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130화 (130/200)

130화 사공이 많아져도 괜찮을지도?

3월의 마지막 날, 파견 중대는 평소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족이 있는 대원들은 아침 일찍 송금환으로 급여를 받은 뒤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미리 써 둔 편지와 마련해 둔 선물을 챙겨 든 대원들은 외출 허락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알렉스의 집무실을 찾았다.

팩도 마찬가지. 그는 한 손에 종이 상자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종이를 건네며 알렉스에게 보고했다.

“출타 전 허가 받으러 왔습니다.”

“그래, 누구누구랑 같이 가냐.”

“여기 명단입니다. 나간 김에 제3 수도경비대에도 들러서 카빈 시험 운용 데이터 뽑아 볼 계획입니다. 노먼 중위님께서 인솔하십니다.”

알렉스는 그가 건넨 명단을 주욱 살펴봤다. 다들 가족이 있는 대원들이었다. 하루빨리 가족들을 위해 월급을 보내고 싶어 하는 대원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알렉스는 명단 아래에 간단한 서명을 써넣으며 질문했다.

“점심시간까지 돌아올 수 있나?”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월말이기도 하고, 카빈도 한두 발 쏴 보는 게 아니니… 점심은 밖에서 먹고 들어올 듯합니다.”

팩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3시까지는 와. 점심은 남은 애들끼리 해 먹지 뭐. 가 봐.”

그의 말에, 팩은 손을 들어 경례했다.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그가 나가자, 알렉스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라이플을 들지 않는 라이플맨이라. 생각할수록 뭔가 어색했다. 라이플도 머스킷에 비하면 짧고 가벼운 편인데, 이것도 더 가벼운 카빈으로 바꿔 들고 싶은 걸까.

생각을 이어 가던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카빈으로 바꾸고 싶다는 대원들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부실한 건 아니다. 오히려 좁고 난잡한 골목길이 퍼져 있는 수도라면 길쭉한 라이플용 총검을 끼운 라이플마저 불편할 때가 있었다.

“카빈에 강선 파 달라고 하면 상부에서 날려 버리겠지…….”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른 시답잖은 생각을 가벼운 웃음과 함께 흘려보낸 그는 천천히 책상 위에 올려놓은 체크 리스트를 들어 보였다.

촉박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폭죽도, 공간도, 꽃도. 역시 다들 제 역할을 잘해 주고 있었다. 이대로 움직이면 처음에 잘못 내디딘 발걸음도 완전히 수습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자 머릿속이 한결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 반대로 마음속은 무거워져 갔다.

지금 여유가 넘치는구나, 나는. 전방에서는 전쟁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나는 지금 여기 편하게 앉아 딴짓이나 계획 중이구나.

“남들 뭐라 할 게 아니었네.”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머금은 알렉스는 체크 리스트를 내려놓고 육군본부의 인장으로 봉인된 봉투를 뜯었다. 어제 수도 사단과 제3 수도경비대를 거쳐 파견 중대 관사로 전해진 봉투였다.

누구에게 왔는지 적혀 있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모를 리는 없었다. 그는 익숙한 글씨체로 써진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알렉스 매닝햄 대위에게.

로피츠 공작령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니 다행이군. 귀관이 저번에 보내 준 소설의 신권은 꽤 흥미로웠다. 내용적인 면에서 약간 부실한 점이 있어 보이지만, 복선이라 생각하고 읽는 중이다. 아직 우리 눈에 보이는 게 적으니 함부로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단정 짓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역시, 흑막을 특정 짓고 이를 주변인들과 공유할 근거는 확실히 부족해 보이는구나. 제대로 된 근거 없이 감상과 예측을 내뱉었다간 비웃음을 살 게 뻔하겠지. 그래서 지금은 여러 가설 중 하나로 놓고 있는 중이다. 사실 자네나 내 눈에는 확실해 보이지만, 그걸 설득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다른 문제지. 솔직히, 너무 예상외기도 하고 말이야.]

