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불가피한 희생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른 오베른 시내는 그 어느 때 보다 조용했다.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듯 건물 안에 틀어박혀 커튼으로 창문을 가린 뒤, 그 틈새로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광장에 서서 시선을 받으며, 알렉스는 초조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애써 얼굴을 굳혔다. 자신이 감정을 드러내면 대원들의 감정도 흔들릴 것이다.
결국, 한 손에 라이플을 든 채 괜히 시계를 꺼내던 찰나, 길 반대편을 바라보던 대원이 알렉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척후조의 수신호를 포착한 그는 알렉스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척후조에서 다음 블록까지 확보되었다고 합니다.”
“좋아, 애들부터 건너게 해.”
알렉스의 말에, 대원은 고개를 끄덕인 뒤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잠시 뒤, 골목길에 숨어 있던 아이들이 그 곁을 지키던 라이플맨들과 함께 나와 부지런히 움직였다.
“서둘러. 시간이 많지 않다!”
알렉스가 재촉했지만, 아이들의 움직임은 더뎠다. 옷도, 신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의 아이들은 차가운 길바닥에 발을 내딛는 것조차도 버거워하고 있었다. 몇몇 대원들은 조바심이 났는지, 동료에게 자신의 장비를 맡기고는 양팔에 하나씩 아이들을 들쳐 업고 탁 트여 위험한 대로변을 오가길 반복했다.
그렇게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옆에서 보조하는 대원들이 대로를 건너고 있을 때, 뒤에서 총성이 울렸다.
탕!!
라이플 소리가 들리자,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알렉스와 대원들은 곧바로 반응했다. 그들은 총을 고쳐 쥐며 숨을 후, 내쉬었다.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질서하게 우르르 몰려오는 발소리였지만, 그 수만큼은 긴장하기 충분했다.
그때, 지금까지 후위에 남아 적을 지켜보던 라이플맨이 달려와 알렉스에게 보고했다.
“대대급 적 보병! 정면에서 옵니다!”
“산개 후 엄폐! 여기서 적을 막아 낸다!”
알렉스의 지시에, 그를 따라 남아 있던 라이플맨들이 각자 엄폐할 자리를 찾아 몸을 숨겼다. 알렉스도 한 노점 뒤에 몸을 숨긴 뒤 그 너머로 정면을 바라봤다.
수백의 보병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자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훈련이 안 되어 있는 적이라 할지라도 근거리에서 난전이 벌어지면 불리한 건 수적으로 불리한 라이플맨들이었다. 그러나 물러설 곳이 없었다. 아이들이 대피할 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애들이 뒤에 있다. 딱 30분만 버티자. 조준!”
알렉스의 지시에, 라이플들의 총구가 일제히 한 방향을 겨누었다.
“쏴!”
타다다다다당―!
총구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자 멀리서 달려오던 적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그러나 적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밀고 들어왔다.
라이플맨들이 서둘러 탄을 장전하는 사이, 알렉스는 엄폐물 뒤로 몸을 숨기며 앞에서 대기 중인 화기 중대원에게 외쳤다.
“도수박격포! 최대 사거리! 순차 사격! 나머지는 되는대로 자유 사격해!”
“쏩니다!”
쾅! 쾅! 쾅!
거리가 더 가까워지자, 화기 중대의 도수박격포들이 연이어 불을 뿜으며 포탄을 날려 보냈다. 잠시 뒤, 폭음과 함께 폭발에 휘말린 적병의 비명이 들려왔다.
등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겨울바람은 빠르게 자욱하게 깔린 연기를 흩어 버렸다. 연기에 가려진 시야에 알렉스는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군의 수보다 당장 쓰러트린 적들의 수가 더 많았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다가오는 적들의 수는 훨씬 많았다. 그들도 그 사실을 아는지, 보란 듯이 대열을 정비한 뒤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라이플맨들이 장전과 격발을 반복하며 하나하나씩 적을 쓰러트렸지만, 적이 다가오는 속도는 그보다 빨랐다.
다시 한번 장전을 마치고 방아쇠를 당긴 알렉스는 자신의 라이플을 내려다봤다. 얼마나 더 쏠 수 있을까. 기껏해야 두세 번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안에 쌓인 탄매 때문에 격발불량이 날 것이다.
