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과거를 되짚어
아델라인은 노먼이 짚어 준 길을 따라 걸어갔다. 걸으면 걸을수록, 머릿속은 정리되는 듯 더욱 복잡해졌다.
알렉스가 황자고, 그걸 황후가 알아채서 알렉스를 제거하려 했다고? 그 목적으로 오베른에 사람을 보내 작전을 어그러뜨린 거라고? 그러면 왜 시녀가 소문을 이야기할 때는 뺨을 때린 거지? 아닌가? 진짜 알고 있어서, 부정하기 위해 그런 건가?
한 가지 생각을 처리하면 두 가지 생각이 튀어나오는 상황. 아델라인은 생각할수록 더더욱 복잡해지는 머리를 붙들며 눈앞에 보이는 벤치에 간신히 앉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델라인은 알렉스가 가르쳐 줬던 방법대로 천천히 숨을 고르며 머릿속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여전히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래… 차근차근 정리해 보자. 알렉스는 황자고. 이를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로피츠 공작과 황제… 이를 안다고 추정되는 인물은 황후.”
아델라인은 계속해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가며 중얼거렸다.
“알렉스는… 알고 있을까.”
아델라인은 한숨을 하아, 내뱉었다. 황후에게 노려지고 있다는 것도, 그 이유도. 알고 있다면 문제는 없었다. 알렉스는 무적이 아니지만, 적어도 황후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를 도울 동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고 있다면?
아델라인은 바닥을 내려다봤다. 알렉스는 무적이 아니었다. 다른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의 주인공처럼 납치도 당하는 한낱 사람일 뿐이었다.
걱정이 그녀의 머리를 짓눌렀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고 연신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그녀의 옆자리에 누군가가 털썩 앉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심각하게 해요?”
알렉스의 목소리에, 아델라인이 휙,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봤다.
그러자 알렉스가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셔츠와 바지만 입은 그는 운동이라도 했는지, 셔츠가 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황궁에는 무슨 일이에요?”
눈 둘 곳을 모르게 만드는 땀에 젖은 그의 상체를 곁눈질하며, 아델라인은 질문에 답했다.
“급히 공작님께 전달해야 할 서류가 있어서요. 알렉스는 뭐 하고 있었어요?”
아델라인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묻자,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구보 좀 뛰다가 노먼 중위 찾아서 돌아다니고 있었죠. 급한 건 아니고.”
“노먼 중위님이라면 저 대신 서류를 전달하러 후원 즈음에 계실 거예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러면 산책을 거의 마쳤을 테니 굳이 안 찾으러 가도 되겠네.”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산들바람에 땀을 식혔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표정을 보아하니 가벼운 고민은 아닌 것 같은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여러 가지.”
“예를 들면?”
알렉스가 떠보듯 질문을 던지자, 아델라인은 대충 얼버무리기 위한 답을 내놓았다.
“피오나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그 책도, 말이죠?”
알렉스가 순순히 아델라인의 유도에 따라오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화제는 순식간에 피오나가 가지고 있던 원작 소설로 바뀌었다.
“그 책을 조금 시간 들여서 분석해 봤거든요. 어떤 종류의 책일까 하고.”
“…계속해 보세요.”
“제 생각에는 일종의 소설 형식으로 엮은 회고록이 아닐까 싶어요. 글의 내용은 말이죠. 아마 오탈자나 글의 짜임새, 그리고 책의 만듦새를 생각하면 완성된 원고가 아니라 초고를 엮은 것에 가까울 것 같고요.”
“그런가요?”
아델라인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이어 갔다. 생각해 보면, 『황태자 관찰일기』는 매화 오탈자를 지적하는 댓글이 있었다. 필력은 좋았지만, 설정이나 이야기 흐름에 구멍이 없던 것도 아니었고.
“뭐, 이 점이 긍정적인 분석 내용 중 하나. 적어도 비집을 틈은 많다는 것이겠죠.”
“다른 긍정적인 분석 내용은 무엇인가요, 설마 하나뿐인 건 아니겠죠?”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긍정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제게 가해지는 징계가 감봉이나 정직 수준에서 항상 끝났다는 점을 꼽을 수 있었겠네요. 그 징계도 여러 이유로 빨리 풀리고.”
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아마 상황이 저쪽 형편 좋은 대로 흘러간 시간 선에서도 육군 본부의 권한과 독립성은 유지되고 있었던 듯합니다. 필즈먼 본부장님의 영향력이 유지되고 있다는 거겠죠. 그리고 본부장님을 임명한 자유당 내각의 영향력도.”
“…아.”
“황태자의 손에 제국군을 통제할 군권이 들어가지 않은 거고, 의회의 힘이 건재하다는 소립니다.”
“좋은 건가요?”
“적어도 병정 인형만 손에 들고 있는 황태자의 애인이, 군권을 손에 쥔 황태자의 애인보단 상대하기 편하지 않을까요?”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이해가 갈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의 시야는 아델라인보다 훨씬 위에 놓여 있었다. 같은 글을 보더라도 얻어 내는 정보의 질이 확연히 달랐다.
