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113화 (113/200)

113화 지나간 과거

알렉스는 홀로 누워 있던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 하늘은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 어두운 푸른색이었다.

어느새 아델라인의 체온에 익숙해진 건지, 알렉스는 허전함을 느끼며 의자 위에 올려 둔 배낭을 바라봤다. 짐은 어제 다 챙겨 두었다. 아델라인에게도 만날 사람이 있다 말해 뒀다.

차라리 모든 걸 말하면 조금 편할까 싶었다. 하지만 알렉스 자신조차 마음속의 짐을 덜어 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델라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슬퍼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제가 온전히 아델라인을 달래 주지 못할 것 같았다.

알렉스는 마음을 다스린 뒤 천천히 배낭을 메고 저택을 나섰다. 마구간으로 향하자 기다리고 있던 마구간지기가 그에게 말 한 필을 내어 주었다. 미리 말을 해 둔 덕인지, 튼실해 보이는 말의 등에는 등자가 미리 얹어져 있었다.

“늦어도 저녁 전까지는 돌아올 겁니다, 말씀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장교님.”

알렉스는 등자에 오른 뒤, 말을 몰아 저택을 나왔다. 길은 탁 트여 있었고, 점점 밝아 오는 아침 햇살이 앞을 비춰 주고 있었다. 그의 앞을 막을만한 장애물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는 말에 박차를 가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곧바로 고개를 휘휘 저은 뒤 박차를 가했다. 마치 남아 있던 미련을 떨쳐 내기라도 하듯, 말은 곧바로 반응해 속도를 높였다.

알렉스의 귀에 바람 소리와 함께 섞여 들려오는 일정한 말발굽 소리는, 어느새 그를 과거의 그때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 * *

푹!

번뜩이는 총검이 천을 뚫고 들어갔다. 수 킬로그램의 질량에서 빚어진 힘이, 그대로 얄팍한 천을 뚫고 안을 헤집었다.

찌르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내지른 총검을 빼낸 아이는 머스킷을 돌려 개머리판으로 방금 찔렀던 자리를 팍! 밀쳤다. 그러자 밀쳐진 상대는 잠시 뒤로 밀려나더니 풀썩,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가슴을 찌르는 게 아니라 배를 찔러라, 알렉스. 가슴을 찌르면 총검을 빼낼 때 갈비뼈 때문에 걸린다.”

그 말과 함께, 허수아비가 다시 세워졌다. 그러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스킷을 고쳐 잡았다. 바닥에 세운 착검한 머스킷은 그의 키보다 조금 더 컸다.

“밑을 찌르고 빼낸 뒤, 위를 밀어서 쓰러트리는 거다. 균형을 잃게 만드는 거지. 봐라.”

알렉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들고 있던 머스킷을 고쳐 잡은 뒤, 허수아비를 향해 몸을 돌렸다.

“흡!”

번뜩이는 총검이 허수아비의 아랫배를 찔렀다. 그다음, 그의 손에서 한 번 회전한 머스킷의 개머리판이 허수아비의 가슴팍을 때렸다. 그러자 허수아비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쿠당탕.

“이런 식으로 하는 거다. 알겠지?”

“네.”

“자, 한 번 더 해 보자.”

그때, 한 장교가 말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두 사람은 동시에 그 장교를 향해 경례했다.

“충성.”

그러자 그 장교는 미소와 함께 경례를 받은 뒤 대화를 텄다.

“충성. 스콧 중사, 오늘도 아들 개인 교습인가?”

“이제 곧 열다섯 살이니까요. 북은 내려놓고 한 사람 몫 할 때가 되었지요, 연대장님.”

스콧은 허수아비를 세우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저번 전투에서도 위태로웠지 않습니까. 고참들도 많이 다치고. 이 애도 언제 총을 들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스콧은 자신의 옆에 있는 알렉스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스콧의 갈색 머리와는 전혀 다른 흑발이었다. 그런데도 그 손길에 담긴 거칠고 투박한 애정은 지켜보는 던컨에게도 오롯이 전해졌다.

