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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108화 (108/200)

108화 연두색과 함께 찾아온 진녹색

하루 정도 남쪽으로 내려왔을 뿐인데, 마차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은 눈에 띄게 변했다. 나무들은 새순을 하나둘씩 틔우고 있었으며, 들판에는 밝은 연두색이 곳곳에서 세를 넓히고 있었다.

아델라인은 여관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들판의 한적한 풍경을 응시했다. 매일 나무로 둘러쳐 있는 마당만 보다가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들판을 보자 속이 저절로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공녀님, 들어갈게요?”

나이아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들어와.”

그러자 나이아는 쟁반을 한 손에 든 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쟁반에서 아침 식사가 담긴 그릇들을 내려놓으며 아델라인에게 말을 걸었다.

“로피츠 공작가의 영지에 가 보는 건 처음이네요. 분명 아름다운 곳이겠지요?”

“그렇지.”

사실 아델라인도 공작가의 영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몰랐다. 소설 속에서 공작가의 영지를 비춘 횟수는 몇 번 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그 장면들도 영지가 어떻게 생겼나를 보여 주는 것보단 아델라인의 패악질로 엉망진창이 된 영지의 저택 침실만을 비췄었다.

그런 점에서 비춰 보면, 아델라인은 나이아와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더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나이아는 처음으로 가 보는 거니 길을 잃거나 저택의 구조를 몰라도 주변 사람이 이해하겠지만, 아델라인은 아니었다.

적어도 어린 시절을 저택에서 보냈다는 서술이 있었으니, 저택에 대해서 생소한 모습을 보이면 분명 영지의 사용인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

아델라인은 속으로 걱정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함을 유지한 채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 뒤에는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아침은 쌀쌀했지만, 따듯한 햇살 아래에 있으니 그리 춥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아델라인은 햇살을 잠시 만끽한 뒤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마차 행렬은 지금까지 왔던 여정을 이어 나아갔다. 중간에 여관에서 포장한 도시락을 먹으며 서너 시간을 달리자, 길가의 한 표지판이 그들을 맞았다.

[여기서부터는 로피츠 공작령입니다]

“이제 거의 다 왔네.”

“여기서 좀 더 들어가야 하지 않나요? 지도를 봤을 때는 공작령 내부도 좁지 않던데.”

나이아의 물음에, 아델라인의 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녀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나이아의 질문에 답했다.

“뭐, 지금까지 온 길에 비하면. 그렇다는 거지.”

“그렇긴 하네요. 남쪽으로 내려오니 진짜 봄기운이 피어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나이아는 그녀의 태도에서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고 창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길가의 많은 나무가 새순을 틔우고 있었고, 어떤 나무는 벌써 여린 연두색 잎을 펼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봄의 따듯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자 아델라인의 마음속 한편에서 허전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목에 걸린 펜던트를 잡아 옷 밖으로 꺼내 보였다.

하늘색 아쿠아마린이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을 받아 반짝 빛났다. 누가 봐도 아델라인의 하늘색 눈동자와 꼭 닮은 아름다운 보석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트레포드보다 북쪽에 있는 지역에서 추위를 견디며 일하면서도 자신을 생각해 줬다는 게, 정말 고마우면서도 마음 아팠다.

다시 목걸이를 옷 안으로 넣은 아델라인은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자 강가를 끼고 있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저택이 보였다. 주변을 두르는 생나무 울타리를 빼면 언덕 아래에 자리 잡은 읍내와 저택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는 사이, 아델라인이 탄 마차는 언덕을 올라 저택 앞에 다다랐다. 그러자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사용인들이 그녀를 맞았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공녀님.”

수도에 있는 저택의 집사장과 비슷한 연배의, 하지만 조금 더 유한 눈매의 남성이 고개를 숙이며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걸 도왔다.

“고마워요, 그리고 오랜만이에요.”

아델라인이 따라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하자, 집사장은 놀란 기색을 살짝 내비쳤다. 뭐지? 뭐가 잘못된 거지?

