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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127화 (127/200)

127화 아델라인도 모르고 있던 것

월말이 다가왔다. 가주 대리로서, 그리고 재건위원회 소속으로서 해야 할 일이 일제히 쏟아지는 기간이었다. 가주 대리는 사용인들의 임금을 지불하고, 재정을 확인하고, 공작가의 사업에 필요한 결정들을 처리해야 했다.

재건위원회의 위원은 재건사업의 진척도를 매달 점검하고, 보고서로 만들어 의회에 제출할 준비를 해야 했다.

자연히 근 며칠간 아델라인의 신경은 오롯이 처리해야 할 일들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깨어 있는 시간이 일하는 시간이고, 잠자는 시간이 휴식 시간이었다.

아델라인은 고개를 돌려 나이아를 바라봤다. 언제부턴가 안경을 쓴 그녀의 책상 위에는 끊임없이 서류 더미가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무지막지한 양의 서류가 그녀의 손을 거쳐 정리되고 요약되었다.

아델라인은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들을 바라봤다. 저만한 서류들을 단 십수 장의 요약본으로 만드는 건 확실히 대단한 능력이었다.

그러나 나이아도 휴식이 필요할 터.

“나이아, 차 마시고 계속할까?”

“준비하라 지시하겠습니다.”

아델라인의 말에, 나이아는 옆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에게 지시를 내린 뒤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벗었다. 눈이 피곤한 듯 눈가를 비비는 그녀를 보며, 아델라인은 넌지시 물었다.

“많이 피곤해? 안경도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조금 걱정되네.”

“잠깐 눈이 피로해진 거예요. 안경은 아카데미 때부터 가끔 썼었고요.”

나이아는 벗은 안경을 천으로 닦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평소 일상생활에는 안경이 없어도 지장이 없는데, 이런 자그마한 글씨들을 또렷하게 보려면 역시 안경이 도움이 되기도 하고요.”

나이아의 말에, 아델라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녀가 차와 다과를 가지고 오자, 아델라인은 손수 나이아의 잔에 차를 따라 주며 그녀에게 말했다.

“힘들면 말해, 집사들도 있으니까.”

“집사들도 바쁠 텐데요. 하지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이아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차를 입에 머금었다. 잠시 눈을 감고 차를 음미하자, 찻잎의 향기가 서재에 은은하게 퍼지는 게 느껴졌다. 아델라인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느껴지는 향기를 즐기며 피로를 덜어 냈다.

그때, 나이아가 아델라인을 향해 질문했다.

“곧 생일이시던데, 어떻게 준비할까요?”

“……?”

그 질문에, 아델라인은 순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나이아는 덩달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아델라인에게 물어봤다.

“작년 장부를 훑어봤는데, 작년 이맘때쯤에는 연회를 여셨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도 작년처럼 연회를 준비하시려나 싶어서요.”

그 말에, 아델라인은 간신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델라인의 생일이라니. 생각하지도 못했던 이야기였다. 소설에서 아델라인은 주인공이 아니라 악역이었다. 그렇기에 생일이 언제인지 같은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알고 있을 리가.

그러나 아델라인이 자신의 생일을 모른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 건 마찬가지였기에, 그녀는 애써 원래대로 표정을 관리하며 태연하게 답했다.

“아, 아. 난 또.”

그녀는 잠깐 대답을 얼버무리는 사이 머릿속으로 변명거리를 떠올렸다. 일단은 지금 이 순간을 자연스레 넘겨야 했다.

“올해는 전쟁 중이니까, 연회는 안 열거야.”

“그래요? 공작님께서 생일이시라고 용돈도 추가로 주셨는데요.”

“얼마나?”

“50파운드요. 그러니까 이번 달 용돈은 100파운드인 거죠.”

그 말에 아델라인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큰돈이었다. 물론 공작가라는 신분을 감안하면 큰돈은 아니었지만, 1파운드도 적은 돈이 아니라는 것을 추수제 때 느꼈기에 더욱 크게 다가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려나.”

