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예상치 못한 변수
“여기입니다.”
머스킷을 든 채 앞장서다가 멈춰 선 스워포드의 말에, 한 문 앞에서 알렉스는 뒤에 따라붙은 대원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모두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알렉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립튼.”
“후우, 비키십쇼.”
알렉스의 호명에, 이름이 불린 라이플맨은 묵직한 무쇠 오함마를 양손에 고쳐 잡고 문고리를 후려쳤다. 문고리가 부서지자, 맨 앞에 서 있던 스워포드가 뒷발로 문짝을 돌려차 열었다.
쾅!
“진입!”
알렉스의 신호에, 라이플맨들이 차례대로 방 안으로 진입했다. 알렉스도 라이플을 앞으로 겨눈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고급 여관의 객실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화려하고 안락한 방 안에는 불쾌한 냄새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발걸음을 계속 움직여 객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한쪽에서 알렉스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대장님! 여기로!! 어서!!”
스워포드의 다급한 목소리에, 알렉스는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부상자라도 생긴 걸까?’
알렉스는 옆구리에 단 구급낭의 단추를 한 손으로 풀며 부상이 가볍기를 기도했다.
“무슨 일…….”
그렇게 모퉁이를 돌자, 알렉스는 그만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들이 보게 되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인간의 추악한 밑바닥이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방 한편에 팔다리가 구속된 채 처박혀 있는 아이들. 각종 수술 도구, 마법 재료들과 마도서들, 그리고…….
“지금 뭐 하는 거야! 어서 풀어 주지 못할까! 네놈들이 학문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건가!”
한쪽 팔에 총탄을 맞아 피를 흘리며 라이플맨에게 목을 밟힌 채 발광하는 광인 하나.
이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추론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제 추론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스워포드가 알렉스의 귀에 속삭였다.
“…이 개새끼가,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워포드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대원들의 얼굴에도 비슷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을 목격한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있었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건, 마지막으로 남은 이성 한 가닥이 그들의 손가락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 모습을 본 알렉스는 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방아쇠에서 손가락 떼. 라이미, 너는 가서 노먼 중위랑 팩, 그리고 미첼 중위 데리고 와. 나머지는 애들 풀어 주고 자료 확보해.”
알렉스의 말에, 대원들은 천천히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떼고 지시에 따랐다. 그러자 알렉스의 지시에서 살길이라도 찾은 건지, 마법사는 실실 웃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얼굴을 보자 역겨움이 치밀었다. 그러나 아직 감정을 내보일 때는 아니었다.
“립튼, 발 치우고 일으켜.”
“…….”
“립튼 병장.”
“…알겠습니다.”
알렉스의 힘 실린 목소리에, 립튼은 발을 치우고 마법사를 일으켰다. 거칠게 제압당한 건지, 주저앉은 코에서는 피가 철철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환심을 사려는 듯 비굴하게 미소를 지은 마도사는 알렉스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하, 역시. 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올 정도로 강력한 부대는 몇 없지. 제국에서 왔나?”
“그렇다. 라이플 여단에서 너를 데리러 왔다.”
알렉스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문답을 이어 나갔다. 이제는 알렉스가 질문할 차례였다. 그는 품속에서 반쯤 피우다 만 여송연을 꺼내 그에게 건네며 물었다.
“얼마나 많은 실험체가 있지? 모두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은데.”
“욕심이 크군, 하지만 마음에 들어. 실험체는 넉넉한 게 좋지. 책상 위에 예비 실험체들을 가둬 둔… 이봐! 그건 조심스레 다뤄야 한다고! 이래서 무식한 것들이…….”
한 라이플맨이 서류를 가방에 쓸어 넣자, 마법으로 여송연에 불을 붙이던 마법사는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라이플맨의 눈빛이 서늘하게 바뀌었지만, 알렉스의 눈짓을 받고는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하나는 좋은 대원들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고마웠다.
