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젊은 이들을 도우소서
12월 마지막 주의 새벽. 알렉스는 당직사관으로서 모닥불 앞에 앉아 밤을 지새우며 하늘을 바라봤다. 깊은 새벽이 되자, 오베른의 불빛도 한층 사그라들었다. 그 덕분에, 하늘을 가로지르는 찬란한 은하수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다.
그때, 노먼이 양손에 잔을 들고 알렉스에게 다가왔다.
“한잔하시겠습니까, 커피를 좀 많이 끓여서.”
“커피 좋죠. 어디 다녀오신 겁니까?”
“잠시 기도하고 왔습니다. 새벽 기도마저 안 하려니 조금 찝찝해서 말입니다. 이것도 습관이라.”
“그런가요.”
“그리고, 내일은 새벽 기도를 못 할 테니까요. 그래서 오늘 내일 몫까지 하느라.”
노먼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그가 습관 삼아 하던 새벽 기도도 하지 못할 것이다. 알렉스는 라이플의 꽂을대를 뽑아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오전 4시에 기동성이 좋은 도약병 연대와 1대대 본대로 베른하르트 공방을 타격해 도시 내에 존재하는 적의 주력을 끌어내고, 그사이 파견 중대와 1대대 화기 중대가 경매장 지하의 암시장에 침투.”
알렉스의 손으로 만들어진 간략한 작전계획도. 그걸 보며 노먼은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뒷부분을 이어 나갔다.
“도약병 연대가 베른하르트 공방에서 적 주력과 교전하는 동안, 1대대는 적을 우회, 파견 중대 및 화기 중대와 합류해 적 주력을 포위 섬멸. 오베른 시 외곽에 있는 적 사병 본대가 오기 전에 17 경기병 연대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퇴출. 정석적입니다. 이번 ‘그믐’ 작전은.”
노먼이 끝내 정해진 작전명을 언급하며 말을 마치자, 알렉스는 꽂을대를 땅바닥에서 치워 라이플에 꽂았다. 잠시 그 작전계획도를 본 알렉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결국, 때가 왔군요. 그믐은 아니지만, 그믐이 와 버렸네요.”
“두려우십니까?”
호록.
알렉스는 노먼이 건넨 커피를 소리 내어 홀짝이는 것으로,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무언의 답을 던졌다. 그러자 노먼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몸을 녹이며 알렉스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참 설레면서도 힘든 일이지요. 우리 같은 전사들에겐.”
“…며칠 전에 슈톨렌이 왔더라고요. 성 축일 때 먹으라는 편지와 함께. 뭐, 성 축일에 먹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착잡해졌지만, 그래도 고맙더라고요.”
“아, 중대장님 앞으로 온 소포가 그것이었습니까? 성 축일은 좋군요.”
“그쪽에서도 이즈음에 뭐 해요? 기원지는 비슷하잖아요. 우리 쪽 종교랑.”
“기원이 비슷해도 갈라진 지가 천오백 년이 넘었는데, 같은 게 있겠습니까. 뭐, 저번 주쯤에 첫 번째 선지자의 마지막 순례를 기념하는 절기가 있었긴 했지요.”
“그렇군요. 그때는 뭘 합니까?”
“뭐, 이맘들은 기도회를 열어 신자들과 기도하는데… 보통 사람들에겐 그냥 해가 넘어가기 전에 일가친척들이 모이는 데 의미를 두는 날이지요.”
“그렇군요.”
“그 덕분에, 가족들과 함께 중대장님의 도움을 받아 나올 수 있었고요.”
“…어쩐지 그때 경계 병력이 적더라.”
알렉스는 잠시 과거를 회상하며, 마치 잊어버린 자그만 퍼즐 조각을 찾은 듯 미소를 지었다. 그사이 잠시 커피의 향을 즐기며 몸을 녹인 노먼이 찬찬히 입을 열었다.
“그때 중대장님께서는 가족들과 따로 떨어져서 움직여야 한다고 제게 말했지요.”
“그리고 그때 우리 부중대장께서는 죽어도 같이 움직여야 한다고 하셨고요.”
알렉스는 커피를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때 제 판단이 틀린 것 같군요. 부끄럽기도 하고.”
“틀렸다고 말할 수 없지요. 다만 그때는 보는 게 달랐으니, 의견이 달랐을 뿐입니다. 오히려 제가 가족 때문에 위험한 길을 택한 거지.”
노먼은 잠시 커피 잔을 내려놓은 뒤 알렉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오늘 일이 끝이길, 그래서 아무런 부담 없이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돌아갈 수 있길 바라야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중대장님?”
