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소설에는 나오지 않았던 풍경
경치를 감상하며 늦은 점심을 먹고 나자, 봄의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볕이 춘곤증을 일으켰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돗자리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대충 뒷정리를 마친 알렉스도 그녀의 곁에 자리를 옮겨 앉았다.
“신문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여기도 꽤 좋죠?”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하품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알렉스는 조금 더 그녀에게 다가간 뒤 자신의 허벅지를 탁탁 손으로 두드렸다.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가 무엇을 해 주고 싶은지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알렉스.”
“왜요?”
“다리가 좀 많이 굵고 단단한 건 알죠?”
“…아.”
알렉스의 허벅지는 좋게 말하면 많이 발달되어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무지막지하게 두꺼웠다. 그 허벅지에 머리를 얹으려 해도, 너무 높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알렉스가 얼굴을 붉히자, 아델라인은 옆으로 한 바퀴 굴러 그에게서 떨어진 뒤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 손으로 두드렸다.
“여기 같이 누워요.”
“둘 다 자다가 누구 한 사람 납치당하면 어쩌려고.”
“뭐, 남은 한 사람이 구해 주지 않을까요?”
“둘 다 납치당하면?”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해 보죠.”
아델라인의 대책 없는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린 알렉스는 돗자리에 천천히 몸을 뉘었다. 하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알렉스가 몸을 누이자, 아델라인은 마치 자기 거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팔을 멋대로 잡아, 팔베개 삼아 머리를 얹었다. 마치 대단한 보물이라도 손에 넣은 것처럼 뻔뻔하고 의기양양한 그녀의 표정이 어쩐지 귀여워서, 알렉스는 나머지 한 팔로 자신의 머리를 받힌 채 완전히 돗자리 위에 몸을 누였다.
청명한 하늘, 그 하늘을 반쯤 가리며 그늘을 내어 주는 이름 모를 꽃나무, 그 꽃나무 가지마다 꽃 피운 분홍빛 꽃잎들.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마음이 편해지는 듯했다.
“여기는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뭐, 일하다 알게 되었지요. 한 7년 전 즈음인가 진행되었던 수도 방위 훈련 때요.”
잠시 운을 띄운 알렉스는 하늘에 떠다니는 조각구름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수도사단하고 제1, 2 수도경비대가 연합해서 훈련을 하나 했거든요. 수도에 적성 세력이 침투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연구 차원에서. 제가 그때 속해 있던 3대대가 적성군으로서 수도의 각 주요 시설을 모의로 폭파하는 임무를 받았죠.”
기억을 되짚어가며, 알렉스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그때 작전 개시 전 대기 위치가 여기였어요, 수도로 향하는 길목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관찰할 수 있었거든요. 그때도 이맘때 봄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알렉스는 몸을 일으켜 주변에 박혀 있던 바위로 걸어갔다.
“여기 어딘가 즈음에 있었는데.”
잠시 바위 밑을 뒤적거리던 그는 미소를 지으며 유리병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 유리병의 주둥이에는 한 장의 쪽지가 실에 꿰여 매달려 있었다.
“아, 여기 있네.”
알렉스는 겉에 묻은 먼지를 슥슥 소매로 닦아 걷어 낸 뒤 안에 있는 내용물을 살폈다. 호박빛의 액체는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건 뭐예요?”
“훈련 시작하기 전에 예행연습도 좀 해 볼 겸 정찰조를 보냈거든요. 근데 한 놈이 길목에 검문소를 세운 수도사단 장교의 위스키를 훔쳐 온 거예요.”
“와.”
“그런데 당장 훈련은 시작하니까, 여기에 숨겨 두고 훈련 끝나면 먹자… 했는데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네요.”
알렉스는 위스키병을 아델라인에게 건넸다. 주둥이에 메인 쪽지를 열자, 7년 전의 날짜와 소속, 타격 목표, 그리고 대여섯 명의 관등 성명이 적혀 있었다. 그중에는 알렉스의 이름과 계급도 있었다.
[- 제3 대대 08 침투조
- 타격 목표: 제국 의회당
- 소위(진) 알렉스 매닝햄]
“소위, 진?”
소위라는 계급 옆에 붙은 낯선 표시. 아델라인이 서투르게 그걸 읽자, 알렉스는 곧바로 부연 설명해 줬다.
“훈련이 끝나면 곧바로 임관식이었거든요.”
알렉스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때,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손가방에 급히 손을 집어넣은 아델라인의 눈빛이 순식간에 두려움과 긴장으로 가득 찼다.
그 모습을 본 알렉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지그시 힘을 주었다.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델라인.”
잠시 뒤, 수풀 너머로 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접이식 의자와 캔버스 받침대, 그리고 캔버스와 미술 도구를 담은 가방을 든 백발이 성성한 노인. 그는 수풀을 헤치고 나온 뒤에야 두 사람을 본 건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아, 선객이 있었구려.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그림을 그리십니까?”