“미안하다. 이런 쪽으로는 잘 몰라서 말이지.”
“아니야. 모를 수도 있지. 책상 위에 열쇠가 있네. 이곳 바로 옆에 있는 창고에 예비 실험체들을 가둬 뒀지. 한 마흔 정도 되려나. 그게 전부네.”
마법사의 말에, 알렉스는 마도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협조 고맙군.”
“무얼. 제국에서 날 찾으러 왔으면 이 정도는 따라 줘야지.”
벌써부터 김칫국을 마시는 마도사를 바라본 알렉스는 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손도끼, 있는 사람.”
알렉스의 물음에, 한 대원이 허리춤에서 적당한 크기의 도끼를 꺼내 건넸다. 날이 잘 서 있고 묵직했다. 손도끼를 한 번 살펴본 알렉스는 대원들을 돌아보며 마치 동의를 구하듯 질문을 던졌다.
“생포하려 했으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교전 중 불가피하게 사살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지, 얘들아?”
“네, 알겠습니다.”
라이플맨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 뒤 등을 돌리자, 바뀐 분위기를 느낀 듯 마법사는 두려움에 젖은 눈빛으로 알렉스를 바라봤다.
“무, 무슨.”
퍽―
더 이상의 시간도 아깝다는 듯, 알렉스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손도끼를 떠나보냈다. 이제는 영원히 그 더러운 입을 놀리지 못하게 된 마법사를 잠시 바라본 알렉스는 이내 대원들을 향해 지시했다.
“너, 너. 가서 애들 확보해, 스워포드, 너는 소함대 블랙에 상황 알리고 육상병력 요청해. 자료 확보한 놈들은 지상으로 올라가서 화기 중대랑 같이 애들 보호해. 나머지 고가치 표적 두 개는 1대대 본대 오면 바로 인계, 그리고 미첼 중위는 이제 가 보라 그래.”
“…해상으로 탈출합니까?”
“기병대로는 애들까지 못 태울 거야. 적 본대가 곧 온다, 서둘러!”
알렉스의 지시에, 대원들은 바쁘게 자신의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 * *
“하아아… 미치겠네.”
윌포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트레포드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잘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기대감을 배신하듯, 연이어 악재가 터졌다.
항해 도중 충돌 예방 원칙을 무시하고 정면으로 달려든 상선과 충돌하고, 선원들도 서너 명 다치고, 함선도 파손되었다. 그래도 선원들이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라고 마음을 추스르고 며칠을 보냈었다.
그 며칠. 그 며칠이 문제였다.
“…죄송합니다, 함장님.”
“이미 벌어진 걸 어떻게 해요, 사무장. 그래서, 청수 보급은 오늘 오전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상인과 어제저녁에 바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 며칠 동안 함에 보관한 청수가 새 나가는 걸 모르고 있다가, 이틀 전에야 깨닫고야 만 것이다. 급히 기함에 보고하자, 근 한 시간가량을 갈굼당한 뒤 가까운 항구에 보급하고 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번에는 물탱크 확실히 점검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저기 소함대 블랙은 왜 여기 와 있는 걸까요?”
새벽 3시 즈음에 소리 없이 도착해 현측을 계류하고 있는 HMS 블뤼허와 휘하 함선들을 보자, 불안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곧바로 현측 경례를 하려 했으나, 발광신호를 보내 경례하지 말라고까지 했으니 더욱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모르겠습니다. 뭐, 저쪽도 무슨 문제가 생겨 급히 보급하러 온 게…….”
그때, 도심 방향에서 울린 총소리가 사무장의 말을 끊었다.
한 번도 아니고, 수십 수백 발의 총성이 계속해서 밤하늘을 메웠다. 그러자 윌포드는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당직 사관, 총원 전투 배치!”
“알겠습니다, 총원 전투 배치!!”
