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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119화 (119/200)

119화 평화를 원한다면

휴가에서 복귀한 뒤 며칠이 지난 3월의 중순, 몇 개월 동안 인기척 없이 방치되어 있던 관사는 어느새 다시 평소대로 돌아온 듯 보였다.

“든 사람 자리는 모르고 난 사람 자리는 안다더니, 딱 그 모양새네.”

그러나 작년과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었다. 책상 앞 의자에 앉은 알렉스는 한숨을 푹 쉬며 중대 인명부를 내려다봤다. 대원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목록들 사이사이에는 가로줄이 그어져 있었다.

전쟁을 막기 위해 벌인 작전과 그런데도 벌어져 버린 전쟁. 그 사이에서 스러져 간 이름과 얼굴을 떠올리자 입 안이 쓰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은 감정에 휩싸여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었다.

알렉스는 고개를 들어 집무실의 장교들을 바라봤다. 1소대장, 2소대장, 그리고 노먼 중위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파견 중대의 장교도 한 사람 줄어 있었다.

전장의 총탄은 장교와 병사를 가리지 않았고, 3소대장은 특히 솔선수범하는 장교였다. 어쩌면 부상 정도로 갈음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잠시 3소대장의 빈자리를 생각하며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은 알렉스는 자신의 앞으로 온 명령서를 그들에게 보여 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라이플 여단 본대에서도 인원 보충은 힘들다고 연락이 왔다. 육군 병원에 입원한 애들도 회복되면 중대로 복귀하는 게 아니라 여단에서 바로 재배치한다는 소식이다. 교도대로 갈 것 같은데.”

“…이해 못 할 바는 아닙니다만, 걱정이 앞서는군요. 결국, 가용 가능한 중대 인원은 여든여덟 뿐이라는 소리이니까.”

노먼의 말에, 나머지 두 명의 소대장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본 알렉스는 한숨을 푹 내쉰 뒤 말을 이어 나갔다.

“본대에서는 차선책으로 중화기 운용 인원을 확대 편성, 인원 부족에서 발생하는 화력 감소를 벌충하는 것을 제안했다. 또한, 이 기회에 지금까지의 전훈을 반영한 무장 개편안을 제출하도록 지시했고.”

“일이군요, 일.”

“어차피 3소대장이 육군 병원에 간 이상, 중대 편제 개편도 해야 해. 노먼 중위, 그리고 1소대장, 애들 주특기 고려해서 소대 편제 개편해요. 2소대장은 지금까지 진행했던 작전 자료 정리하고 무장 개편 관련 중대원들 의견 수렴해서 정리, 보고서로.”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고개를 주억거린 뒤 뒤를 돌아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그 열린 문이 닫히기 전에, 몇 개월 만에 보는 얼굴이 집무실에 내비쳤다.

“대위님.”

정장을 입은 채 나타난 안드레이에, 알렉스는 들어오라 손짓하며 질문을 던졌다.

“애들 근무 안 서고 있었냐?”

“중대장님 만나러 왔다니까 들여보내 주던데요.”

“빠져가지곤. 차 한잔할 거냐?”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무실 한편의 난로에 불을 붙이고 찻주전자를 올린 알렉스는 그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부탁한 건.”

“여기 있습니다.”

안드레이가 품속에서 꺼낸 전표를 받아 든 알렉스는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오베른에서 전사한 전우들의 유족에게 전달하기로 한 금액보다 적은 금액이 적혀 있었다.

“숫자가 안 맞는데.”

“제가 좀 보탰습니다. 제 전우들이기도 하니까요.”

“…알겠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알렉스였지만, 그는 결국 짧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물이 끓자, 알렉스는 솔잎을 주전자에 넣었다. 잠시 끓는 물 속에서 솔잎 가닥들이 이리저리 요동치는 것을 눈에 담은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제 도착했어?”

“3일 전에 도착했지요.”

“그러면 어느 정도 알겠네. 이야기는 들었지?”

알렉스의 말에, 안드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조사를 해 보니 역시 알리바이가 있었습니다. 바스의 한 저택을 빌려 두어 달간 요양했다는군요.”

“당연히 알리바이를 마련하지 않을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겠지.”

어느 정도 방 안에 솔향이 퍼지자, 그들은 각자의 잔에 차를 따른 뒤 천천히 목을 축였다. 그러자 머릿속에 남아 있던 약간의 나른함이 사그라드는 듯했다.

“그런데 보고할 방법이 없어.”

“알리바이를 깰 수단이 없으면 힘들죠. 조금 더 파고들어서 보고할 수 있게 만들려 한다고 해도 민간인 사찰로 트집 잡히기 쉽습니다. 특히나 이번 건은…….”

안드레이는 차를 홀짝인 뒤 자조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그대로 상부에 보고했다간 진통제 오남용 여부부터 확인할걸요. 약 빨았나 싶어서.”

오베른에서 맞서 싸웠던 사병 집단, 마법사들을 숨겨 뒀던 중앙경매장과 암시장, 마법사들이 진행하던 ‘초승달 계획’. 그 모든 것들이 피오나 루멘시아 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신 나간 망상에 가까웠다.

“그렇겠지.”

알렉스는 아파 오는 머리를 솔잎차의 향으로 간신히 잠재운 뒤 화제를 틀었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은 사안이니, 지금 왈가왈부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델라인은 요즘 무슨 일 해? 재건위원회는 거의 반동면 상태라고 알고 있는데.”