그때, 아델라인은 소설 속 아델라인에 대한 서술을 떠올렸다. 아, 마음에 안 드는 사용인들에게 패악질을 부리는 게 일상이었다고 했나…….

그러나 자신은 빙의 전 아델라인처럼 패악을 부릴 생각은 없었고 부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집사장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피곤해서 방에 들어가서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

“공녀님과 수도의 사용인들을 위해 방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쪽의 집사를 따라가면 됩니다. 월터, 안내해 드리도록.”

집사장의 지시에, 젊은 집사가 고개를 끄덕인 뒤 아델라인을 안내했다. 저택의 내부 구조는 수도와 비슷했다. 차이점이라면 전체적인 건물의 크기나 내부 공간의 크기가 조금씩 더 크다는 점. 수도와 달리 벌써 조금씩 꽃이 피기 시작한 건지, 복도의 화병에는 싱그러운 꽃들이 꽂혀 있었다.

계단을 한 층 올라 아델라인의 방에 도착하자, 남쪽으로 트인 창문은 강가의 조그마한 부두와 정원을 한껏 보여 주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정원 한편에 자리 잡은 동백나무였다.

한껏 붉은 꽃을 틔운 그 나무는 이 저택이 자리 잡기 전부터 언덕에 뿌리를 내린 건지, 그늘에 서서 강가를 바라보는 검은 머리의 남자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컸다.

“…잠깐.”

아델라인은 창문을 밀어 열고 발코니로 나갔다. 눈 위에 손을 가져다 대고 동백나무를 바라보자, 넓게 펼쳐진 나무의 그늘에 서 있는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의 색이 눈에 들어왔다.

진녹색. 동백나무의 꽃과 잎에 가려 쉽사리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분명 진녹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수십 번을 봐 오고 수백 번을 떠올리며 그리워했던 낡은 진녹색이었다.

아델라인은 곧바로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불확실한 의심을 담은 느릿한 발걸음은 복도를 반쯤 지났을 때는 기대감에 찬 빠른 걸음이 되었고, 계단을 앞두고 있을 때는 간절함을 담은 뜀박질이 되어 있었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가 1층의 뒷문으로 나왔을 땐 이미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몸은 계속 앞으로 달려갔다.

그때, 그 남자가 뒤로 몸을 돌렸다.

눈 밑에 진 다크서클, 제대로 면도하지 못해 수염이 까슬까슬하게 나 있는 턱, 매서운 찬 바람으로 인해 거칠어진 피부, 건조한 겨울의 날씨를 거치며 부르튼 입술, 부목을 대고 있는 오른쪽 다리와 그걸 보조하기 위해 짚고 있는 목발.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급하게 달려와 숨이 차고 시야가 흐려졌지만, 놀란 듯 크게 뜬 눈에 박힌 깊고 푸른 눈동자만큼은 정확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델…….”

와락.

미처 한마디 말을 하기도 전에, 아델라인은 몸을 던져 알렉스의 몸을 와락 껴안았다. 그녀가 안겨 오자, 알렉스는 목발을 놓치며 이제 막 싹을 틔워 바닥에 펼쳐진 풀밭 위로 아델라인과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등으로 넘어졌지만, 풀밭은 푹신하게 알렉스의 몸을 받아 냈다. 그 와중에도 아델라인의 손은 알렉스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알렉스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말없이 그를 꽉 껴안을 뿐이었다. 그 포옹에서, 알렉스는 그녀가 수개월간 품고 있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연락이 닿지 않던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을 얼마나 걱정했는지. 그 모든 감정이 자신을 안은 그녀의 가느다란 팔에서 나오는 힘을 통해 느껴졌다.

아델라인을 달래 보려 머리 위에 손을 얹으려던 그의 귀에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그리 서러운 건지, 아델라인의 나지막한 흐느낌은 끊어질 듯 말 듯 계속 이어졌다.

“흐으으… 내가 진짜… 정말…….”

흐느낌에 묻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재회에서 온 놀람, 그래서 더욱 강하게 터져 나오는 반가움, 그리고…….

