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그런 소문이 있었지
그린우드의 가벼운 물음에, 무의식적으로 책장을 넘기던 아델라인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마치 정곡을 찔린 듯한 그녀의 반응에, 질문한 그린우드 또한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그린우드는 생각을 정리했다. 사과를 해야 하나? 질문을 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던 중, 아델라인의 입이 먼저 열렸다.
“혹시 지금 시간 되시나요?”
그녀의 물음에, 그린우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기에는 민감한 내용일 듯한 예감에, 그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어 둔 뒤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따라오게, 적당히 조용한 곳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아델라인은 순순히 그린우드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멎은 곳은 복도 끝의 발코니였다. 비공식 흡연장으로 쓰이는 듯, 발코니 가운데에는 양철로 만든 깡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발코니에 발을 디디자마자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린우드는 뒤따라온 아델라인을 의식한 뒤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그러나 허전한 건 참지 못하겠는지, 그는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파이프와 성냥을 꺼냈다.
“미안하네, 요즘 담배가 늘어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편하신 대로.”
아델라인의 말에 한결 부담을 덜었는지, 그는 성냥을 긋고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두어 모금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내뱉기를 반복한 그는 파이프를 입에서 뗀 뒤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무엇을 묻고 싶은가?”
그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그린우드를 바라보며 질문에 답했다.
“로피츠 공작 부인. 그러니까… 제 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런가…….”
그린우드는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담뱃대를 물었다. 무언가를 아는 듯, 그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흘려보냈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고뇌를 반복하고 또 반복한 끝에, 그는 담뱃대를 입에서 떼어 내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그저 내가 그때 들었던 이야기이네. 벌써 20년 넘게 지난 이야기이니 정확도도 떨어지고 왜곡된 부분도 많을 테니 무시해도 좋고.”
그는 아델라인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다짐을 받듯 말했다.
“마지막으로, 공작에게 꼭 같은 질문을 하겠다고 약속하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공작의 이야기도 듣겠다고.”
“알겠습니다.”
아델라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린우드의 당부에 답하자, 그는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눈을 감고 천천히 담배 연기를 흘려보냈다.
“사실,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내가 아는 건 그리 많지 않네. 그때 나는 석사 과정을 위해 수업 듣고 공부하던 학생이었으니.”
그는 발코니 한편의 벤치에 앉아 말을 이어 나갔다.
“자네가 태어나기 1년 전 즈음 공작이 선대 공작으로부터 가주 직위를 계승 받고, 뒤이어 잔여 임기가 남아 있던 의원직도 승계했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 정도는 자네가 읽던 책에도 나와 있을 것이고.”
그린우드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 나와 있던 내용과 같은 내용이었다.
“사실 전례가 없던 것이 아니었네. 실제로 의회 수립 초기에는 전 황제를 지지하는 잔당들이 현역 의원들을 향해 암살 공작을 시도했었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의회가 기능을 상실하는 걸 막기 위해 필요시 잔여 임기를 가문의 후계자가 승계하는 법이 통과되었고, 그 법으로 몇몇 의원들의 승계가 이뤄졌으니까.”
그는 씁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 식으로 의원직을 승계한 이들은 인성이나 행적에서 트집 잡히며 상대 당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런 공격에 대신 맞서 싸워 줄 아군도 있었지. 하지만 공작은 달랐다네.”
담배 연기를 내뱉은 그는 씁쓸하단 표정을 지으며 먼 하늘을 바라봤다.
“그때도 로피츠 공작가는 중립을 취하며 의정 활동을 해 왔네. 그 상황에서 입헌군주제의 초반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크게 기여했지.”
“전대 공작께서도 의장을 맡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그러나 반대로 적들도 많았어. 업적이 컸기에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전대 공작이 건강상의 이유로 가주직과 의원직을 현 공작에게 넘기고 칩거하자 일제히 그 적들이 들고일어난 거지.”
그는 이제 확실히 기억난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그때 걸고넘어졌던 것 중 하나가 자네 모친이네. 꽤 더러웠지.”
“불륜설이었나요.”
“…….”
아델라인의 물음에, 그린우드는 담뱃대를 물고 천천히 연기를 들이마셨다. 잠시 뒤, 그린우드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방에 이런 격언이 있더군. 사람 셋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고……. 지금 생각해 보니 딱 그 꼴이었던 것 같네.”
그는 담배 연기와 함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공작 부인이 결혼하기 전에는 사교계의 인기인이었네. 활발하고 친화적이었지.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고, 당연히 열애설이 종종 발생했지. 하지만 그런 사실이 증거 하나 없는 불륜을 단정 짓고 온갖 비난을 쏟아 낸 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생각하네.”
“그렇군요…….”
“그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알고 있네, 특히 공작 부인은. 자네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타계한 것도 그 영향이 적지 않았겠지.”
“정보가 없었던 건…….”
“광기의 시간은 금세 사그라들었네. 공작 부인의 타계 이후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점점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것이네. 물론 당사자인 공작도 이 일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지.”