아델라인은 행복한 고민을 하는 것처럼 눈을 감으며 차를 홀짝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수많은 고민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아델라인의 생일을 자연스레 알아낼 수 있을까.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때, 또 다른 시녀가 서재의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공녀님, 매닝햄 대위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 말에, 아델라인의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오늘?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평소에도 종종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는 알렉스였지만, 왠지 오늘은 무언가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을 내어 찾아온 알렉스를 문전박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아델라인은 시녀를 향해 말했다.

“응접실로 모시고 차를 대접해. 준비해서 금방 나갈게.”

아델라인의 말에, 시녀는 고개를 끄덕인 뒤 물러갔다.

아델라인은 침실로 가 나이아의 도움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고 단장을 마친 뒤 응접실로 향했다. 근무 중 찾아온 건지 제복 차림의 알렉스가 차를 홀짝이며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 곧바로 약간의 미묘한 감정이 따라붙었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어 찾아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스! 오늘 무슨 일로 찾아온 거예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오늘 휘태커 경감하고 의논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들렀어요. 괜찮다면 시내로 산책이나 갈까, 하고.”

알렉스의 제안에, 아델라인은 순간 나이아를 떠올렸다. 안경을 쓰고 서류와 싸우고 있을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알렉스가 건넨 일탈의 유혹이 훨씬 강력했다.

“좋아요. 산책은 능률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나갈 준비를 할게요.”

“기다릴게요.”

다시 자리에 앉은 알렉스를 뒤로 한 아델라인은 침실로 가 손가방을 챙겼다. 보기보다 묵직한 손가방 안을 보자, 금장 장식으로 화려하게 감싼 리볼버가 들어 있었다.

아델라인은 부싯돌의 상태와 화약의 건조함을 살핀 뒤 손가방의 단추를 여몄다. 안에는 비상금을 겸한 용돈도 있었다.

아델라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다행히 옷도 적당했다. 햇빛을 피하기 위한 모자까지 골라 쓴 그녀가 응접실로 내려갔다.

그녀가 나타나자 알렉스는 곧바로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좋아요,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나요?”

“알렉스는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생각해 둔 바가 있다는 듯 곧바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수도 서부의 상점가는 어떤가요. 봄철을 맞아서 가게마다 개성 있게 꾸민 게 볼만하다는데.”

“그래요, 서부의 상점가는 걸어가기에는 거리가 조금 있으니까 마차를 타고 가요.”

그 말을 끝으로 시녀에게 지시를 내린 아델라인은 알렉스와 함께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 나왔다. 바깥으로 나오자 따스한 봄볕과 봄바람이 몸을 감싸 오는 게 기분이 좋았다.

“좋네요, 봄은.”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잠시 뒤, 마차가 현관 앞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이 마차에 오르자, 마부가 창문으로 목적지를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서부의 상점가로.”

“알겠습니다, 대위님.”

알렉스의 말에, 마부는 능숙하게 마차를 몰아 상점가로 향했다. 서부로 향할수록 거리에는 마차와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차는 점점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곧 마차가 길가를 걷는 보행자에게 추월당할 정도가 되자, 마부는 곤란한 듯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도 걸어갈까요?”

“좋아요, 어차피 산책하려고 했는데.”

아델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알렉스는 그나마 한산할 상점가 외곽의 한 지점에서 기다리라 전한 뒤 마차를 멈춰 세웠다.

마차에서 내려 몇 분을 걷자, 그들의 눈앞에 상점가가 나타났다. 다양한 상점들이 펼쳐져 있는 광경에 아델라인은 절로 탄성을 내뱉었다.

“와.”

상점들이 저마다의 콘셉트를 가지고 봄에 어울릴만한 장식을 두른 게 볼만했다.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손을 잡은 채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구경했다.