“나이아랑 무슨 사업? 후원? 같은 거 준비하는 것 같던데요.”

“사업? 후원? 무슨 분야인데?”

“그게…….”

* * *

“레이크 양을 통해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여사께서 제 연구를 후원하고 싶으시다고…….”

“네, 정확합니다.”

아델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중년의 아카데미 교수, 포사이스는 조교가 내온 차를 홀짝이며 그녀를 잠시 바라본 뒤 잔을 내려놓았다.

“레이크 양에게 들으셨을 테지만, 제국군은 제가 가진 특허에 대한 로열티를 지급할 생각이 없습니다. 플린트락 기반 무기 체계로 계속해서 성공을 거둔 게 그 이유 중 하나이지요.”

그는 아델라인을 응시하며 담담히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기업이나 귀족 가문에서 연구를 후원하고 대신 특허를 가져가는 방식은 꽤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저는 섣불리 기술을 특허로 등록해 버린 바람에…….”

“몇 년 안으로 특허권이 소멸된다고 알고 있어요. 제국군에게 그 시간은 긴 시간이 아니니, 특허권이 소멸되면 그때 적용을 진행하겠지요.”

아델라인의 말에, 포사이스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개인의 영달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도 딸린 연구원과 학생들이 있다 보니 그들의 노력에 늦지 않게 답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역시 아카데미의 연구비 지원으로는 많이 부족하시겠죠, 연구를 진행하기에는.”

포사이스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인 뒤 그를 향해 제안했다.

“그걸 제가 지원하고 싶습니다. 지금 교수님과 학생들이 진행 중인 연구 과제 전부를.”

아델라인의 말에, 포사이스는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부, 말입니까?”

“네, 원추형 탄환, 탄약 카트리지, 그리고 신형 화약까지 전부.”

“셋 다 단기간에 끝날 과제는 아닙니다. 특히 신형 화약과 원추형 탄약의 경우 이론 단계에 머물러 있고, 탄약 카트리지의 경우 시제품을 만들었지만 이를 시험할 총기의 제작과 공간의 확보가 어려워 잠정 중단 상태입니다.”

“공작 각하께서 장기 후원 계획을 허가하셨습니다. 이 정도면 연구에 도움이 될까요.”

아델라인이 나이아에게 서류 봉투를 건네받아 포사이스에게 전했다. 안의 내용물을 꺼내 확인한 그는 잠시 뒤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제가 본 게 맞는지 확인하듯 눈을 살짝 비볐다.

무언가 잘못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제안서의 마지막 장까지 꼼꼼히 훑어본 포사이스는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두 눈가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른 뒤 다시 제안서를 처음부터 훑어봤다.

이 정도면 지금까지 예산 문제로 더디게 진행되었던 연구의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모자란 기자재를 최신 모델로 보충하고, 시약을 넉넉히 써 가며 몇 번이고 반복 실험을 해 연구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연구원과 학생들에게 돌아가는 급여도 넉넉히 줄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희망찬 미래를 떠올려 나가던 포사이스. 그러나 곧바로 그의 얼굴에 의심이 깃들었다. 계약의 내용은 호의적인 것을 넘어 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했다.

그러자 더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이 계약을 통해 그녀가 무엇을 얻어 갈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그러다 한 가지 가설을 떠올린 포사이스는 아델라인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공작가에서 방산업에 손을 뻗을 시기는 많이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방산업은 신기술보다는 시간과 신뢰가 더 강력한 변수로 작용하니까요.”

포사이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로 좋은 조건이라면 감히 딴지 걸 생각도 않고 곧바로 수락할 텐데, 눈앞의 교수는 끊임없이 아델라인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여기서 아델라인이, 그리고 공작가가 얻어 갈 이득이 무엇일까. 이것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 한 포사이스는 계속해서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는 것으로 그가 떠올린 가설에 부정을 표했다.

“방산업에 뛰어들 생각은 없어요. 물론 이득이 생긴다면 거부하지 않겠지만요.”

“그럼 무엇을 위해서…….”

그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주머니에서 리볼버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포사이스의 눈이 저절로 이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석함에서 고이 모습을 드러내야 할 금장 장식 리볼버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자 당황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잠시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지요.”

아델라인의 허락에도 불구하고, 포사이스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손을 뻗어 리볼버를 집어 들었다. 학자의 습성이 아델라인을 향한 경계심보다 훨씬 강했는지, 이내 포사이스는 기계부를 조심스레 조작해 보며 관찰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다시 그의 시선이 아델라인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의심이 섞여 있는, 그리고 훨씬 복잡하진 눈빛이었다.

어느 정도 식은 차를 홀짝이며 그의 시선을 받아 낸 아델라인은 자신의 본론을 꺼냈다.

“퍼커션 캡 기술을 적용한 리볼버를 제작해 주세요. 최대한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러자 포사이스의 눈동자에 혼란이 깃들었다.

“리볼버, 말이십니까?”

“네.”

“용도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포사이스의 입에서 예상했던 질문이 나오자, 아델라인은 생각해 두었던 답을 내놓았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의심을 어느 정도 불식시킬 수 있을 정도의 답을.

“제게 소중한 사람이 지금 군에 복무 중이에요. 위험한 임무에 계속 투입되니까…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도움이 되고 싶다라…….”

아델라인의 눈동자를 주름진 눈으로 바라본 포사이스. 번뇌에 잠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그는 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사.”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델라인은 그의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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