몇 개월 전, 파견 중대가 이 일을 맡게 된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는듯한 노먼의 말. 알렉스는 그의 시선을 회피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는 좋은 중대장은 아니겠지요. 자신의 사적인 상황 때문에 모두가 위험을 지게 만들고.”
“대원들의 생각을 따로 묻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걸 모르는 놈들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중대장님을 책망하는 이들도 없을 거고요.”
노먼은 잔 바닥에 깔린, 차갑게 식어 버린 커피를 바닥에 뿌리며 미소 지었다.
“어차피 굴러다니던 쓰레기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밟고 넘어질 뻔해서 치운다고 손 안 거들 놈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요.”
“물론 스워포드 상병은 월급이 반토막 났지만.”
“아.”
“뭐, 이번에 작전 수당 붙으면 5파운드쯤이야 더 나오지 않겠습니까. 굶어 죽을 일은 없겠지요.”
“뭐, 그렇겠지요.”
알렉스는 어느새 동터 오는 새벽녘의 하늘을 바라봤다. 검푸른 색의 천에 보석이 박혀 있는 것 같아 꽤 그럴듯해 보기 좋았다.
알렉스는 회중시계를 꺼냈다. 이제 슬슬 하루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 몇몇 라이플맨은 슬슬 밖으로 나오며 기지개를 켰다. 그 모습들을 눈에 담은 알렉스는 천천히 일어나며 노먼에게 물었다.
“그럼 중위, 나는 눈 좀 붙일 테니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안녕히 주무시지요.”
“점심때 깨워 줘요. 오늘은 꽤 그럴듯하게 준비할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 * *
“마음대로 하거라.”
“…네?”
“파트너를 고르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사정은 다 알 터이니.”
공작이 마차를 타고 떠나기 직전, 배웅을 위해 나온 아델라인에게 공작이 무심히 말했다.
“물론 뒷말이 오가겠지만, 뒷말을 해 대는 부류는 네가 파트너를 데리고 가도 뒷담화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 가는 대로 하거라.”
공작은 그 말만을 남긴 채 마차에 올랐다. 그러자 세 대의 마차로 이뤄진 대열이 나아가 저택을 빠져나갔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본 아델라인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따라 들어온 나이아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답변은 제가 일괄적으로 써서 보내겠습니다.”
“부탁할게.”
나이아에게 할 일을 배분한 아델라인은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재로 향했다. 서재로 향한 아델라인은 책상 위에서 조금씩 먼지에 덮여 가던 편지들을 모두 가져와 벽난로 앞에 털썩 앉았다. 지금까지 바닥에 앉을 일이 없다 보니 잠깐 어색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 편하고 익숙해졌다.
타닥타닥. 역시 종이는 잘 타서 좋았다. 잠시 멍하니 편지를 태우며 난롯불을 바라보던 아델라인 곁으로, 나이아가 다가와 앉았다.
“미련 없이 태우시네요.”
“필요해?”
“아뇨, 리스트는 한참 전에 만들어 뒀어요. 거절 편지도 미리 써 뒀고요. 방금 라일리에게 맡기고 왔어요. 보내라고.”
“그렇구나. 그나저나, 라일리가 누구야?”
“새로 들어온 시녀요.”
“아하.”
아델라인은 계속해서 천천히, 하지만 끊임없이 편지를 태웠다. 편지 하나가 완전히 타올라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면, 그제야 다음 편지를 넣었다.
그렇게 편지 더미가 반 정도 남자, 아델라인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알렉스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
“설마 벌써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곧 돌아오실 거예요. 곧.”
“…그렇겠지.”
아델라인은 한숨을 푹 쉬며 벽난로로 살짝 손을 뻗었다. 따스한 온기는 알렉스의 품을 떠올리게 했다. 손발은 그리도 찬데, 어떻게 품속은 그렇게 따듯할까.
아델라인은 지그시 난롯불을 바라보다 우르르 편지들을 밀어 넣었다. 그다음, 벌떡 일어나 나이아를 향해 물었다.
“내년 위원회 일정이 어떻게 되지?”
“내년 일정이요?”
나이아는 아델라인을 향해 되물은 뒤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있던 일정들을 끄집어냈다. 그렇게 아델라인의 일정을 하나하나 짚어 주려는 찰나,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안돼요.”
“뭐, 뭐가 안 되는데?”
벌떡 일어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이아의 생뚱맞은 단답에, 아델라인은 뜨끔한 듯 그녀를 바라봤다.
“연초는 진짜 일이 쏟아진다고요. 재건위원회에 할당된 예산 1년 동안 알차게 쓰려면 회의 일정에 상관없이 일하셔야죠.”
“아, 아니… 그래도 한 사나흘 정도는…….”
