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가주 대리의 명령
“…….”
아델라인은 영지의 집사장이 정리해서 제출한 곡물 장부를 눈으로 스윽 훑어 내렸다. 나이아에게 많은 것을 맡기게 될 테지만, 전체적인 흐름이나 경향성 같은 건 알아 둬야 하니까.
그러나 빼곡한 숫자들과 글자들이 지금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아델라인의 머릿속은 이미 알렉스가 점령한 지 오래였다. 알렉스가 좀 많이 다쳐서 돌아왔다는 상황은 그녀에게 안도감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결국, 아델라인은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델라인의 방 천장은 하늘색 바탕이었다. 잠시 천장에 있는 샹들리에를 보던 아델라인은 자신의 옆에서 같이 장부를 분석하고 있는 나이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알렉스의 방은 어디 있어?”
“서관의 손님방에 있어요. 미리 알아 뒀죠. 오늘 오전에 도착하셨대요.”
“여기가 본관이었지.”
아델라인은 가지고 온 짐에서 화장품 바구니를 꺼냈다. 그중에서 몇 가지를 골라낸 그녀는 바구니를 든 채 침실을 나서며 나이아에게 말했다.
“잠깐 갔다 올게.”
“6시에는 식당으로 오셔야 해요.”
나이아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인 아델라인은 서관으로 향했다. 알렉스의 부르튼 입술과 거칠거칠해진 피부를 떠올리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델라인이 서관으로 들어가자, 맞은편에서는 본가의 주치의가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공녀님.”
“아, 주치의님. 여기는 무슨 일로.”
아델라인의 물음에, 주치의는 약간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이번에 객으로 오신 대위를 진찰했습니다. 몇 가지 드시는 약이 있으시다고 해서 처방도 드렸습니다.”
“약 말인가요?”
“네, 필요한 약재 중 몇 가지는 있기는 한데 많지는 않아 미리 확보해 두려 합니다.”
“많이… 심각한가요?”
아델라인이 걱정하는 얼굴로 물어보자, 주치의는 차트를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드시던 약 같은 경우는 가벼운 진통제와 수면 유도제, 그리고 감기약입니다. 그리 비싸거나 구하기 힘든 약재가 필요하지는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다만…….”
그는 잠시 한숨을 푹 쉬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무릎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전역한 경보병들이 무릎 부상에 취약하다는 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지만, 직접 진찰하는 건 처음이라 상태를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가요?”
“무릎의 주변을 감싸는 근육이나 힘줄에 문제가 생기면 대위의 상태처럼 무릎에 힘이 빠지거나 다리가 뻣뻣해진다고 학술지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연구 케이스가 많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아델라인의 질문에, 의사는 차트를 보여 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복잡한 내용이 이어졌다. 어디가 어떻게 문제가 있으며, 어떻게 그 문제가 통증으로 이어지고 어떤 과정을 거쳐 심화하는지. 주치의가 설명을 해 주었지만, 의학에는 지식이 없는 아델라인의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올 리가 없었다.
“…육군 의무사령부에서도 라이플맨들의 의료 기록은 공유하지 않아서. 야전 병원에서도 별다른 수 없이 깁스를 시켜 후방으로 보낸 듯합니다. 깁스는 풀고 재활 운동 몇 가지를 준비할 예정입니다.”
“그러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뭔가요?”
의사의 설명이 끝나자 아델라인은 곧바로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대체로 냉찜질이 유용하다 알려져 있습니다. 보조에게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오라 지시했고, 무릎에 좋은 약초들로 팩을 만들어 붙여 놓을 예정입니다. 저도 학술지를 다시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럼.”
앞으로의 처방을 알려 준 의사는 먼저 아델라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걸어갔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본 그녀는 부지런히 알렉스가 있는 객실로 향했다.
정확히 어떤 방에 있는지 알지 못해, 몇 개의 문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한 아델라인은 복도 끝 방에 다다라서야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
안으로 들어가자, 잠옷 차림의 알렉스가 한쪽 팔로 눈을 가린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게 보였다. 아마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따가워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겠지.
아델라인은 직접 남향의 창문에 커튼을 드리운 뒤 알렉스의 팔을 눈에서 치웠다. 저와의 재회 후 그 사이 알렉스의 모습은 한결 깔끔해져 있었다. 그녀는 잠시 그의 얼굴을 본 뒤, 바구니에서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피부에 도움이 될만한 화장품 중에서 꽃향기가 난다든지 하는 이유로 알렉스에게 쓰기 어려운 걸 제외하자, 선택지는 확 좁아졌다. 아델라인은 침대 위로 올라와 그의 옆에 앉은 뒤 그의 얼굴을 보며 고민을 이어 나갔다.
고민 끝에, 일단 알로에로 만들었다는 젤을 손가락으로 떠 알렉스의 얼굴에 치덕치덕 발랐다. 수분 보습에 도움이 될 테니, 안 바르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다음에 바를 화장품을 고민하던 찰나.
“…뭡니까.”
“히익!”
자는 줄 알았던 알렉스가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아델라인은 깜짝 놀라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몸이 점점 기울며 침대 아래로 떨어지려는 찰나, 그가 급하게 몸을 일으켜 아델라인의 손목을 잡았다.
“괜찮아요?”
그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몸을 옆으로 옮겨 그녀가 앉을 공간을 내주었다. 그런 다음, 손으로 얼굴에 발린 젤을 조금 걷어 내 만지작거리며 질문을 했다.
“이건 뭐예요?”
