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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118화 (118/200)

118화 아물어가는 상처

해가 저물고, 막사의 병사들과 종군 가족들도 하나둘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다른 이들이 각자의 천막으로 찾아가는 것과 달리, 알렉스의 발걸음은 공용 천막들 한가운데에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그 막사 앞에 다다른 알렉스는 발걸음을 서두르느라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뒤, 안에 있을 던컨에게 제가 왔음을 알렸다.

“중령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거라.”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타닥타닥 마른 장작을 태우며 공기를 데우는 난로의 온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알렉스의 살갗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안경을 쓴 던컨은 책상에 앉아 이면지에 동그라미와 빗금을 번갈아 치고 있었다. 번호와 함께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문장이 이면지의 뒷면을 수놓고 있었다. 알렉스보다 어린 소년병들의 받아쓰기 시험지였다.

“차를 좀 끓여 주겠니? 채점이 아직 안 끝나서 조금 시간이 걸리겠구나.”

“네, 알겠습니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난로 위에 찻주전자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양철통에 담긴 덖은 솔잎을 찻주전자 안에 넣었다. 그사이, 던컨은 지금까지 채점한 시험지를 책상 한편에 밀어 두며 알렉스에게 말을 건넸다.

“부친께서 꽤 많은 것을 알려 주시려 하는 것 같더구나. 머스킷을 다루는 건 많이 익숙해졌니?”

“부끄럽지만 아직은…….”

알렉스의 말에, 던컨은 채점을 계속하며 입을 열었다.

“무기에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단다. 낫이나 삽, 망치 같은 도구들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지만, 무기는 오로지 사람을 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니까.”

그는 채점한 시험지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수첩에 기록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오히려 그런 무기에 쉽게 익숙해지는 게 이상한 것이겠지. 특히 너희 같은 어린 애들이라면. 무기라는 게 사실 성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잖니?”

그는 시험지를 모아 탁탁 가지런히 정리한 뒤 난로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금세 불이 옮겨붙은 시험지들은 빠르게 타올랐다. 그사이 알렉스는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런 점에서 보면, 총이라는 물건은 어쩌면 생기지 않는 게 좋았을지도 몰라. 결국에는 너희들 같은 어린이도 전쟁에 끌려 들어오게 되었으니. 뭐…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지.”

던컨은 허허, 웃은 뒤 솔잎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한층 온화해졌다.

“좋아, 목도 축였으니 오늘도 이야기를 해 보자꾸나. 전에는 무슨 주제로 이야기했더라?”

“어제는 미적분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아, 그렇지. 너 이번 주말까지 내가 준 기하학 증명 문제 풀어내야 하는 거 알고 있지? 하고 있어?”

“아직 한 문제밖에 못 했습니다. 나머지는 조금씩 시도해 보는 중입니다.”

“그나마 잊지 않았다니 다행이네. 자, 그러면 오늘은 머리도 식힐 겸 역사 이야기를 해 볼까.”

“역사요?”

“그래. 자 저기 앉거라. 저번에 전 황제 즉위 직전까지는 이야기했었지?”

“네, 황위 계승자 결정 과정에서 많은 암투가 벌어졌다고.”

“그래, 덕분에 제국은 한때 크게 휘청였지. 황제가 즉위했다고 해도, 내부의 혼란은 계속되었고 그 틈을 타 프랑크 왕국이 크게 세력을 넓혔거든. 자, 저번에 내부 분란을 잠재우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했었지. 기억나니?”

“네, 내치에 집중하거나… 아니면 외부의 적으로 총구를 돌리던가.”

알렉스의 답에, 던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때 꺼내든 게 자연 국경론이지. 황권 신수설과 함께 들고나온 이 논리로, 황제는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을 시작했어. 처음에는 순순히 목표를 달성했지.”

던컨은 차로 입술을 축인 뒤 말을 이어 나갔다.

“처음에는 효과가 좋았어. 평민 자본가들에게 힘을 실어 주어 지지를 끌어낸 결과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었지. 그 힘으로 지형지물에 의지한, 지금의 안정적인 국경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지. 하지만, 뜻하지 않은 효과가 일어나게 되었단다. 무엇인지 아니?”

“몇 가지 떠오르는 게 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알렉스의 말에, 던컨은 손으로 3을 나타내며 알렉스에게 질문에 대한 답을 설명했다.

“크게 세 가지란다. 자본의 이동, 평민들의 정치 세력화. 그리고 전제 군주제에 대한 의구심이란다.”

그는 찻잔을 들어 차를 홀짝인 뒤 알렉스를 향해 질문했다.

“지금 쓰고 있는 머스킷의 제작사가 어디인지 아니?”

“스틸웰 공업 아닌가요?”

“그래, 스틸웰 공업. 그 시작에는 헨리 스틸웰이라는 기술자이자 사업가가 있었단다. 처음으로 분업 체계를 고안하고, 이를 적용해 전쟁에 쓰일 군수품을 공급했던 사람이지. 그때는 비스킷과 군복, 천막 같은 단순한 물건을 생산하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단다.”

“그렇군요.”