그러자 그녀는 내심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은 몇 번이나 이 소설을 봤으면서 그런 유의미한 정보 하나 뽑아내지 못하다니.
“이 정도가 일단 긍정적인 요소들. 나머지는 지금 상황에서 가치 판단을 하기에는 이른 정보들이네요. 실제로 일어날지도 확실치 않고.”
알렉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아델라인.”
알렉스의 갑작스러운 말에,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아델라인 덕분에, 숨통이 많이 트였어요. 많은 것을 비틀어 왔고, 그 덕분에 공략해 볼 구멍이 생겼으니까요.”
그의 다정한 말에, 아델라인은 얼굴을 붉히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제가 한 게 뭐 있다고…….”
그러자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델라인이 없었다면 황태자와 세이드가 접선하는 것을 포착하지 못했을 거고, 황후가 암살당하는 것도 막을 수 없었겠지요. 모두 아델라인이 바꾸기 시작한 겁니다.”
알렉스는 그녀의 반대편 어깨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끌어당겨 안으며 속삭였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요.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알렉스의 체향이 느껴졌다. 땀에 젖은 그의 몸이었지만, 전혀 불쾌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델라인은 그의 말에 끄덕임으로 답한 뒤, 그의 몸에 살짝 제 몸을 기댔다.
“고마워요, 알렉스. 그때 믿어 줘서.”
“뭐, 사실 그때는 아델라인의 말을 믿은 게 아니라 황태자와 세이드가 접선하는 것을 보고 움직인 것이지만요.”
“그랬겠죠.”
잠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땀이 식어 약간 추워졌는지, 알렉스의 팔이 아델라인을 살짝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러자 아델라인도 약간 더 옆으로 움직여, 그의 몸에 몸을 붙였다.
잠깐 침묵으로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 그 침묵을 깬 건 아델라인이었다.
“사실, 오다가 황후의 말을 듣게 되었어요. 도청 마도구를 관사에 설치하려 했다고 직접 말하는 걸 들었어요. 그리고 실패했다고도.”
“그 답으로 전달한 쪽지는 마음에 들어 하던가요?”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미묘한 웃음으로 답했다.
“대체 무슨 말을 쪽지에 썼길래 그래요?”
“뭐 쓴 것도 없는데.”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바지 주머니에서 쪽지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아델라인이 받아서 펼치자, 굵고 붉은 사선이 그어져 있는 종이였다.
“폭파 딱지입니다. 훈련용이죠.”
“…이걸 붙이면 진짜 터지나요?”
소설 속 세상이니 마법 스크롤 같은 게 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아델라인의 물음이었지만, 알렉스는 잠시 그녀를 바라본 뒤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폭약통을 안 들고 다니겠죠. 저번에 꽃놀이 갔을 때 말해 준 이야기 기억나요?”
“수도에 침투해서 모의로 폭파하는 훈련이요?”
“그런 종류의 훈련에 쓰이는 거예요. 진짜로 의회당을 터뜨리고 사람을 죽일 수는 없잖아요?”
알렉스의 설명에, 아델라인은 당연한 걸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어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 그렇군요.”
“뭐, 그런 종류의 스크롤이 있다고는 하지만, 여러모로 전장 환경에서는 쓰기 힘들죠. 마나 교란이라던지, 색적 마법이라던지, 그런 게 넘쳐나니까요.”
알렉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델라인을 향해 말했다.
“약간 말이 샌 것 같은데, 요점은… 아무도 다칠 일이 없었어요. 그냥 찔리는 게 있으면 괜히 무서운 느낌이 들게 만드는 거죠.”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손에서 폭파 딱지를 돌려받은 뒤 주머니에 접어 넣으며 말했다.
“할 수는 있지만 할 생각은 없다, 라는 신호로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는 게 제 생각인 거죠. 협박으로 이해하면 어쩔 수 없지만.”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설명을 듣자 저런 단순한 쪽지에, 황후가 얼굴을 붉히고 거칠게 감정을 내뱉은 것이 이해가 되었다. 단순한 폭파 딱지를, 황후는 알렉스의 협박으로 이해한 것이다.
“황후가 항의하지 않을까요?”
“뭐, 누가 언제 붙였는지 증인이나 증거가 있어야 따지든 하겠지요. 그래 봤자 인쇄기로 돌려서 뽑아내는 공산품이라 누구라고 특정 짓지도 못하기도 하고요.”
알렉스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기다 지금이 전쟁광 폭군 시대도 아니고. 엄연히 법치의 질서가 꽃피우는 시대잖아요? 아무리 황제나 황후라도 예전의 황족처럼 함부로 잡아가서 추궁하고 고문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니까.”
추궁과 고문.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무언가를 번뜩 떠올렸다.
“알렉스, 황후가 정원사를 야밤에 부르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나요?”
아델라인의 목소리에서 무언가를 느낀 건지, 알렉스는 그녀의 입에 귀를 가져가며 나지막이 요청했다.
아델라인의 입에서 그녀가 보고 들은 이야기들이 풀어져 나왔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알렉스는 눈을 감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 부분이라면, 쉽게 해결할 수 있겠네요. 다만… 도움이 필요해요, 부탁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