아델라인은 말끝을 흐리며 나이아를 바라봤다. 그러나 나이아의 눈빛은 완강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아델라인은 한층 약해진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안 될까…….”
나이아는 한숨을 푹 쉰 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아델라인도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아델라인은 힘없는 모습으로 책상 앞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나 업무는커녕 아델라인의 시선은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그 힘 잃은 모습을 보고 나이아는 잠깐 마음이 약해졌지만, 그녀는 눈을 꾹 감은 뒤 자신의 자리에 앉아 업무를 처리했다.
그렇게, 12월의 얼마 남지 않은 하루가 지나갔다.
* * *
치고받고 싸운 끝에 내년 예산안도 가결되어 올해의 업무가 공식적으로 끝난 의회였지만, 밤이 되어서도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가 해 보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부의장님. 황후를 설득해 대리인을 불러들이는 것도, 필즈먼에게 작전 보류를 제안하는 것도. 후자는 애초에 여건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마일즈와 그린우드는 각자 여송연과 담뱃대를 물고 연기를 내뱉었다. 짙은 담배 연기를 내뱉을 때마다, 두 사람의 입에서는 옅은 한숨도 함께 섞여 나왔다.
“전직 육군본부장으로서, 황후의 행동이 이번 연합작전에 끼칠 영향은 얼마나 된다고 보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린우드의 질문에, 마일즈는 담배 연기를 흘리며 필즈먼을 향해 말했다.
“기자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부의장님.”
“요즘 기자들과 인터뷰하느라 말투가 옮았나 봅니다.”
그린우드가 맞장구치는 사이 여송연을 문 마일즈는 담배 연기를 후우, 내뱉은 뒤 부끄럽다는 듯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저는 살면서 이런 작전에 손을 대 본 적이 없습니다, 부의장님. 아는 게 없으니 답하기도 힘들지요.”
“…허허.”
“그리고, 저쪽 상황을 모르니, 거짓말도 지어내기 힘들지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빌어먹을… 그렇게 베른하르트제 장신구가 좋은 건지. 저라면 그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린우드는 담뱃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뭐, 유행을 선도하는 건 포기 못 하겠다, 그 마음이겠지요. 외교부를 통해 경매에 대리인을 보내지 말라고 한참 전에 이야기했는데도 그러는 거 보면.”
“그러게 말입니다… 젠장…….”
그린우드는 담뱃대를 입에서 빼낸 뒤 하아아, 한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본 마일즈는 여송연을 입에서 빼며 말했다.
“뭐, 지금으로서는 행운을 빌어 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행운을 빌어 줄 시간도 몇 시간 밖에 안 남았으니…….”
마일즈는 그리 말하며 창밖의, 벌써 찾아온 수도의 야경을 눈에 담았다. 그러자 그린우드는 하늘에 뜬 별들을 바라보며 한 시구를 읊었다.
“젊은이들을 도우소서.
나아갈 발걸음이 한참 남아 있는,
살아갈 나날들이 한참 남아 있는,
배워 갈 지식이 한참 남아 있는,
익혀 갈 지혜들이 한참 남아 있는,
손잡을 인연들이 한참 남아 있는,
지켜볼 절경들이 한참 남아 있는,
그래서 발걸음을 한참 이어 가는,
젊은이들을 도우소서.
떠맡은 의무들이 한참 남아 있는,
버텨 낼 시련들이 한참 남아 있는,
멈춰 설 좌절들이 한참 남아 있는,
지켜볼 비극들이 한참 남아 있는,
토해 낼 슬픔이 한참 남아 있는,
놓아줄 이별들이 한참 남아 있는,
그래서 발걸음을 한참 망설이는,
젊은이들을 도우소서.
그래도 다시 한번 힘껏 땅을 짚는,
그래도 다시 한번 힘껏 일어나는,
그래도 다시 한번 힘껏 발을 딛는,
그래도 다시 한번 힘껏 나아가는,
그래도 다시 한번 힘껏 부딪히는,
그렇기에 더욱 힘이 필요한,
젊은이들을 도우소서…….”
“…기도문입니까?”
마일즈의 물음에, 그린우드는 고개를 저었다.
“고대 제국의, 이름 없는 백부장의 연설입니다. 시대가 변해도 명문이라, 고대 제국 문학을 가르칠 때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더군요… 레이크 양도 그랬고.”
“백부장이라. 내가 아는 한 장교도 중대 인원이 딱 100명이던데.”
문득 떠오른 우연의 일치에 미소를 지은 마일즈는 밤하늘에서 유난히 빛나는 북극성을 바라봤다. 저 별빛 너머, 프룬츠베르크에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노장은 입에 물고 있던 여송연을 빼 창틀에 비벼 끈 뒤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젊은이들을,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