알렉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개인적인 편지인 것처럼, 피오나에게 납치되었던 사건을. 그리고 그 사건에서 얻어 낸 정보를 소설로 비유해 보낸 편지의 답장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특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소설이니 뭐니 하는 책에 관한 내용도 일부러 보내지 않았지만, 피오나가 이 모든 일을 꾸몄다는 것에 대해 여전히 적극적인 행동을 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긴 했다. 심지어 피오나 루멘시아는 아동 연쇄 납치 사건이 벌어질 때 그랜드 투어를 다니며 해외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남들을 설득할 정황이 하나도 없었다.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는 피오나의 숨통을 움켜쥘 수 있는 걸까.

그는 한숨을 푹 쉰 뒤 계속해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나는 다시 소설의 내용을 훑어보며 가설을 행동으로 옮길 근거를 찾아보겠다. 하지만 지금 전시사령부를 지휘하게 된 이상, 소설을 읽는데 투자할 시간이 많지 않은 게 아쉽구나. 남들 보는 앞에서 소설을 붙들고 있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말이야.]

알렉스는 필즈먼의 글씨체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답답함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육군 본부장의 직할에 놓인 또 다른 자산, 육군 정보국은 대부분 역량이 프랑크 왕국을 상대하는 데 쏠려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직 단서도 희미하고 근거는 오직 알렉스와 아델라인을 비롯한 소수의 증언만으로 정보국의 역량을 끌어올 수는 없었다.

정보국의 지원을 끌어온다 하더라도, 민간인 사찰이라는 오해를 살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피오나의 성은 루멘시아였다. 귀족을 상대로 함부로 정보국의 감시망을 펼친다는 게 알려지면, 귀족들의 반발이 극심해질 터.

피오나는 그 점을 정확히 읽어 내고 있었다. 함부로 공권력이 손을 뻗기 힘든 회색지대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긴장을 풀어 두길 바라네. 내 몫까지 소설을 읽어 준다면 좋겠지만, 너무 눈이 피로해질 때까지 무리하지는 말고. 나도 다른 방법을 찾아서 믿을만한 자에게 맡겨 두었으니, 때가 된다면 다시 알리겠네. 지금은 충분히 쉬어 두게.

리안 필즈먼 씀.]

마지막 문단까지 읽은 알렉스는 한숨을 쉬며 편지를 서랍 안에 넣었다. 지금은 긴장을 풀라는 말에도, 갑갑한 마음이 계속 머리를 흔들었다. 소설에서 나온 자신과 아델라인의 최후가 계속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갑갑하네.”

그는 한숨을 쉬며, 식어 버린 찻물을 목으로 넘겼다.

* * *

“여기인가.”

아델라인은 눈앞에 우뚝 선 큼지막한 건물을 바라봤다. 제국에서 가장 큰 도서관 중 하나인 중앙 도서관. 그 명성이 헛된 게 아니라는 듯, 수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정문을 드나들고 있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단 하나. 로피츠 공작의 아내이자 아델라인의 어머니인 ‘로피츠 공작 부인’에 대해 알아보기. 아델라인은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과 섞여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의 햇살로 데워진 공기가 무색하게 서늘하기까지 한 내부 공기가 아델라인의 얼굴을 식혔다. 그녀는 널찍한 내부 공간 안에 들어찬 서가들을 주욱 훑어봤다. 어디로 가야 하나 갈등하던 그녀의 눈에 도서관 내부의 배치도가 보였다.

그 앞으로 다가간 아델라인은 자신이 찾는 범주의 책, 즉 귀족 가문에 관한 책들이 어디 있는지 훑어봤다. 다행히 2층의 가운데 즈음에 있었다. 그 책들의 분류 번호까지 머릿속에 넣어 둔 아델라인은 계단을 올라 책장 사이사이의 골목을 뚫고 들어갔다.

“로피츠, 로피츠, 로피츠…….”

책장 앞에 서서 조금 살펴보자, 로피츠 공작가에 대한 책들을 찾을 수 있었다. 명망 높은 가문인 만큼, 로피츠 가문에 관해 쓴 책들이 정말 많았다.

“뭐부터 읽어 볼까…….”

책장을 한번 훑어본 그녀는 묵직한 양장본 책들 사이에 있는 상대적으로 얇은 책을 바라봤다.

