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낡디 낡은 한 권의 책
알렉스와 같이 밤을 보내고 난 뒤, 두 사람은 하루걸러 하루 같은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 뜨거운 밤도 있었지만, 잔잔한 밤이 더 많았다. 어느덧 알렉스의 침대에는 두 개의 베개가 놓여 있게 되었다.
보통 먼저 잠드는 건 알렉스였다. 아델라인과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다가도, 베개에 머리를 대기만 하면 순식간에 잠들고 말았다. 그녀는 구태여 깨우지 않았다. 자신의 곁에서 맘 편히 잠든 알렉스를 보면, 장난을 치고 싶다가도 그저 손을 잡은 채 그의 얼굴을 구경하는 데 그칠 뿐이었다.
그렇게 잠이 들고 다시 깨어나면, 알렉스는 침대맡에 앉아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자신 앞으로 온 편지를 읽거나 총기를 손질하거나, 아니면 낡은 책을 읽던가.
그 모습이 보기 좋아 소리도 내지 않고 지켜보고 있으면, 마치 눈이 하나 더 달린 것처럼 시선을 느끼고는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알렉스가 그녀보다 늦게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2월을 나흘 남긴 오늘까지도.
아델라인은 잠든 알렉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평소와 달리,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잔뜩 맺혀 있었다. 아델라인은 허겁지겁 소매로 그의 이마를 닦아 줬다. 그러던 중, 그녀의 눈에 알렉스의 베개 아래 깔려 있는 책이 들어왔다.
낡디낡은 책. 아델라인이 조심스레 책을 빼내자, 책의 제목마저 손때가 묻고 바래져, 일부가 지워진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레 표지를 넘기자, 표지 뒤의 빈 공간에 적힌 글씨가 눈을 사로잡았다.
[열다섯 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리처드 C. 던컨.]
짤막한 문장 아래 적힌 날짜를 본 아델라인은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계산을 이어 나갔다. 햇수로는 14년 전… 계산을 끝마치자, 아델라인의 눈이 놀란 듯 번뜩 떠졌다.
“……!”
3일. 3일밖에 남지 않았다. 알렉스의 생일이.
아델라인의 머릿속이 세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알렉스의 베개 밑에 책을 다시 넣어 둔 아델라인은 자신의 뺨을 찹! 양손으로 쳤다.
그러자 해야 할 일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비록 자신의 생일마저 말해 주지 않은 알렉스가 살짝 괘씸하긴 했지만, 알아 버린 이상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늦잠을 자는 알렉스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침대를 벗어난 아델라인은 옷장 앞으로 향했다. 언제부턴가 그의 옷과 함께 걸려 있는 자신의 여벌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허겁지겁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자신의 방에는 나이아가 먼저 들어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오셨어요, 공녀님?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나이아, 지금 많이 바빠?”
“언제나 비슷해요, 크게 할 일은 없고요. 무슨 일이신가요?”
“알렉스의 생일이 3일 뒤야.”
“…모르고 계셨어요?”
“알고 있었어?”
나이아의 물음에 아델라인이 놀란 눈으로 되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되물었다.
“저는 몰랐죠. 하지만 공녀님은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
“내가 어떻게 알아, 말해 준 적이 없는데!”
“물은 적은 있으시고요?”
“…그게 문제가 아니야. 뭘 준비해야 하지?”
안절부절못하는 아델라인을 보며, 나이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물어보시면 되지 않을까요?”
“알렉스가 순순히 가지고 싶은 걸 말해 줄까? 분명 ‘아델라인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라고 할걸?”
아델라인이 알렉스의 표정과 목소리를 따라 하자, 나이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맞장구를 쳤다.
“하긴, 이미 가장 원하시는 걸 손에 넣으셨으니까요. 아마 다른 건 생각나시지 않을걸요?”
그녀의 말에 얼굴을 붉힌 아델라인은 한숨을 쉬며 침대에 널브러졌다. 알렉스가 좋아할 만한 게 뭘까. 물론 알렉스라면 자신이 무엇을 주든 미소 지으면서 고맙다고 할 테지만…….
“으으으으음…….”
지금 아델라인이 할 수 있는 건 앓는 소리를 내며 뒹굴뒹굴하는 것밖에 없었다. 도저히 뭘 해 줘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물어볼까? 생각해 봤지만, 선물은 역시 비밀로 하는 게 더 설레지 않을까.
“근데 생일은 어떻게 알았어요?”
“알렉스가 읽던 낡은 책. 하도 낡아서 제목도 잘 안 보이더라.”
아델라인은 베개를 끌어와 안으며 이어 말했다.
“리처드 C 던컨이라는 사람이 준 책인가 봐. 누구일까, 그 사람은?”
“…누구라고요?”
나이아가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방금과는 달라진 목소리에, 아델라인은 조심스레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다.
“리처드. C. 던컨.”
“리처드 C 던컨…….”
나이아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새기듯 다시 한번 되뇐 뒤, 다시 원래 목소리로 돌아와 대화를 얼버무려 버렸다.