“알로에로 만든 젤이에요. 피부에 좋으니까 손대지 말고 있어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순순히 얼굴로 가져갔던 손을 내렸다. 그사이 아델라인은 더 할 게 있나 싶어 바구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나 애초에 아델라인을 위해서만 꾸렸던 바구니인 만큼, 남성에게 쓸 수 있는 화장품은 방금 그 하나가 끝이었다.
아델라인은 화장품 바구니를 침대 아래에 내려놓은 뒤 알렉스의 옆에 누웠다. 한 번 누우니, 편안함에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잠이 오는 것도 아니라서, 그녀는 멍하니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봤다. 알렉스의 방 천장 색은 아이보리색이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르고.
“많이 추웠나요?”
아델라인이 먼저 입을 열자, 알렉스도 따라서 입을 열었다.
“…추웠습니다. 그래도 버틸 만은 했어요.”
“진짜요?”
아델라인이 몸을 틀어 알렉스를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눈이 오면 덜 춥잖아요? 거의 일주일 넘게 눈이 내릴 때도 있었거든요, 프룬츠베르크에서는.”
“일주일 넘게 나요?”
“그 지경까지 되니까 눈 치우기 바빠서 서로 싸울 엄두는 안 나고… 그래도 덕분에 식수 걱정은 없었네요. 아델라인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저는 뭐. 일했어요, 수도에서. 며칠 전에 마일즈 의원께서 대연정 내각의 부수상으로 내정되기도 했고, 영지에서 할 일이 있다고 해서 잠시 내려온 거예요.”
“할 일이요?”
“네, 영지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곡물을 빼돌리거나 사 모으는 집단이 있으면 징계하고 곡식이 부족해질 것 같으면 배분하라고. 그래서 가주 대리 권한도 얻었어요.”
“중요한 일이네요, 곡식 가격이 많이 올랐고, 앞으로도 오를 테니까. 도와줄까요?”
“도와주기는. 이 다리 상태로 어떻게 도와줄 건데요.”
“뭐, 여기서 밥값은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뭘 시켜도 1인분은 할 텐데.”
“가만히 있어 주는 게 밥값 하는 거예요. 괜히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더 안 좋아지지 마시고. 그리고 밥값은 이미 받았고요.”
아델라인은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의 아쿠아마린을 꺼내 보였다. 그녀가 자신이 선물한 목걸이를 걸고 있는 걸 보자, 알렉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졌다.
쇼윈도 너머로 볼 때 생각했던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아델라인의 목에 걸린 펜던트는 황후가 선물로 건넨 베른하르트 공방의 목걸이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
이렇게 잘 어울릴 것 같았으면, 괜히 직접 주겠다는 고집부리지 말고 빨리 착용할 수 있게 우편으로 부쳤을 텐데. 작전 중에 목걸이를 잃어버리기라도 했다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그때, 아델라인이 그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이건 어쩌다가 산 거예요?”
“그때 베른하르트 제 목걸이 사건, 기억해요?”
“기억하죠.”
“그때 아델라인한테 왔었던 목걸이의 복제품을 한 보석상에서 팔고 있더라고요. 남부 대화재 때 귀금속은 다 팔아 버렸잖아요?”
신경 써 주고 있었구나, 본인도 힘든 임무를 앞두고 있었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자, 아델라인의 손은 저절로 자신의 눈동자 색을 닮은 아쿠아마린을 소중히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하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생각도 나고, 선물 하나 사 가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그 옆에 있는 목걸이로 골라 왔어요. 황후가 보낸 목걸이랑 같은 목걸이는 조금 꺼릴 것 같아서요.”
알렉스의 귀는 어느새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아델라인의 미소를 본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쑥스러운 마음에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래는 수도로 돌아가서 전해 주려 했는데, 일이 꼬여서. 그래도 잘 받았다니 다행이네요.”
그러다가 알렉스가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자 아델라인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의 미소에 담긴 마음이 따듯하게 자신을 감싸 오는 게 느껴져, 가슴 한편이 간지러웠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난 뒤, 괜스레 그에게서 몸을 돌려 기지개를 켜 보였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도 붉어진 얼굴을 그대로 알렉스에게 보여 주는 건 아직도 부끄러웠다.
“무릎이 나을 때까지는 여기에서 같이 밥 먹어요, 식당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이런 건 조금 움직여야 낫는데.”
“어허. 가주 대리의 명령입니다. 이 영지에 있는 한 제 말이 곧 법이라고요. 제 허락 없이는 이 방에서 나가는 것도 금지예요.”
아델라인은 에헴, 소리를 내며 알렉스를 향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이것저것 트집 잡으며 그녀를 놀리고 싶어졌지만, 그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아델라인에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가주 대리님.”
그는 누운 채로 아델라인을 향해 거수경례를 해 보였다. 마치 병정 인형 같은 뻣뻣한 경례와 힘줘서 굳힌 얼굴이 우스꽝스러워 아델라인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자, 알렉스도 손을 거두며 함께 웃었다.
함께 있으니, 별거 아닌 일에도 웃게 되는 건 착각일까. 알렉스는 쉽사리 웃음을 그치지 못하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잠시 뒤, 겨우 웃음을 그친 아델라인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방을 나섰다.
“그러니까, 누워 있으세요. 곧 다시 올게요.”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객실을 나섰다. 저번에 알렉스가 무슨 음식을 좋아한다고 했더라. 그녀는 한참 전에 그와 대화를 나눴던 기억을 더듬으며 동관의 주방으로 향했다.
몇 달 만에 함께하는 식사니까, 모자람 없는 한 끼를 준비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