무사히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 그에게서 느끼는 안도감.

그 모든 감정을 읽어 내리며 잠시 멍하니 아델라인을 바라보던 알렉스는 두 팔로 아델라인의 몸을 감싸 안았다.

“슈톨렌, 맛있었어요.”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뒤에 덧붙였다.

“일이 꼬이는 바람에 이곳으로 오면서 밥 대신 나눠 먹게 되었지만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리고 다리는 왜…….”

그녀의 물음에, 알렉스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매만지며 질문에 답했다.

“발을 삐끗하는 바람에. 낫는 데는 얼마 안 걸릴 거예요.”

“발을 어떻게 삐끗하면 이렇게 다쳐요… 정말…….”

훌쩍.

아델라인의 얼굴은 그녀가 울면서 흘린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얼떨결에 바닥에 깔린 알렉스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 줬다.

군말 없이 그의 손길을 받은 아델라인은 토끼처럼 새빨개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고작 몇 달 만에 이렇게 엉망이 되어서 온 알렉스의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엄살이라도 부리면 마음이 조금은 덜 아플 텐데, 애써 미소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모습은 더욱 아델라인을 마음 아프게 했다.

잠시 눈가의 눈물을 소매로 슥슥 닦자, 그제야 저 멀리 내동댕이쳐진 목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쩌다 알렉스 위에 올라타 앉아 있는 자신도. 그러자 아델라인은 뒤늦게 찾아온 부끄러움에 얼굴을 푹 숙이고 말없이 목발을 가져와 알렉스의 옆에 내려놓았다.

“…….”

“…….”

뭐라고 말을 터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시선을 피하며 애먼 하늘이나 강줄기를 바라봤다.

잠시 뒤, 먼저 입을 연 건 아델라인이었다. 홍당무가 되어 버린 얼굴로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듯 눈을 질끈 감으며 슈톨렌 이야기를 꺼냈다.

“그 슈톨렌, 제가 만든 거 아니에요. 저택의 요리사가 만든 거에 손만 얹은 거지.”

“그래서 맛있었나. 어쩐지, 계란 껍질 한두 개 정도는 들어가 있어야 했을 텐데 너무 맛있어서 놀랐어요.”

알렉스의 장난기 섞인 말에, 아델라인은 알렉스 옆에 놓여 있던 목발을 치켜들었다.

“확 던져 버릴까.”

마치 창 던지듯 자세를 잡자, 알렉스는 풀밭에 완전히 드러누우며 아델라인을 향해 물었다.

“아델라인이 부축해 주는 거예요, 그럼?”

“제가 어떻게 알렉스를 부축해요, 체격 차이가 얼마인데.”

아델라인은 목발을 품에 안은 채 덩달아 옆으로 누워 그를 바라봤다.

“굴러서 오세요, 굴러서. 저택 안까지 굴러오면 목발은 돌려 드릴 거니까.”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몸을 꾸물거리더니 단번에 옆으로 데굴, 몸을 굴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둘 사이의 거리가 확 가까워졌다. 아델라인의 바로 앞에, 알렉스가 옆으로 누워 있었다. 딱 손가락 하나의 간격을 두고 붙자, 서로의 숨결이 서로의 피부에 와닿았다.

“이렇게요?”

알렉스가 속삭이자, 간신히 반쯤 식힌 아델라인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잠시 그에게서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돌린 아델라인은 눈을 꼭 감은 뒤, 그의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이런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알렉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델라인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입술을 뗐다. 그녀는 알렉스의 품에 자신 대신 목발을 안긴 뒤 몸을 일으켰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직접 목발을 짚고 일어나는 것으로 답했다.

“들어가요. 나이아에게도 인사해야죠.”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의 남은 한쪽 손을 잡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에게 달려올 때와 비교하면 턱없이 느렸지만, 두 사람은 말없이 속도를 맞추며 한 걸음씩 저택으로 향했다.

깍지 낀 두 사람의 손은 그 무엇보다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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