“취미로 그린다오. 어디 내놓기는 뭐하지만, 가끔 부탁을 받아 원하는 그림을 그려 줄 때도 있고. 여기 풍경이 좋아 자주 이곳을 찾는다오. 뭐, 오늘은 공친 듯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노인이 몸을 돌리자, 아델라인의 머릿속에 순간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저, 저기!”
아델라인의 부름에, 다시 짐을 챙겨 오솔길을 걸어가려던 노인의 발걸음이 멈췄다.
“혹시, 그림 하나 그려 주실 수 있으실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아델라인의 물음에, 노인은 잠시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러자 알렉스도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적당한 자리에 의자를 펴 앉았다.
“뭐… 편하실 대로 앉으시지요. 인물이 좋으니 편하실 대로 앉아도 꽤 그럴듯하게 나올 거요.”
그러자 두 사람은 괜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돗자리 위에 앉았다. 어색할 이유도 없는데 어색했다. 그러자 잠시 연필을 들고 슥슥 선을 긋던 노인은 캔버스 너머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인지 물어도 되겠소?”
고작 한마디 말을 던진 것뿐인데, 두 사람은 화악 얼굴을 붉혔다. 머릿속은 답을 알고 있는데, 입은 옴짝달싹 움직이질 못했다.
그때, 알렉스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밀착한 알렉스의 몸에서 느껴지는 체온에, 아델라인의 얼굴이 더더욱 달아올랐다. 그러자 그걸 본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대로 이쪽 바라보고 잠시만 가만히.”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의 손은 연필을 든 채 부지런히 스케치해 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뒤, 노인은 두 사람을 캔버스 너머로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자, 이제 편히 계셔도 되오, 어차피 여기서는 많이 그려 봤으니.”
그러자 잔뜩 굳어 있던 두 사람의 몸이 추욱 늘어졌다. 그 잠깐 동안 긴장해 목이 탔는지, 아델라인은 음료를 잔에 따라 홀짝였다. 목을 축인 아델라인은 그대로 돗자리 위에 드러누웠다.
“그래서, 그 훈련은 어떻게 되었어요?”
“뭐, 예상이 어느 정도 가지 않아요?”
알렉스의 물음에 답을 곧바로 떠올린 아델라인이었지만, 그녀는 일부러 모른 척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뭐… 우리 침투조가 낸 결과만 보면 의회당 폭파, 의회에서 각종 일정이나 업무를 수행하던 의원들 수십 명과 그 보좌진들도 대다수 사망 내지 중상, 경비병력도 전멸.”
생각보다 무지막지한 결과에, 아델라인은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알렉스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침투했던 방향이 수도 남부였거든요. 그때는 수도 남부는 수도로 쳐주지도 않아서 제2 수도경비대가 대충 순찰하는 정도로 치안 유지가 허술하게 이뤄졌었고. 그러다 한 번 크게 데이고 나니까 6년 전 즈음 창설된 게 제3 수도경비대죠.”
그때, 노인이 두 사람을 향해 손짓했다.
“자, 색을 칠하기 전에 한 번 와서 밑그림을 봐 보겠나? 사람을 그리는 건 오랜만이라 한번 봐 줬으면 하네만.”
그러자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아직 흑백의 스케치일 뿐이지만, 캔버스에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렸다고는 믿기 힘든 세밀한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저는 좋네요, 알렉스는 어때요?”
“그림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잘 그리셨다고 생각합니다.”
“무얼. 자, 그럼 이제 색을 칠하겠네.”
그러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돗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델라인은 괜스레 기우뚱기우뚱, 오뚜기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다가 알렉스에게 기댔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오직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온기는 하려던 말도 잊을 정도로 따듯하고 편안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자, 어느새 햇빛에 조금씩 주황빛이 섞이기 시작하고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아델라인이 알렉스에게 말했다.
“여기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러자 알렉스는 살짝 귓불을 붉히며 볼을 긁적였다.
“뭘,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요.”
“사실, 많이 걱정했거든요. 준비했던 계획이 다 엇나가서… 알렉스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낸 건데, 길 위에서 시간을 낭비하니까.”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피식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다음, 그녀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대와 함께하는 시간은, 그 무엇을 해도 헛되다 생각한 적이 없다. 매분 매초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시간이니, 그저 내 곁에 함께 하는 것으로 나는 만족한다.”
아델라인이 흠칫, 했다. 황태자의 명대사 중 하나였다. 아델라인이 놀란 눈으로 알렉스를 바라보자, 그는 삽화 속 황태자가 보이고 있던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뒤.
알렉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치 높은 도수의 증류주를 단번에 들이켠 것처럼 스스로 타오르던 알렉스는 결국 솥뚜껑 같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잊어 주세요…….”
참아야 하는 것을 아는데도, 일부러 알렉스가 창피함을 감수하고 꿋꿋이 내뱉은 말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입을 손으로 꾹 붙들어 가며 웃음을 억누르던 그녀는 결국 터지고 말았다.
풋, 하하하하―
티끌 한 점 묻어 있지 않은, 그 어떤 웃음보다 맑은 웃음소리가 저물어 가는 주황빛 하늘을 가득 채울 듯이 울렸다.
부끄러움은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들어간 알렉스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