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취중 사고
이른 아침. 눈을 뜬 아델라인은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은 아이보리색이었다.
왜 천장이 아이보리색이지. 분명 자신의 방 천장은 하늘색이었는데.
* * *
어젯밤 저녁, 식사 중 곁들인 와인은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그리 도수가 높은 와인도 아니었기에 한 병을 비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무난하게 식사를 마치려는 찰나, 알렉스가 빈 병을 바라보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남아 있는 와인을 홀짝인 뒤 그에게 질문했다.
“뭔가 부족했어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남아 있는 아쉬움은 쉽게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곁에서 식사 시중을 들던 사용인을 향해 말했다.
“일단 상을 치우고, 부탁했던 걸 들여와 줘.”
“알겠습니다.”
아델라인의 지시와 함께 테이블 위의 접시들이 치워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차례차례 술병들과 얼음 바가지, 그리고 적절한 잔들과 치즈, 말린 과일을 비롯한 몇 가지 안주들이 놓였다.
“같이 제대로 술을 마신 적은 없는 것 같아서요. 한잔할 거죠?”
“오늘 무슨 날인가요?”
“날이긴 날이죠.”
그녀는 방에 남아 있던 사용인들을 물린 다음 알렉스의 앞에 놓인 잔에 위스키를 적당히 따라 주며 말했다.
“알렉스랑 다시 만난 날이요.”
아델라인은 자신의 잔에도 위스키를 붓고 얼음 하나를 넣은 뒤 알렉스를 바라봤다.
“알렉스가 제 곁으로 돌아온 기념으로, 건배 한번 할까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자신의 잔에 얼음을 넣은 뒤 잔을 들었다.
“건배.”
짠.
두 사람의 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맞부딪힌 뒤 각자의 입술에 잔을 가져갔다. 아직 얼음이 충분히 녹기 전이라, 호박색의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자 입 안에서 짜릿한 감각이 퍼졌다.
아델라인은 급하게 치즈로 손을 뻗었다. 정갈하게 한입 크기로 잘린 치즈를 입에 넣자 짭짤한 맛이 퍼지며 다시 입 안이 안정을 찾았다.
알렉스는 혼자 표정을 찡그렸다 펴는 아델라인을 보며 천천히 잔을 기울였다. 저렇게 알기 쉽게 표정이 각양각색으로 변하는 얼굴은 모종의 마성이 있었다. 한 번 보면 쉽게 눈을 떼기 어려웠다. 알렉스는 그녀의 표정을 안주 삼아 천천히 위스키를 음미했다.
그렇게 잔의 수위가 절반 정도로 낮아지자, 얼굴이 화악 붉어진 아델라인이 알렉스를 향해 슬픈 눈을 하며 입을 열었다.
“사시일… 알렉스 위험한 일 하러 간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아델라인은 위스키를 홀짝인 뒤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새 많이 취한 듯, 그녀의 혀는 상당히 꼬여 있었다.
“트레포드에서… 잠깐 자고 일어난 뒤에… 회의하는 게 들렸어요… 작전 전에 선행정찰 나간다고…….”
아델라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술기운이 차오르자, 아무것도 못 하고 알렉스를 떠나보내야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 목걸이도, 그때 산 거 맞죠.”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지금까지 기다려 주고, 이렇게 환대해 주는 그녀에게 이유마저 사라진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알렉스의 사과에, 아델라인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알렉스가 사과하는 것 자체가 마음이 아팠다. 자기도 별다른 수가 없었으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 같아 보기 힘들었다.
“당신이 왜 사과하는데… 당신이… 어쩔 수 없었으면서…….”
갑자기 아델라인이 울자, 알렉스는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다가 아델라인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알렉스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자, 아델라인은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한 번 울고 나자 마음은 후련해졌지만, 반대로 무슨 말을 이어 나가야 할지는 애매해졌다. 결국, 두 사람은 다시 말없이 술잔만 기울일 뿐이었다. 천천히, 처음 따랐던 잔이 비워질 즈음.
“알렉스에게 전 뭐예요, 지금?”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말없이 잔에 브랜디와 얼음을 채웠다. 그는 얼음이 적당히 녹기도 전에 벌컥, 잔을 반 정도 비웠다. 목이 타고, 속이 탔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아델라인을 향한 위협을 없애기 위해 스스로 임무를 맡은 끝에 오베른까지 갔지만, 일을 끝내지 못했다고 곧이곧대로 말해야 하나. 만약 자신이 아델라인을 위해 자진해서 위험한 일을 맡았다고 하면 기뻐할까.
아니다.
아델라인은 오히려 슬퍼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고맙다고 말할 것이다. 자신이 부탁한 적 있냐 같은 모진 말은 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겉으로는 모질게 말하더라도 속마음은 감추지 못할 것이다.
알렉스는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고민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답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알렉스 앞에 놓여 있던 브랜디 병이 주둥이를 잡혀 아델라인 앞으로 옮겨 갔다. 그녀는 잔에 얼음을 넣지도 않은 채 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됐어요, 어차피 표정 보니까 또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아델라인’이라고 하겠지.”
벌컥벌컥.