한 식당은 먹을 수 있는 꽃을 이용한 요리와 음료를 선보이며, 요리에 들어가는 꽃들로 가게 밖을 꾸몄다. 어떤 공방은 자신들의 브로치와 진짜 꽃을 나란히 두고 자신들의 손기술을 자랑했다.

“아델라인, 저 브로치 꽤 아름답지 않아요? 어때요?”

알렉스가 브로치를 바라보며 아델라인에게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이쁘네요.”

아델라인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알렉스의 눈이 살짝 다른 빛을 띠었다. 마치 기억이라도 해 두려는 듯, 알렉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브로치 위를 훑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델라인은 상점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알렉스의 떠보는 듯한 질문에 다양하게 대답했다.

“이 단검은요? 꽃문양이 꽤 정밀하게 새겨져 있네요.”

“별로 마음에 안 드네요. 검보다는 장식품 같아요.”

“그런가요.”

시큰둥. 알렉스의 눈빛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이 비단 손수건은 어때요? 꽃무늬 자수가 올라가 있네요.”

“오, 이건 아름답네요.”

반짝.

알렉스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런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하자, 아델라인은 알렉스가 오늘 자신을 만나러 온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생일 선물. 알렉스는 자신의 생일 선물을 고르기 위해, 함께 상점가를 둘러보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그 말인즉슨,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생일을 알고 있다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

“알렉스, 아마 이번 달 말까지는 꽤 바쁠 것 같거든요. 그래서 만나기가 힘들 것 같아요. 그래도 4월 초중순은 한가할 것 같은데…….”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언제 한번 날을 잡고 하루 종일 놀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언제가 좋을까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의 머릿속이 혼란에 빠졌다. 아델라인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일까? 설마 이 데이트 날로 자신이 생일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려 하는 걸까?

알렉스는 천천히 머리를 굴렸다. 초중순. 기껏해야 15분의 1의 확률. 그러니까, 가능성은 0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중에 답이 있겠지.

그러나 틀릴 가능성을 대비해서, 알렉스는 적당히 무난한 날짜를 하나 골랐다.

“4월 둘째 주 일요일은 어떤가요?”

단번에 나온 알렉스의 답. 그리고 아델라인은 그의 답을 믿었다. 4월 둘째 주 일요일이 아델라인의 생일이구나.

머릿속으로 그 날짜를 새긴 아델라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날에 같이 데이트 해요.”

* * *

산책이 끝나고 저녁 즈음이 되자, 알렉스는 싱글벙글한 미소를 지으며 관사로 돌아왔다. 때마침 저녁 식사 시간과 맞물리자, 그는 식당으로 가 배식을 받은 뒤 빈자리로 가서 식사를 시작했다.

그때, 밀든 하사에 의해 같이 끌려가 버린 스워포드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표정이 좋아 보이십니다, 중대장님. 성과 좀 거두셨습니까?”

“그래. 몇 가지 가지고 싶어 하는 물건을 찾았어. 그리고 생일도 단번에 맞췄다고.”

그 말을 하며 미소를 지은 알렉스는 감자 샐러드를 퍼먹었다.

“생일이 언제인지 찍어서 맞추셨다고요?”

“어. 데이트 날짜를 잡자기에 둘째 주 일요일은 어떠냐고 물었지. 그러니까 곧바로 좋다고 말하더라고.”

알렉스는 스테이크를 썰며 자신의 무용담을 풀어놓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스워포드의 표정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그는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틀리면 어쩌나 싶어서 주말로 잡았거든? 그래도 운 좋게 맞은 것 같아.”

“중대장님.”

스워포드의 부름에, 알렉스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순간, 알렉스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왜.”

“로피츠 여사님의 생일은… 4월 첫째 주 토요일입니다. 5일이요.”

딸그락.

알렉스의 손에서 식기가 떨어졌다. 뿌듯함으로 가득 들어차 있던 얼굴은 이내 싸늘하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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