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116화 (116/200)

116화 제안

“…….”

아델라인은 입을 닫을 수 없었다. 어떻게 피오나의 손에서 원작의 책이 나오는 거지.

“제가 한번 생각을 해 봤어요. 저는 착실하게 이 책에 써진 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는데, 모든 게 이 책대로 이뤄졌는데.”

피오나는 미소를 지으며 아델라인에게 천천히 자신의 가설을 풀어 나갔다.

“마치 어느 순간, 저만 알고 있어야 할 책의 내용을 다른 누군가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제 계획을 막아 세웠단 말이지요?”

아델라인의 하늘색 눈동자를 바라보는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로 번뜩이고 있었다. 확실한 건 그 눈동자는 아델라인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황후 암살 시도. 분명 보안은 철저했을 텐데, 아델라인은 마치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매닝햄 대위를 끌어들여 막았었고요.”

피오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알고 있었죠? 황후는 그날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한다는 것을.”

“…그렇다고 한다면?”

아델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피오나를 바라봤다.

“내게 원하는 게 뭐지? 나보고 사라져 달라, 이건가?”

그러자 피오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동안 웃어 젖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아델라인도 알잖아요.”

피오나는 손에서 기묘한 보랏빛을 만들어 내며 아델라인에게 다가왔다.

“아델라인은, 피오나에게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다 황태자에게 버림받고 세이드의 손에 목숨이 끊어지는 악녀라는 것을.”

“…….”

“매닝햄 대위는, 황태자와 피오나의 위기에도 돕기를 거부하고 반란군의 압도적인 군세에 저항하다가 파견 중대와 함께 허망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피오나의 입에서 알렉스의 최후가 풀어져 나오자, 아델라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동요하는 아델라인의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피오나는 천천히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역시, 알고 있는 거죠?”

“하지만 황후는 살았고, 나는 기사 작위를 받았는걸. 여기가 소설 속 세상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많이 바뀐 것 같지 않아?”

“하지만, 전쟁은 일어났잖아요?”

피오나의 말에, 아델라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물론, 오베른에서 두 강대국이 힘을 합칠 줄은 몰랐지만… 오히려 덕분에 전쟁을 부추기기에는 딱 좋은 상황이 되어 줬지요. 뭐, 사실 양쪽 다 전쟁을 원하고 있기도 했으니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긴 것이겠지만.”

“…….”

“자, 아델라인만 도와주면. 모든 걸 다시 원래 흐름대로 되돌릴 수 있어요.”

피오나는 싱긋 웃은 채 아델라인에게 가까워지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델라인, 아니… 당신도 세이드에 의해 고통스럽게 죽임당하지 않아도 되어요.”

당신.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 바뀐 걸 눈치챈 아델라인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그녀와의 간격을 유지했다.

“아델라인의 몸에 깃들어 있는 이질적인 영혼이, 제 눈에는 보였거든요. 물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려 했다가는 감 좋은 분들에게 들키겠지만.”

덜컥. 아델라인의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자신이 ‘아델라인’이 아니라는 것을 피오나가 눈치챘다. 대체 어떻게 눈치챈 건지 추측할 새도 없이, 피오나는 아델라인을 향해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원래대로 돌려보내 줄 수 있어요. 영혼이 있어야 할 곳으로.”

“그게, 무슨 소리야.”

피오나의 제안에, 아델라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피오나는 아델라인과 눈을 마주치며 조금 더 자세하게 제안을 풀어 냈다.

“그 영혼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어요. 그러면 더 이상, 이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죠. 아델라인의 최후가 어떻게 되든, 당신의 일이 아닌 거예요.”

“…….”

“어때요, 꽤 괜찮지 않아요? 더는 비참한 죽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마치 호의를 베푸는듯한 피오나의 모습. 아델라인은 그녀를 바라보며 질문을 했다.

“알렉스는, 어떻게 되는 거지?”

“신경 쓸 필요 있나요?”

피오나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아델라인의 뺨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자신만 생각하세요, 당신은. 알렉스나 아델라인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는, 저만큼 잘 알고 있잖아요?”

아델라인은 이를 꽉 깨물었다. 비참한 죽음. 소설 속에서 묘사된 아델라인의 죽음을 떠올리자, 피오나의 제안이 더욱 달콤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물러서.”

철컥.

아델라인의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들려온 격철음. 피오나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델라인의 손에 들린 리볼버가 자신의 배를 겨누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죠?”

“뒤로 물러서.”

피오나는 시종일관 유지하던 웃음기를 지우고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그러나 하늘색 눈동자에 맺혀 있는 살기를 보자, 그녀는 순순히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한번 고개를 푹 숙인 뒤 다시 들어 보인 얼굴에는 조소가 묻어 있었다.

“꽤 똑똑한 줄 알았는데 멍청하네요.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기회를 자신의 발로 걷어차다니.”

“네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알렉스는 어디 있어.”

“방아쇠를 당기실 수나 있을까요? 당신 같은 온실 속의 화초가?”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아델라인은 천천히 리볼버를 든 손을 올려 피오나의 심장을 겨눴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총구를 보자, 그녀의 얼굴에 맺혀 있던 조소마저 슬며시 사라지고 말았다.

아델라인은 피오나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렉스를 내놔. 당장.”

그러자 피오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토해 냈다.

“하아아… 이렇게 된 이상, 당신도 제 인형으로 만들어 버려야겠어요. 관리는 힘들겠지만, 그편이 말은 더 잘 듣겠죠.”