알렉스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아델라인은 잔을 입으로 가져가 가득 들어 있던 브랜디를 반 정도 비웠다. 취기에 혀가 둔해진 건지, 아델라인은 표정을 잠깐 찡그린 뒤 안주를 먹지도 않고 그를 바라봤다. 느릿느릿 손을 뻗어 알렉스의 멱살을 움켜쥔 그녀는 흐리멍덩해진 하늘색 눈동자로 알렉스를 바라보며 거친 말을 내뱉었다.
“이 쫄보, 겁쟁이, 쪼다, 비겁한 놈.”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거친 단어들에, 알렉스는 잡힌 멱살을 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옆으로 의자를 끌어 옮긴 뒤 알렉스의 바로 옆에 붙어 앉았다.
“편지에는 사랑한다고 실컷 써 뒀으면서 입으로는 뱉지도 못하는 한심한 놈.”
“많이 취했어요, 아델라인.”
알렉스는 서둘러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아델라인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체온이 두 겹의 얇은 천을 지나 그의 몸에 닿고 있었다.
자신도 점점 취기가 올라오고 있는 상황. 여기서 둘 중 하나가 자제력을 잃는다면, 나머지 한 사람도 쉽게 휩쓸릴 것이다. 간신히 이성을 붙든 그가 물컵에 얼음을 담아 냉수를 건네려는 순간.
“그래서 좋아… 아니, 사랑해요. 알렉스.”
아델라인의 두 팔이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뿌리칠 수 있었지만 뿌리칠 수 없는 그 힘에, 알렉스는 순순히 이끌려 갔다.
* * *
아델라인은 급히 회상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온몸 이곳저곳이 쑤시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일어날 힘도 없어, 아델라인은 고개만 겨우 돌려 침대 바깥을 바라봤다.
남성용 셔츠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고개를 간신히 들어 침대 앞을 바라보자, 의자에 걸려 있는 자신의 평상복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반대로 돌려 자신의 오른편을 바라보자,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졌다.
“…나 미쳤나 봐…….”
알렉스의 얼굴을 본 아델라인은 그만 모든 기억을 되찾고 말았다. 그와 함께 본격적으로 몰려온 온몸의 통증과 두통의 합주곡에, 결국 그녀는 일단 부족한 잠을 더 자기로 마음먹었다.
* * *
“…….”
“…….”
잠으로 도피한다 한들, 영원히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 상대가 현실이라면 더더욱. 결국, 눈꺼풀을 찌르는 햇살에 잠이 깨 버린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사람 꼴을 갖출 수 있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같이 늦은 아침을 먹는 중에도, 그 뒤에 홀린 듯이 같이 정원으로 나온 뒤에도. 두 사람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아니, 나누지 못했다. 심지어 눈을 마주칠 수조차 없었다.
아델라인은 저택에서부터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고민에 빠졌다. 어색했다. 너무 어색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지난밤의 기억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머릿속에서 펼쳐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묵언 수행을 계속할 생각은 없었다. 마침 반걸음 앞서가던 알렉스가 동백나무 아래에 멈춰 서자, 아델라인도 걸음을 멈춘 뒤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렉스.”
“아델라인.”
아뿔싸.
알렉스도 똑같은 생각을 한 건지, 그는 뒤를 돌며 자신을 불렀다. 서로가 동시에 상대를 부른 모양새가 되자, 두 사람의 입은 다시 꼭 다물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직 다리가 완전히 낫지 않은 알렉스는 동백나무의 줄기에 몸을 기대며 천천히 앉았다.
“…스읍.”
마치 고통을 인내하는 듯 오른 다리를 펴고 숨을 고르는 알렉스 모습에, 아델라인은 급하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괜찮아요? 의사를 불러올까요?”
아델라인이 걱정하는 얼굴로 다급하게 물었지만, 알렉스는 얼굴을 찡그린 채 말없이 심호흡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까지 맺히자, 아델라인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의사를 불러올게요, 잠깐만… 꺄악!”
아델라인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알렉스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풀썩 알렉스의 곁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델라인이 당황하며 그를 바라보자, 방금까지 호흡을 가다듬으며 식은땀을 흘리던 알렉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뭐예요, 정말.”
아델라인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알렉스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오전 내내 어색했던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실컷 웃어 젖힌 두 사람은 축 늘어진 채 나무에 몸을 기댔다. 쏟아지는 봄볕과 불어오는 봄바람을 한껏 즐기던 중, 그가 입을 열었다.
“아델라인.”
“왜요?”
아델라인이 알렉스를 바라보자, 그는 저 멀리 펼쳐진 풍경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함께 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눈을 질끈 감고 무언가를 결심하듯 숨을 골랐다. 그 모습을 본 아델라인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됐어요, 겁쟁이 씨.”
따스한 봄볕, 그리고 그 봄볕보다 따듯한 알렉스의 체온을 느끼며 아델라인은 나지막이 속삭였다.
“제가 알렉스 몫까지 사랑한다고 말할 테니까, 애쓰지 않아도 돼요.”
아델라인의 말에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뜬 알렉스는 그녀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살포시 기대며 속삭였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