“스틸웰 공업은 일부에 불과해. 귀족들이 가문 간의 복잡한 관계에 얽히고 고지식한 사고방식에 갇혀 구태의연하게 수백 년간 유지된 봉건 시대의 자산 운용을 반복하고 있을 때, 평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빠르게 그 힘을 키워 나갔지.”

그는 송금환을 꺼내 흔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송금환, 어음, 주식, 채권, 선물과 옵션… 지금 수도에서 벌어지는 돈놀이의 기반은 다 전 황제의 비호를 받아 기틀을 잡은 것이란다. 자, 그렇게 돈이 모이니 귀족들은 점점 평민들에게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겠지? 돈은 곧 힘이니까.”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던컨은 송금환을 집어넣은 뒤 하품을 내뱉었다. 찔끔 나온 눈물을 훔친 그는 차로 입술을 적시고 말을 이어 나갔다.

“일부 귀족들은 다시 황제의 밑으로 기어들어 가는 한편, 신분의 우위를 이용해 평민 자본가를 억누르려 했어. 황제는 귀족과 평민 자본가의 충성 경쟁을 기대했지. 하지만, 평민들은 다르게 생각했어.”

“왜요?”

“답은 의외로 간단해. 봉건제에서 귀족들의 영지와 신분은 누구에게 받는 거지?”

“황제요. 납세와 군역을 제공하고, 대신 징세와 사법, 행정을 비롯한 다양한 권한을 시행할 수 있는 영지를 할당받죠.”

“그렇지, 잘 기억하고 있구나. 하지만 평민 자본가는 어떻지? 그들의 재산은 황제가 내려 준 건가?”

“아…니요?”

“그 차이점이, 평민들이 황제의 총애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단다. 자신의 노력과 지혜로 얻은 부를, 또 다른 전쟁을 외치는 황제에게 수탈당하고 싶어 하지 않았지. 물론 그때 당시는 저항할 방법이 없으니 잠자코 당했지만.”

던컨은 천천히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 때문에 한 사람이 권력을 쥐고 흔드는 전제군주제를 향한 의구심은 평민 계층과 일부 귀족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확산되며 새로운 정치 세력이 되었단다. 그 상황에서, 아부에 취해 버린 황제는 영토 확장을 위해 군대를 일으켰지.”

“그 군대가…….”

“회군하고, 전쟁광 황제를 축출한 뒤, 쥐죽은 듯 지내던 한량 황자, 니콜라이 3세를 옹립하고 제국 의회를 소집했지. 그 제국 의회가, 지금까지 이어져 지금의 입헌군주제를 이루게 되었단다.”

던컨의 말에, 알렉스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던컨은 미소를 지으며 어느 정도 미지근해진 차로 메마른 목을 축인 뒤 잔을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단다. 매닝햄 중사와 부인에게는 물어봤지만, 역시 당사자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니까.”

그는 천천히 알렉스의 푸른 눈을 바라봤다.

“내가 너의 대부가 될까 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갑작스러운 말에, 알렉스는 그만 굳고 말았다. 예상했던 반응인 듯, 던컨은 반쯤 빈 잔에 다시 차를 따르며 알렉스에게 시간을 주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알렉스는 던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무얼. 대부가 된다고 해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그래도 원하는 길을 나아갈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마.”

그는 알렉스를 향해 따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식을 집행할 사제와 그 자리에 함께해 줄 입회인들을 청했다. 3월 중에 정식으로 절차를 거치고 너를 대자로 삼을 예정이다. 그러니까…….”

던컨은 알렉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맑은 푸른빛 눈동자를 바라봤다.

“조금만 더 기다리거라, 곧 교대 병력이 오면 후방으로 재배치 될 테니. 그리고…….”

그는 테이블 위의 지도를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전쟁도, 곧 끝날 테니까.”

* * *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낸 알렉스는 천천히 눈을 뜨며 창밖을 바라봤다. 이게 뭐라고 지금까지 품고 있었을까. 한 번 털어놓고 나니, 어째서인지 마음은 훨씬 편해져 있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아델라인을 바라보자, 그녀는 연신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훌쩍이고 있었다. 순간 알렉스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너무 자신의 이야기만 한 건가 걱정하며 어떻게 분위기를 풀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아델라인은 양팔로 그를 끌어안았다. 마치 그동안 삶에 치여 눈물 한번 쉬이 흘리지 못했던 알렉스를 대신해 울어 주듯, 그녀는 눈이 새빨갛게 변하도록 울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알렉스는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두 팔로 감싸 안아 주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해 줘서 고마, 히끅!”

그녀의 입에서 말을 끊으며 튀어나온 딸꾹질 소리에, 아델라인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녀는 숨을 참으며 딸꾹질을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딸꾹질은 멈추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알렉스의 얼굴에 웃음꽃이 살짝 피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그를 밀치고 민망한 탓에 괜히 화를 내려 했지만, 그녀가 말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절묘하게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결국, 알렉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한껏 얼굴이 달아올랐던 아델라인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그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은 끝에, 어느새 딸꾹질이 멈춘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해 줘서 고마워요, 알렉스.”

그러자 알렉스는 슬며시 귀를 붉히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저도. 고마워요.”

그는 눈을 꼭 감았다가 아델라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최고의 생일 선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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