“스스로를 지킬 수는 있어야겠지요, 이 전쟁에서.”

“맞는 말이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애들은 살아가야 하겠지. 오래 걸리나?”

리처드의 물음에, 스콧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곧 정리하겠습니다.”

“고맙네, 사실 내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연대에 거의 없어서 말이야. 그러면 저녁 먹고 씻은 뒤 8시까지 내 막사로 오거라, 알렉스.”

“알겠습니다!”

* * *

한 차례 회상을 마치자, 알렉스의 앞에는 갈림길이 놓였다. 알렉스는 ‘이즐링턴’이라고 쓰여 있는 낡은 표지판이 가리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드넓은 숲이 알렉스의 앞에 나타났다. 숲으로 들어가자, 햇빛을 막아 주는 나무들 덕분에 약간 서늘하기까지 했다. 관리가 안 된 지 오래된 울퉁불퉁한 오솔길로 들어서자, 알렉스가 탄 말이 자꾸 앞으로 나아가길 꺼렸다.

“그래, 그래. 여기선 나 혼자 걸어가지 뭐.”

지금까지 고생해 준 말을 달래며 멈춰 세운 알렉스는 등자에서 내린 뒤 각설탕 하나를 입에 넣어 주었다. 그다음 길가를 지나는 조그마한 냇물로 끌고 가 마구를 등에서 내려 주었다. 그러자 말은 시냇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알렉스를 바라봤다.

“오래 안 걸릴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내가 오기 전에 해가 지면 먼저 가고.”

푸르릉.

마치 알아들었다는 듯 사람처럼 대답하는 모습에, 알렉스는 고삐를 놓은 뒤 등자에 매달아 둔 배낭을 챙기고 시냇물로 수통을 채운 뒤 오솔길을 걸어갔다.

한 시간 정도를 걸었을까. 길 양쪽으로 한동안 방치된 민가들이 보였다. 이제는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너질듯한 폐가를 보자, 알렉스의 마음 한편이 헛헛했다.

비록 연대의 종군 가족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이 마을에도 사람이 살았었다. 골목골목마다 어릴 때의 추억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

물론 알렉스가 이 마을에서 보냈던 시간은 많지 않았다. 연대의 고참 간부였던 아버지와 그를 따라다니며 연대의 잡일을 맡아 부업을 하셨던 어머니, 그리고 자신. 이 셋으로 이뤄진 단출한 가족이었기에 어디로 파견을 가든 항상 같이 다닐 수밖에 없었다.

기간이 어떻든 이끼가 끼고 한쪽 지붕은 내려앉은 고향 집을 보는 건 결코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알렉스는 발걸음을 옮겨 뒷마당으로 향했다.

[스콧 매닝햄.

밀리아 매닝햄.]

두 사람의 묘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저번에 방문했을 때 이끼를 걷고 잡초를 뽑았지만, 수년의 시간은 그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알렉스는 허리춤에서 총검을 뽑아 들고 주변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잡초를 뽑고 이끼를 거두자 그나마 조금 깔끔해진 느낌이 들었다. 알렉스는 어제 산 향초를 들고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다.

향초가 타오르자, 알렉스는 어머니의 묘비 앞에 내려놓은 뒤 천으로 만든 국화꽃을 옆에 두었다. 그다음 여송연을 꺼내 끝부분을 잘라낸 뒤, 향초의 불로 가져가 붙였다. 불을 붙인 여송연은 천으로 만든 양귀비꽃과 함께 아버지의 비석 앞에 놓았다.

“그동안 못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알렉스는 그 앞에 앉아, 마치 대화를 나누듯 말을 이어 나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특히 몇 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는 금속 플라스크를 열어 아버지의 묘비에 위스키를 천천히 부었다. 그다음 풀밭에 털썩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제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아직 앞에서 말은 못 했지만.”

