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본토로 돌아갈 시간
하켄 공국의 이름 없는 어촌. 고작 돛대 하나짜리 어선들 두어 척이 매여져 있던 부둣가에 갑자기 나타난 수백 톤짜리 군함은 마을에 걱정과 두려움을 자아냈지만, 다행히 마을 사람들은 스워포드의 서투른 설명에도 불구하고 상처 입은 군인들과 아이들을 위해 공간을 내주었다.
그들이 내어 준 집에서 알렉스는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봤다. 타오르는 모닥불은 따듯하고 밝았다. 며칠 전의 기억을 잊을 만큼 안온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오랜만에 따듯함을 맛보는 건지, 바닥에 누워 있는 아이들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누군가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와.”
알렉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팩이 들어와 알렉스에게 경례를 건넸다.
“충성. 교대입니다.”
“…그래.”
얼마 전까지 갇혀 있던 아이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나마 의료진이라 부를 수 있는 팩과 알렉스는 번갈아 가며 아이들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전문성으로 따지면 HMS 헬리온의 선의가 있었지만, 선의는 훨씬 상태가 안 좋은 라이플맨들을 지켜보느라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윌포드 함장이 마지막 홍차를 끓였다고 하는데, 가서 드시지요.”
“내 몫이나 있을는지. 아무튼 고생해라.”
알렉스는 의자에 걸어 놓았던 녹색 외투를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쯤 걸레짝이 되었던 진녹색 제복은 마을 아낙네의 손을 거쳐 입을 만한 상태로 바뀌어 있었다.
이 이름 없는 마을은, 그들에게 말없이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물론 대가는 치르고 있지만, 호의로서 먼저 다가와 친절을 베푸는 이들의 모습은 알렉스의 마음을 놓이게 했다.
알렉스의 발걸음은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다들 차를 한 잔씩 마시고 있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를 위해 남겨 둔 건지, 찻잔 두어 개가 천으로 덮여 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든 알렉스는 홍차를 홀짝이며 빈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때, 윌포드가 알렉스에게 다가왔다.
“아이들의 상태는 어떻나.”
“상태는 다행히 좀 나아진 듯하네. 심리적인 문제는 차차 지켜봐야 하는 것이고.”
알렉스는 차를 홀짝이며 답했다. 어릴 때의 기억은 자라면서 쉽게 잊히기도 하지만, 반대로 평생을 남기도 한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닌지, 윌포드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군.”
윌포드는 천천히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라이플맨들을 바라봤다. 목숨이 위험하지 않았다뿐이지, 그들도 부상 하나씩은 지니고 있었다. 알렉스처럼.
“매번 이렇게 사상자가 발생하나?”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전시에는 흔하지. 평시에도 가끔 있고.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유감이네. 라이플맨들에 대해서는.”
“아니야, 오히려 고맙네. 어제의 일도, 오늘의 일도. 모른 척해도 되었을 텐데.”
자신의 임무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도의적인 책임은 지겠지만 그냥 ‘우리 임무 아니다.’라고 단칼에 거절하며 무시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옆에 앉아 차를 홀짝이는 이 젊은 함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라이플맨들을 도왔다.
이 마을에 도착한 이후에도, 그는 선원들을 동원해 전사자의 묘를 꾸미고 선목에게 장례식을 부탁했다. 덕분에 며칠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많은 대원이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비록 다른 소함대라고 하지만, 같은 해군이 저지른 잘못이네. 내가 수습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 중이네.”
그는 차를 홀짝인 뒤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함대에 합류하면 군법 회의감이지만. 고의적인 함 군수물자 및 장비 유기, 무단 임무 이탈, 명령 불복종 등등. 혐의가 한두 개도 아니네.”
그는 쓰게 웃으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선원이 200명도 안 되는 배에 또 대원들과 아이들을 싣기 위해 윌포드도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배에 실린 함포를 바다에 내던지고, 무기고의 포탄과 화약을 버려 공간을 만들었다. 상부에서 지시한 일정과 항로를 무시하고 후방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며칠째 함대에 합류하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윌포드는 그 행동 하나하나의 무게를 잘 알았다. 이제 막 함장이 되었건만, 이 정도면 보직 해임 정도야 우스웠다. 어쩌면 다시는 바다에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성질 한 번 내지 않고, 쓰게 미소를 짓는 걸로 속마음을 정리했다.
“진급은 글렀구만, 내가 생각해도.”
잠시 침묵이 흘렀다. 꺼낼 화제가 많지 않았다. 잠시 시간을 죽이고 있던 찰나, 먼저 입을 연 것은 윌포드였다.
“사실, 트레포드에서 로피츠 여사를 만났다네. 정확히 말하면 잠깐 태워서 트레포드에 내려 드린 거지만.”
윌포드의 말에, 알렉스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해역 통제가 이뤄지는 동안에도 나보다 빨리 트레포드에 도착했던 거군.”
“뭐, 다행히 들키진 않았네… 아마도. 뭐, 안들키면 장땡 아닌가? 아무 일도 없었던 거네.”
“그렇지… 고맙네,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네.”
“뭘,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일 뿐일세. 자네들과 마찬가지로. 그나저나.”
그는 잔을 비운 뒤,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알렉스를 향해 물었다.
“무슨 사이인가?”
쿨럭.