[한 권으로 읽는 로피츠 공작가]

양옆으로 들어찬 책에 비하면 뭔가 익숙하고 가벼운 제목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아델라인의 손은 주저 없이 그 책으로 향했다.

책을 집어 든 아델라인은 표지를 살폈다. 다행히 1년 전 발행된 개정판이었다. 책 표지를 넘겨 앞부분을 보자, 목차가 눈에 들어왔다. 목차의 끝부분에는 ‘5대 가주, 프레데릭 소뮤아 로피츠’라는 소제목이 적혀 있었다.

“좋았어.”

필요한 정보가 있을법한 책을 찾은 아델라인은 책장 사이의 좁은 길을 나와 자리를 찾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대학교 열람실처럼 많은 사람이 열람 공간의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거나 과제를 하는 등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생소한 점이라면 대학교 도서관과 달리 열람 공간에서는 활발하게 대화가 오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곳곳에서는 젊은 청년들이 책을 들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저래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변 사람들도 자기 할 일을 하는 걸 보아하니 아무런 문제가 없는 모양. 아델라인은 길쭉한 책상 맨 끝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첫 장을 보자, 로피츠 가문의 초대 가주와 탄생 배경에 대해 쓰여 있었다.

도이치 지역의 조그만 공국을 다스리던 루거 가문의 직계인 마르틴 폰 루거가 베르크 가문의 황위 계승과 함께 초청을 받고 제국으로 온 것이 로피츠 가문의 시작이었다.

마르틴 폰 루거는 ‘외국에서 수입한 황가’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던 베르크 가문의 책사로서 활동했다. 그는 혼란한 정국 속에서 황실의 입지를 굳히는 데 독보적인 기여를 거뒀고, 로피츠 공작이라는 작위를 받으며 초대 로피츠 공작이 되었다.

“이런 가문이었구나.”

소설 속에서는 이렇게까지 로피츠 공작가에 대한 설정을 풀어놓지 않았으니, 아는 게 있을 리가. 마르틴 폰 루거의 활약상을 읽어 내리던 아델라인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드디어 현 로피츠 공작, 프레데릭 소뮤아 로피츠 공작의 차례가 나왔다.

팔락. 팔락. 팔락.

아델라인의 손이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그러나 로피츠 공작 부인에 대해 본격적으로 설명하는 페이지는 보이지 않았다.

정보도 한정적이었다. 찾을 수 있었던 가장 큰 결실은 기껏해야 ‘엘리자베트 가넷 웨슨’이라는 로피츠 공작 부인의 원래 이름뿐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가?”

혹시 공작 부인에 대해서는 일부러 비중을 적게 잡은 건가 싶었던 아델라인은 4대 공작에 대해 서술된 부분을 펼쳤다. 하지만 5대와 달리 4대 공작 부인의 행적과 정보는 훨씬 세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진짜 뭐지…….”

아델라인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점점 크기를 키워 갔다. 일부러 공작이 부인에 대한 정보를 지워 내기 위해 수를 썼다는 가설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의 맞은편 빈자리에 한 사람이 털썩 앉았다.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은 중년의 남성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아 낸 뒤, 맞은편 아델라인 너머로 시선을 흘긋 보냈다.

그 눈짓을 느낀 아델라인도 고개를 들어 거의 동시에 뒤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부의장 니…….”

쉿.

뒤쪽에 앉아 있던 그린우드는 급하게 자신의 입술을 검지로 막는 제스처를 취하며 아델라인의 입을 막았다. 아델라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나지막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피터라 부르게, 여기에서까지 시선을 끌고 싶지는 않으니.”

“알겠습니다, 피터.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나날이 바빠지는 중이지. 신문에서 나오는 것의 두 배 정도. 자네는?”

“덕분에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그나저나 무슨 책을 읽고 있나?”

그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생각했다. 과연 그린우드에게 자신의 고민을 말하는 게 좋을까. 아주 잠깐 뜸 들이던 찰나, 그린우드의 입이 열렸다.

“혹시 자네의 양친에 대해 알아보는 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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