“아, 이제 슬슬 아침 드셔야겠네요. 먼저 내려가세요. 대위님께는 사용인을 보내 식당으로 안내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어, 나이아는?”
“저는 다른 시녀들이랑 함께 먹을게요, 의논할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그래, 그럼 이따가 보자.”
아델라인은 방문을 나섰다. 그녀가 나간 뒤 테이블 위의 서류를 갈무리한 나이아는 청소를 위해 들어온 하녀를 불렀다.
“달리아,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나이아는 종이에 구체적인 기간을 적어 건네주며 부탁했다.
“저택 동관의 문서 저장고에 지난 신문들이 보관되어 있죠? 혹시 이 기간의 신문이 있다면 제 방으로 가져와 주실 수 있나요?”
하녀는 아무런 의심의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이아의 얼굴에 물든 초조함과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 * *
“…하아.”
눈을 떠 창밖을 바라보자, 하늘 높이 뜬 해가 그를 향해 인사했다. 초봄의 햇살은 알렉스를 재촉하듯 그의 눈을 찔렀다. 결국, 몸을 일으킨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몸을 움직여 침대 밖으로 나오자, 식은땀에 푹 젖은 잠옷이 찝찝했다.
아델라인은 먼저 일어난 건지, 방 안에는 자신밖에 없었다. 잠옷 상의라도 벗기 위해 단추를 풀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위님, 일어나셨습니까?”
“아, 네. 일어났습니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첫날부터 알렉스를 전담해 도와주던 본가의 집사. 그는 문을 열고 한 발짝 안으로 들어와 알렉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공녀님께서도 기다리시는 중입니다.”
“아, 지금 땀을 조금 흘려서. 빨리 씻고 갈 테니 먼저 식사하고 있으라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알렉스의 상태를 본 집사는 고개를 끄덕인 뒤 문을 닫으며 물러났다. 그가 나가자, 곧바로 손님방에 딸린 화장실 겸 욕실로 들어간 알렉스는 한편에 마련된 빨래 바구니에 고이 잠옷을 넣은 뒤 수도를 틀었다.
쏴아. 차가운 물이 머리를 식히자, 그의 머릿속에서 날짜가 떠올랐다. 어느새 그날로부터 14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찾아뵐 때가 오긴 한 건가.”
알렉스는 수도를 잠근 뒤,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맨정신일 때는 안드레이에게 자신의 생일을 말한 적은 없었다. 기억이 끊길 정도로 취했을 때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안드레이가 항상 먼저 뻗어 있었으니 변수에서 제외해도 될 터였다.
아델라인에게도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딱히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고, 다른 이야깃거리가 많았기에 그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었다.
알렉스는 침대맡으로 향했다. 베개 아래 놓아둔 책의 표지 뒤 빈 공간에 적힌 문장을 눈에 담았다. 마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항상 여유가 넘치던 목소리가. 마지막까지도 여유가 넘치던 그 목소리가.
‘잘, 버텼다, 꼬맹이…….’
“…….”
알렉스는 책을 내려놓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델라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을 바라봤다. 다행히 울상은 아니었다. 손가락으로 미소를 만들어 보인 그는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상했던 대로, 아델라인은 식사는커녕 눈앞의 음식을 두고 가만히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먼저 드시지.”
“에이, 같이 먹어야죠.”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식사하는 동안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오늘의 일정이나, 주치의 조언 같은 가벼운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이 몇 번 오갈 즈음, 아델라인이 알렉스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알렉스는 평소에 가지고 싶었던 거 있어요?”
그러자 그는 잠시 멈칫, 한 뒤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아델라인을 바라본 그는 눈을 잠깐 감았다가 뜨더니 미소와 함께 답했다.
“있었죠.”
“있었죠?”
과거형으로 나온 대답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알렉스의 말은 아델라인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은 함께하고 있으니 다른 생각은 안 나는걸요.”
뻔하다면 뻔한 대답.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으며 짓궂은 말을 던졌다.
“이번에는 제가 떠날지도 모르는데요. 그때 가서 후회 안 하겠어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제는 제가 기다려야 할 차례겠죠. 아델라인이 저를 기다려 준 것처럼.”
“…….”
“기다릴 수 있어요, 돌아와 준다면.”
능숙하게 받아치는 알렉스의 말에, 그녀의 얼굴만 벌겋게 열이 올랐다. 그냥 던져 본 말인데, 저렇게 진지하게 답을 하다니. 알렉스다운 답이었다. 그래서 더 설레는 듯했다.
그렇게 어느새 대화는 자연스레 다른 방향으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나이아 이야기, 신년 연회에 있었던 이야기, 슈톨렌에 관한 이야기, 동백나무에 관한 이야기 등등. 알렉스는 계속해서 다른 주제를 꺼내며 대화의 방향을 틀어 버렸다. 그 덕에, 한 번 지나간 대화 주제는 다시 테이블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그렇게 아델라인은 원래 하려던 질문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알렉스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아델라인에게는 행복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