알렉스는 자신의 라이플을 탁탁 두드리며 옆에 있는 화기 중대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도수박격포! 탄 얼마나 남았어!”
“세 발 정도입니다!”
“있는 대로 쏴!”
“그러고 있습니다!”
그때, 그들을 향해 접근하던 적들이 사격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라이플도, 도수박격포도 겨눠지지 않았던 그 찰나. 그들은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타다다다다당!
절반 이상의 총탄이 허공을 갈랐지만, 나머지 절반은 알렉스와 대원들을 향해 쏟아졌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부상자 발생!!”
“의무병! 의무병!!”
여기저기서 동료들의 간절한 부름이 이어졌다. 알렉스는 곧바로 허리춤의 구급낭을 열며 눈앞의 부상자를 향해 달려갔다. 위치를 옮기고 있다가 일제 사격에 당했는지, 그는 엄폐물도 없이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프다, 참아.”
“끄으으윽!”
알렉스가 뒷목을 잡고 끌어당기자, 상처가 벌어진 대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간신히 엄폐물에 다다른 알렉스는 그를 더 끌어와 완전히 숨긴 뒤 상태를 살폈다.
총탄이 계속 알렉스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알렉스의 눈길은 흔들림 없이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탄을 맞은 곳은 다리. 처치만 제때 할 수 있다면 큰 문제는 없었다. 출혈 상태도 양호했다. 알렉스는 침착하게 구급낭에서 붕대와 거즈, 그리고 지혈대를 꺼냈다. 알렉스는 지혈대로 다리 윗부분을 감아 조인 뒤 부상병의 얼굴을 바라보며 연이어 질문을 던졌다.
“다리에 구멍났네, 죽을 것 같아?”
“흐으으… 뒤질 것 같습니다.”
“말하는 거 보니 뒤지진 않겠네. 버텨. 네 월급 한 달에 얼마였지?”
“한 달 9파운드 5실링입니다…….”
“그래그래, 이번 작전 수당 얼마 받았으면 좋겠냐.”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알렉스는 상처에 거즈를 쑤셔 넣었다. 쩍 벌린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오자, 알렉스는 그의 입에 진통제를 넣어 준 뒤 붕대로 다리를 감았다.
“버텨라. 뒤지더라도 작전 수당은 받아야지. 립튼! 이리로!!”
알렉스의 외침에, 격발불량이 난 라이플을 손으로 두드리며 수리를 시도하던 립튼이 달려왔다.
“스팅어 데리고 먼저 후퇴해! 빨리!”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알렉스의 지시에, 그는 부상병을 들쳐 업고 뒤로 물러났다. 그 뒷모습을 볼 새도 없이, 알렉스는 곧바로 다른 부상병에게 다가갔다.
그 부상병은 알렉스를 보자, 힘없이 쿨럭이며 피를 토했다.
“중대, 중대장ㄴ…….”
옆구리에 한 발, 간에 한 발.
여기서는 도저히 손 쓸 방법이 없었다. 알렉스의 표정으로 제 상태를 짐작한 건지, 그는 순식간에 창백해져 가는 얼굴에 간신히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다른, 쿨럭! 놈. 챙기…십쇼.”
“닥쳐, 라이미! 버텨!”
알렉스는 급하게 손을 놀렸다. 거즈와 붕대로 간신히 상처를 싸맨 뒤, 입에 진통제를 넣어 주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어 진통제를 삼킨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알렉스를 향해 말했다.
“먼저, 갑니다.”
그 말을 남긴 라이미의 동공은 손 쓸 새도 없이 풀려 버렸다. 그 공허한 눈을 바라본 알렉스는 그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그때, 그의 귓가에 한 외침이 들려왔다.
“적들이 착검돌격을 합니다!!”
훈련된 몸이란 참 서글펐다. 그 한마디에, 떠나간 동료의 넋을 추모할 새도 없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시선을 돌리자, 적들이 총검을 앞세운 채 광장에 난입해 들어오고 있었다.
“내게로 집합! 전원 착검! 백병전에 대비하라!!”
알렉스의 외침에, 남아 있는 대원들은 알렉스의 곁으로 모여들어 항구로 향하는 길목을 틀어막았다. 부상병들을 추슬러 뒤로 보낸 라이플맨들은 이를 악물며 총구에 총검을 꽂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총탄을 장전했다.
