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싼 뒤, 그 잔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황제 폐하와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이야기가 길기는 한데… 저번에 황후의 이야기를 엿들었다고 알려 준 날, 황제 폐하와 아버님의 대화도 들어 버렸거든요.”
그러자 알렉스는 아델라인이 식당에서 했던 질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황제의 혈육이라도 되는 건가요?”
심각함과 거리가 먼 알렉스의 목소리에, 아델라인은 살짝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래요. 어쩌면 유일한 친아들.”
그 말을 들은 알렉스는 잔을 입으로 가져가 홀짝였다.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저 멀리 앞을 바라본 그는 잔을 입에서 뗀 뒤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평민의 삶은 귀족의 삶보다 투박하고 거칠겠죠. 하지만 결혼한 대원들이 그런 질문을 받고도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한 건, 질문이 멍청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닐 거예요.”
식당에서 나눴던 대원들의 대답을 한 번 더 입에 담은 그는, 저 멀리 수풀 뒤에 숨어 자신들을 바라보는 대원들을 마주 봤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기에, 그는 다시 앞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 누리고 있는 사랑의 결실이나 노력의 결실들이, 세련된 귀족의 삶보다 훨씬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겠죠. 마치 지금의 저처럼.”
그러자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돌아봤다. 황실의 일원이 되는 것보다 자신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좋다는 말에, 그녀는 놀람과 함께 약간의 기쁨을 같이 느꼈다. 그러자 알렉스는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질문을 하나 던졌다.
“혹시, 아쉽나요?”
그러자 아델라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원하지 않았다. 알렉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아델라인 자신이 함께하고 싶은 알렉스의 모습이었다.
아델라인이 알렉스의 손을 잡으며, 온기와 함께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전 지금의 알렉스가 좋아요.”
그녀는 담담히 자신의 마음을 풀어 나갔다.
“화려한 제복을 입고 친위대를 거느리는 알렉스보다는, 투박한 진녹색 제복을 입고 대원들과 힘을 합치는 알렉스가 더 멋있어요.”
그러자 알렉스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으며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사실, 황태자랑 형제 관계가 된다고 생각하니 끔찍해서. 그래서 황실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기도 해요.”
“황태자보다 나이가 많으니 형 대접 받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오, 그건 좀 솔깃하네.”
엉뚱한 부분에서 유혹을 느끼는 듯한 알렉스의 반응에, 아델라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사소한 즐거움이, 어쩌면 자신이 알렉스를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또다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하늘로 로켓들이 솟구쳤다. 그러자 두 사람의 몸에 힘이 들어가며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의 긴장이 무색하게, 하늘로 치솟은 로켓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터지며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조금 전의 주황색 일색의 폭발이 아니라, 오색찬란한 불꽃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새카만 밤하늘을 장식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더 좋지 않을까요?”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하늘을 울리는 폭음이 두 사람의 귀를 먹먹하게 했지만, 두 사람의 감정은 맞잡은 손을 통해 온기와 함께 전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맞잡은 손은 풀리지 않았다.
* * *
“그나저나.”
불꽃놀이마저 끝나고 고요해진 시간, 아델라인은 마지막 남은 샴페인 몇 모금을 홀짝이며 알렉스에게 궁금증을 표했다.
“황제 폐하께서 제게 선물을 주신다는데. 뭘까요?”
그 물음에, 알렉스는 잔을 비운 뒤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겠네요. 영지라도 주려나?”
취기가 살짝 감돈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