그린우드는 한숨을 푹 쉬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사람들은 종종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기억을 무의식 너머로 밀어 버린다네. 그렇게 함으로써 고통을 잊으려 하는 거지. 내 추측이지만, 공작도 그러했을 것으로 생각하네.”
아델라인의 안색을 살핀 그린우드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듯 담배를 뻐끔뻐끔 피운 뒤, 그녀에게 말했다.
“자,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전부이네. 나와 한 약속은 기억하고 있겠지?”
그린우드의 말에, 아델라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별로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네.”
그는 담뱃대를 탁탁 털고서 발코니를 나서며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먼저 가 보겠네, 바람 좀 쐬다가 들어오게.”
그린우드가 떠나자, 그제야 아델라인은 벤치에 앉았다. 어렵지 않은 이야기였다. 새로 로피츠 공작가의 가주이자 의원이 된 젊은 날의 공작을 향한 공격이었다. 삼류 황색언론의 기사로 공작 부인의 불륜설이 보도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델라인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만약 그것이 거짓이라면, 공작이 자신에게 한 말은 무엇인가.
“…뭘까, 진짜.”
대체 뭐가 진실인 걸까.
* * *
“역시 200미터 선에서는 카빈 정확도가 떨어지긴 하네.”
늦은 오후, 알렉스는 대원들이 가지고 온 표적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200미터 표적지에서는 탄흔이 오밀조밀 뭉쳐 있는 게 아니라 넓게 퍼져 있었다.
만족스럽지는 않은 결과. 하지만 알렉스는 표적지를 옆으로 치워 둔 뒤 보고를 위해 온 노먼을 향해 질문했다.
“어땠습니까? 직접 쏴 보셨을 때.”
“저는 직접 쏴 보지 않았고 쏴 본 대원들을 지켜본 결과, 장전 속도는 훨씬 빠릅니다. 100미터 선에서는 라이플이나 머스킷과 정확도 면에서 별반 차이가 없었고. 다만 생각보다 카빈이 라이플에 비해 짧거나 가벼운 건 아닙니다.”
“우리 평균 교전 거리가 얼마 정도 되지요?”
“편차가 심해서 유의미한 값을 내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2소대장의 분석에 따르면 교외 지역에서 벌어진 작전을 제외하면 대부분 150미터 내에서 교전이 진행되었습니다.”
“뭐… 그렇긴 하지요.”
알렉스는 다시 한번 2소대장이 제출한 보고서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시가전에서 벌어진 교전 양상은 근접전으로 시작하거나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카빈을 들여오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 같았다.
머스킷보다 훨씬 가볍고! 짧아서 다루기도 편하고! 장전 시간도 짧아!
“그래도 카빈에 머스킷 총검 착검 기능이라. 이걸 상부에서 받아 줄까요?”
“그게 걱정입니다. 이것 때문에 반려당할 수도 있어요.”
“반려 안 당해도 힘든 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노먼은 허허 웃으며 알렉스를 향해 미소 지었다.
“제가 보기에는 규격 외 장비 취급받아서 서류 업무가 늘어날 것 같습니다만.”
그 말에, 알렉스는 그걸 생각 못 했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아…….”
“뭐… 머스킷 운용 인원에게 카빈을 쥐여 주는 것은 문제가 없을 거로 생각합니다. 훨씬 부담이 경감될 테지요. 하지만 라이플 운용 인원에게까지 카빈을 지급하는 건 개인적으로 반대입니다.”
노먼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먼의 말을 종이에 메모했다. 잠시 그를 바라본 노먼은 알렉스를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계획은 어떻게 되어 가고 계십니까?”
노먼의 물음에, 알렉스는 서류들 사이에 숨겨 둔 체크 리스트를 꺼내 들었다. 그걸 노먼에게 건네며, 알렉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서프라이즈에 필요한 준비는 다 끝났어요. 내일 스워포드와 함께 공방에 가서 선물만 사면 됩니다.”
“…이게 끝입니까?”
노먼의 물음에, 알렉스는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벤트 전까지, 한낮에는 뭘 하실 계획입니까?”
“평소처럼… 밥 먹고 극장 가고 차 마시고?”
알렉스의 답에, 노먼은 한숨을 쉬었다. 대체 어디까지 떠먹여 줘야 하는 건지… 라는 눈빛을 보낸 그는 알렉스를 향해 한마디 던졌다.
“내일 외출한 김에 윌포드 대위와 만나서 이야기 한번 나눠 보시지요, 도움이 될 겁니다.”
“윌포드 대위? 수도에 있어요?”
“스워포드한테 못 들으셨습니까? 해군성에서 근무 중이라는군요. 가서 안부도 물을 겸, 조언도 구하고.”
노먼의 강력한 어조에, 알렉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의 의사를 확인한 후, 노먼이 집무실을 나섰다. 노먼의 뒷모습을 보며, 알렉스는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왜 이리 준비하는 게 힘드냐…….”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뱉은 그였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아델라인의 기뻐하는 표정을 떠올리자 방금까지 쌓여 있던 피로가 싹 가시는 듯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기지개를 켠 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붙이고 앉으며 자신을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고작 5일 남았다. 조금만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