차를 입에 머금고 있던 알렉스가 동요하자, 윌포드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정식으로 교제 중인가?”
“그으건 아직…….”
“추수제 때만 해도 같이 다니더니만. 왜… 아.”
알렉스를 향해 왜 고백하지 못했냐는 질문을 하려던 그는 이내 알렉스의 사정을 짐작하고선 말을 줄인 뒤 위로를 건넸다.
“마음고생이 심했겠군.”
“프랑크 군과 함께 연합 작전이라 정보 보안이 필수적이었네. 사정을 몰라도 말없이 기다려 준 아델라인이 고마울 뿐이지.”
“…프랑크 군과 연합 작전?”
“아. 베르티에 중령이랑 이야기 못 나눴나?”
“베르티에 중령?”
그때, 바닥에 앉아 총기를 정비하던 스워포드가 알렉스를 향해 말했다.
“아직 그 양반 빌리 미첼이란 이름 대고 다니고 있을걸요.”
그 말을 들은 윌포드는 이마를 짚었다. 갑작스러운 정보에 대한 거부 반응이 일고 있는 듯했다. 잠시 그가 정보를 소화할 시간을 주며 찻잔을 비우는 사이, 베르티에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마을 사람의 옷을 구해 입은 건지, 그의 차림새는 완전히 시골 청년이나 다름없었다.
“홍차. 남았나?”
“한 잔 남았네. 이쪽으로.”
알렉스의 말에, 베르티에는 미소를 지으며 살짝 식은 찻잔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윌포드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프랑크 군이 왜 그린재킷을…….”
“육군만의 깊고 깊은 사정이 있었으니 모른 척 넘어가 주게. 연합 작전의 일환이네. 그리고 저 양반 털끝 하나도 못 건드려, 지금은.”
알렉스의 말에, 홍차로 속을 데운 베르티에가 한 마디를 얹었다.
“외교관 신분 만세, 라는 거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베르티에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앉았다. 잠시 차로 얼어붙은 몸을 녹인 그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여기. 제복은 노먼 중위에게 맡겼네.”
베르티에는 자신의 목에 걸린 인식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파견 중대 속에 섞여 들어갔을 때 항상 목에 걸고 다니던 ‘빌리 미첼 중위’의 인식표였다.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곧 떠나가리라는 걸 알았지만, 그걸 재촉할 이유도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그렇기에 세 사람은 말없이 찻잔을 기울였다.
가장 먼저 바닥이 드러난 건 베르티에의 찻잔이었다. 아쉬운 듯 찻잔 밑바닥을 흘끗 바라본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군. 나중에, 전장이 아닌 곳에서 보세나.”
베르티에는 손을 들어 제국군의 경례를 알렉스에게 보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그리 짧지 않았는지, 어느새 훨씬 자연스러운 모양새였다. 그러자 알렉스와 윌포드도 따라서 경례로 답했다. 경례를 거둔 세 사람은 악수를 나눴다.
“도와줘서 고마웠네. 가던 발걸음 돌리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길을 잃어 배 얻어 타러 왔다’라는 허술한 변명은 이미 깨진 지 오래였다. 되짚어 보면 답은 명확했다. 베르티에는 알렉스와 라이플맨들을 돕기 위해 일부러 발걸음을 돌린 것이었다. 그 점을 짚는듯한 알렉스의 말에, 베르티에는 몸을 돌려 마을 회관을 나서며 답했다.
“뱃삯이라 생각하게.”
그가 떠나자 마을 회관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윌포드는 간신히 머릿속을 정돈하고 있었고, 알렉스는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 편지를 끄적였다. 그러나 쉽사리 편지가 써지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에서 부정적인 부분을 덜어 내고 나면 날짜와 이름밖에 적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때, 마을 회관의 문이 다시 열렸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프룬츠베르크 공국의 제국군 사령부로 보낸 라이플맨이었다. 그는 알렉스를 향해 경례한 뒤 윌포드와 알렉스에게 인장으로 봉인된 서신을 각각 하나씩 건넸다.
“충성. 다녀왔습니다. 중대장님은 이거 받으시고, 함장님은 이거 받으십쇼. 그리고 미첼 중위님은…….”
“아, 먼저 갔어. 그 양반에게도 온 거 있어?”
“아 네. 통행허가서가 발급되어서.”
통행허가서. 알렉스와 윌포드는 그 말을 듣자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통행허가서가 발급될 이유가 없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본 둘은 누가 먼저라 하기도 전에 서신을 뜯었다.
곧이어 침묵이 흘렀다. 눈앞의 내용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치솟았다. 그러나 아무리 부정한다 한들, 서신의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알렉스는 시선을 돌려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전쟁을 막기 위한 것이 이번 작전이었다. 늦었던 걸까. 알렉스는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무슨 일인가.”
윌포드의 물음에, 알렉스는 선선히 서신을 그에게 건넸다. 그 서신을 읽은 윌포드는 한숨을 푹 쉬며 쓰게 미소 지었다.
“…내 처지가 나은 건지, 아니면 더 나쁜 건지 모르겠군.”
윌포드는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에게 자신의 서신을 건넸다. 그 서신을 본 알렉스는 미소 짓고 있는 윌포드를 따라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누가 더 낫다,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두 사람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잠시 뒤, 웃음을 거둔 알렉스는 윌포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탁 하나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