말이 끝나자마자 피오나가 한 손에서 마법진을 만들어 내자, 아델라인은 순간 총구를 살짝 틀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리볼버의 부싯돌이 내리쳐지며 정위치에 있던 약실의 화약에 불을 붙였다. 잠시 뒤, 그녀의 오른팔에 묵직한 충격이 가해졌다.

탕.

뿌연 연기가 총성과 함께 응접실 안을 가득 채웠다. 아델라인의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잠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 순간, 알렉스의 목소리가 아델라인의 머릿속에 들려왔다.

‘그러니 만약 피스톨을 써야 할 정도로 상대가 근접한 상황이라면, 한 발자국 옆으로 피해 주세요. 맞추지 못하거나, 맞았더라도 제압을 못 했을 경우를 대비해서.’

언젠가 알렉스가 가르쳐 준 요령. 아델라인은 그 말을 따라 알렉스가 안드레이의 공격을 피했던 것처럼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 순간, 아델라인이 있던 자리에 보라색 빛을 내는 화살이 연기를 뚫고 날아왔다.

아델라인은 벽에 박혔다가 허공으로 흩어지는 화살을 눈에 담으며 약실을 회전시킨 뒤 부싯돌 망치를 당겼다.

잠시 뒤 연기가 조금 옅어지자, 그 사이로 피오나의 모습이 보였다. 피오나의 상체는 점점 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개의치 않는 듯, 그녀는 곧바로 아델라인을 향해 눈을 번뜩이며 몸을 던졌다.

아델라인의 총구가 또다시 피오나를 겨눴다. 충분히 머리나 가슴을 겨눌 수 있는 상황. 하지만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총구를 살짝 틀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눈앞에 또다시 하얗게 연기가 퍼졌다. 아델라인은 또 한 번 몸을 옆으로 틀며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도 보랏빛 화살이 그녀가 있던 자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그에 다시 약실을 돌리고 부싯돌을 당긴 그녀는 발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

잠시 뒤 연기가 걷히자, 바닥에 핏자국만을 남긴 채 피오나는 사라져 있었다. 그러자 아델라인의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어디로 간 거지? 어디로 사라진 거지?

아델라인은 다시 약실을 돌리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부싯돌을 당긴 그녀의 손가락은 어느새 방아쇠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그때, 아델라인의 뒤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해 몸을 돌리고 총구를 겨눴다. 그러나 그녀의 총구는 누군가에게 잡혀 순식간에 위로 들렸다.

탕.

리볼버에서 다시 한번 총성과 함께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델라인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 아무리 아델라인이 힘을 주어도 리볼버는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는 더욱 조급하게 리볼버를 되찾으려 노력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진정해요.”

“…알렉스.”

정신을 차리자, 알렉스가 아델라인의 리볼버를 잡아 위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아델라인의 손에서 리볼버를 빼냈다. 소매 밖으로 언뜻 드러난 그의 손목에는 밧줄로 묶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의 몸에서도 화약의 잔향과 피의 비릿한 냄새가 났다. 아델라인은 급히 알렉스의 몸을 살폈지만, 그의 몸에는 다행히 상처 한 줄기 나 있지 않았다.

그때, 복도의 모퉁이 너머에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소리에, 알렉스는 한 손으로 리볼버를 고쳐잡은 뒤 약실을 확인했다. 남은 탄환은 단 한 발. 그는 곧바로 탄환이 장전된 마지막 약실을 정위치에 돌려놓고 부싯돌 망치를 당겼다.

그리고 아델라인을 자신의 뒤로 가게 한 그는 천천히 모퉁이를 총구로 겨눴다. 손가락은 방아쇠에 걸어 두지 않은 채였다.

그때, 모퉁이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서너 명의 사냥꾼들이 모퉁이를 지나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외쳤다.

“공녀님!”

“무사하십니까!”

그러자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 사람들이에요, 알렉스.”

그러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그에 사냥꾼들도 알렉스를 향해 살짝 겨눴던 무기들을 내렸다. 아델라인은 다시 한번 사냥꾼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모두가 오두막에서 본 얼굴들이었다.

“많은 놈을 잡거나 처리했습니다, 공녀님. 나머지는 도망쳤습니다.”

그 말을 듣자, 아델라인의 몸에 갑작스러운 오한이 짓쳐들어왔다. 알렉스가 무사하다는 안도감이 들자 긴장이 사그라들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을뻔한 아델라인을 알렉스가 붙잡아 일으켰다.

잠시 그녀가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도록 다리에 힘을 줄 시간을 준 알렉스는 그제야 반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아델라인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저, 사람을…….”

아델라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알렉스에게 말했다. 사람을 쐈다. 나무 표적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쐈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가져온 리볼버였지만, 방아쇠를 당기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쏜 탄환이, 누군가를 피 흘리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아델라인의 감정은 끊임없이 요동쳤다.

알렉스는 그녀를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그는 말없이 떨리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행동이 도움이 되었던 건지, 잠시 시간을 흘려보내며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른 아델라인은 사냥꾼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위험할 수도 있어요, 무리하게 쫓지는 말라 하세요. 뒷정리까지 끝나면 넉넉히 보상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공녀님.”

지시를 마친 그녀는 알렉스의 손을 잡았다가 다시 그의 손목을 잡았다. 놓치면 영영 이별하기라도 할까 봐, 그녀의 손에는 한껏 힘이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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