당직 사관이 종을 울리며 외치자, 모처럼 정박한 채 편히 몸을 누이던 선원들이 후다닥 제 위치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볼멘소리가 한두 마디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총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자 함부로 입을 열 사람은 없었다.
“…….”
윌포드는 시선을 돌려 소함대 블랙을 바라봤다. 대여섯 척의 배는 등불조차 켜지 않은 채였다. 과민반응한 걸까? 라며 망원경을 들어 HMS 블뤼허를 바라보자, 그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모든 선원이 제 위치에 배치된 상태였다. 이 늦은 밤, 이 항구에서. 소함대 전체가. 그 모습을 보자,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
“뭔가 있나 보다. 장포장, 무기고 열고 선원들에게 무기 분배해.”
“알겠습니다.”
윌포드의 지시에, 선원들에게 머스킷과 총검, 그리고 도검이 배분되었다. 그사이 시간은 흘러갔고, 총성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항구는 여전히 조용했다.
그렇게 시침이 5시를 지나던 그때, 블뤼허 함 앞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 사람들을 배에 태운 블뤼허 함은 곧바로 닻을 올리고 휘하 함선들과 함께 항구에서 멀어졌다.
그 광경을 보자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듯했다.
“높으신 분들 모시러 온 건가 보구만. 소함대 하나를 통째로 동원하다니.”
윌포드가 감탄을 흘리자, 주변에 있던 간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연말에 오베른 시라.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 듯했다.
잠시 뒤 헬리온 함 앞으로 누군가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갑판을 밝힌 랜턴 빛을 비춰 보자, 진녹색 바탕의 제복을 입은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그린재킷?”
왜 라이플 여단이 여기에 있는 거지, 하고 멀뚱히 보고 있을 때, 그 사내는 윌포드를 보고 외쳤다.
“제국 해군입니까? 어디 소속입니까!”
거친 숨을 내쉬며 내뱉은 다급한 목소리에, 윌포드는 직접 난간으로 다가가 외쳤다.
“제국 해군 북부함대 휘하 소함대 그린, HMS 헬리온의 함장 제임스 윌포드다! 귀관은 누군가!”
윌포드의 대답을 들은 사내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소함대 그린이요? 소함대 블랙은 어디 있습니까!”
“소함대 블랙이라면 이제 막 출항했는데! 무슨 일이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직감한 윌포드는 난간을 손으로 꾹 쥐며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아무 일 아니어라. 제발.
“소함대 블랙이 아군 해상 퇴출을 돕기로 했었습니다! 진짜 떠난 겁니까?!”
“…무슨.”
갑작스러운 정보에, 윌포드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군을 버렸다고? 제국 해군의 장교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방금 태웠던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지금 이 질문을 한들, 지금 눈앞의 상황이 변할 일은 없었다. 그 생각을 하자, 해야 할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타야 하나!”
“일단 애들 쉰둘에, 라이플맨 180명가량입니다! 애들 상태가 좋지 않고, 육로 이탈은 힘듭니다! 곧 선두가 도착할 겁니다!”
윌포드는 정보를 들은 뒤 눈을 질끈 감고 생각을 이어 나갔다. 고작 600톤가량의 이 배가 기존의 승조원들에 더해 200명 넘는 사람을 더 태울 수 있을까.
그러나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해야 한다’라는 다짐으로 바뀌었다. 해야 한다. 해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빌어먹을, 알겠네! 우리도 자리를 만들지!”
윌포드는 몸을 돌려, 간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해병 대장! 해병하고 수병 일부를 추려서 우선적으로 탄약 지급, 상륙시켜. 그리고 장포장!”
그는 이를 악물었다. 눈앞에서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첫 배, 첫 함장직, 앞으로의 커리어, 그리고 자신을 배웅해 준 연인까지.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계산의 결과는 결단을 요구했다. 그 모든 것들을 넘어선, 모두가 살기 위한 행동을.
“함포와 탄약을 버린다!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