그렇게 많이 쏟아부었는데도, 적들은 아직 그들의 몇 배나 남아 있었다. 총검을 앞세우고 달려드는 수백의 적에게, 이제 서른도 안 남은 라이플맨들이 맞서 달려들었다.
한 적병의 총검이 알렉스의 목을 겨누고 찔러 들어왔지만, 자신의 라이플로 그 총검을 빗겨 낸 그는 개머리판으로 턱을 올려쳐 병사 한 명을 쓰러트렸다.
그다음, 곧바로 동료의 뒤를 노리고 달려드는 병사를 향해 피스톨을 뽑아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달려들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앞으로 풀썩 고꾸라질 뿐이었다.
옆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몸을 휙 돌리자, 시리도록 번뜩이는 칼날이 알렉스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틀거리며 간신히 거리를 벌린 알렉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라이플을 고쳐 쥐었다.
그러나 그는 알렉스가 미처 자세를 잡기도 전에 달려들었다. 한 번 기세를 내준 알렉스는 수세에 몰려 한 발짝씩 뒤로 밀려났다. 결국, 치명적인 실수가 발생하고, 알렉스의 가슴으로 칼날이 번뜩이며 치고 들어왔다.
그때, 검을 내지르던 눈앞의 상대가 눈을 부릅뜨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뒤에서 상상치도 못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리웠나?”
“…베르티에.”
“가다가 길을 잃어서 말이지, 좀 태워 줄 수 있겠나 싶어서. 괜찮나?”
한 손에 검을 든 채 미소를 지어 보인 베르티에는 자신과 라이플맨들을 향해 달려드는 적들을 단숨에 베어 냈다.
그의 검에서 피어오르는 오러를 보자, 방금까지 라이플맨들을 향해 떼거리로 달려들던 적들도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 옆에서 외침 하나가 들려왔다.
“제국 해군!! 돌격하라!!”
“황제 폐하 만세!!”
옆에서 백 명이 넘는 병력이 짓쳐들어오자, 방금까지 기세등등하게 몰려오던 사병들은 이내 사기를 잃고 뒤로 도망쳤다. 도망치지 않고 맞서던 사병들은 이내 총탄에 쓰러지고 총검에 찔려 무너질 뿐이었다.
잠깐 사이에 뒤바뀐 전황에, 만신창이가 된 알렉스와 라이플맨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잠시 그 병력을 바라봤다.
병력을 이끄는 장교를 보자, 알렉스는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장교도 마찬가지로, 알렉스를 보고는 눈을 크게 뜨며 빠르게 걸어왔다.
먼저 입을 연 건 장교였다. 그는 알렉스의 얼굴을 뜯어본 뒤, 손을 뻗어 악수를 건넸다.
“매닝햄 대위. 오랜만입니다.”
“윌포드 함장. 아이들은 소함대 블랙에 다 승함했습니까?”
자신도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아이들의 안부를 먼저 묻는 말에, 윌포드는 잠시 시선을 피한 뒤 알렉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수습을 돕겠습니다. 빨리 움직입시다. 아이들은 이미 배에 태웠습니다.”
윌포드의 말에, 알렉스는 일이 단단히 꼬였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소강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윌포드는 곧바로 지시를 내려 부하들을 움직였다.
“수병들은 부상자와 전사자를 수습하고, 무기를 회수한다! 해병들은 현 위치에서 적에 대비한다!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함장님!”
수병들이 움직이자, 알렉스는 잠시 주변의 벤치에 털썩 앉았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알렉스는 멍하니 수병들이 전사자들을 수습하는 것을 지켜봤다.
항상 유리한 환경에서 싸울 수 없다는 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전우를 잃는 그 순간만큼은 익숙해질 수 없었다.
“괜찮나?”
수병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알렉스의 옆으로 베르티에가 다가왔다. 그는 알렉스의 상태를 살피더니, 그의 옆구리에 있는 구급낭을 열어 붕대를 꺼냈다.
“이발사도 자기 머리 못 자르는 법이지.”
베르티에는 붕대의 상태를 살핀 뒤 알렉스의 팔에 붕대를 칭칭 감쌌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도 알렉스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는 베르티에는, 그저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