반 정도 비워졌을까, 알렉스는 금속 플라스크를 입으로 가져갔다. 위스키가 알렉스의 입 안을 엷게 코팅했다.

“…사실 무섭습니다. 제가 먼저 아델라인 곁을 떠날까 봐. 그래서 어물쩍 넘기고 있었는데, 한 달 전 즈음인가 먼저 제게 사랑한다고 하더라고요.”

알렉스는 쑥스러운 듯 허허, 웃음을 흘리곤 말을 이어 갔다.

“그러고도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나 봅니다. 분명 아버지가 보셨으면 개머리판으로 뒤통수를 후려치셨을 것 같네요. 한심한 자식이라고.”

그는 한 번 더 플라스크를 입으로 가져갔다. 아직 취기도 안 올라왔건만, 마음속에 있는 말들은 술 한 병을 들이킨 듯 줄줄 새어 나왔다.

“어떻게 결혼하신 겁니까, 두 분은. 저는 무서워서 못 하겠던데.”

답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알렉스는 플라스크를 또 한 번 입으로 가져가다,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플라스크의 뚜껑을 닫았다.

“연대장님도 찾아뵈어야 하니까,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번에는 함께 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본가가 이쪽이더라고요, 보니까.”

알렉스는 천천히 일어나 뒷마당을 나왔다. 폐허가 된 마을을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완전히 폐허가 된 서던 퓨질리어 연대의 막사가 나타났다.

부대가 해산된 막사 건물 뒤로 넘어가자, 양귀비 꽃밭에 둘러싸인 거대한 비석들의 병풍이 나타났다. 전사자들의 관등 성명과 생몰년이 기록된 비석들은 때마침 꽃을 피운 양귀비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병풍 앞에 박힌 보통 크기의 비석으로, 알렉스는 천천히 다가갔다. 서던 퓨질리어 연대의 전사한 연대장은 단둘이었다. 제1대 연대장과 제13대 연대장. 알렉스는 양귀비꽃을 피해 13대 연대장의 비석 앞에 앉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연대장님.”

역시 답이 돌아올 리는 없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그의 앞에서 한 병의 진을 꺼내 놓으며 비석을 향해 말했다.

“일단 한 잔 받으시지요.”

그는 천천히 진의 뚜껑을 열어 비석 앞에 뿌린 뒤, 병의 주둥이를 제 입으로 가져갔다. 위스키와는 달리 은은하고 상쾌한 허브와 솔잎 향이 코를 간질였다.

“어릴 때는 그냥 럼 좀 덜 타고 설탕 더 넣은 그로그가 좋았는데, 술 다양하게 마셔 본 지금도 진은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려.”

그는 진으로 입술을 적신 뒤, 다시 뚜껑을 닫고 비석 앞에 가져다 놓았다.

“거긴 좀 편하십니까?”

그는 천천히 한숨을 푹 내쉬며 비석을 바라봤다.

“진짜, 쓸데없는 데서 고집이 세셔서. 이게 뭡니까. 여기에 남은 사람들은 어쩌라고 그리 많이도 함께 데려가셨습니까.”

알렉스는 푸념을 늘어놓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처절하게 자리를 지켜도, 사람들은 우리를 결국 잊어버리덥니다. 다 닳아 버린 톱니바퀴에는 신경도 쓰지 않더군요.”

그는 가방을 뒤적인 뒤, 밑바닥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알렉스가 받았던 마지막 생일 선물이었던 한 모험가의 모험 일지를 엮은 책의 신간이었다.

“그 모험가 양반, 이제는 신대륙 횡단했답니다. 그 양반은 무슨 10년 단위로 신권을 낸대.”

알렉스는 비석에 책을 기대 놓은 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에, 알렉스는 어깨의 홀스터에서 피스톨을 뽑아 들었다.

탕.

총성이 울려 퍼졌다.

조용히 냇가 근처의 풀을 뜯고 있던 말은, 그 즉시 자신이 왔던 길을 되짚어 달리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