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프룬츠베르크에서 온 편지
“…….”
어느새 날짜는 12월 첫째 주. 알렉스와 헤어진 지도 3주가 되는 날이었다. 아델라인은 발코니에 앉아 솔잎차를 마시며 정원을 바라봤다. 볼 것도 없는, 겨울의 황량한 정원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눈이 갔다.
“…공녀님. 날이 춥습니다.”
“나이아.”
아델라인이 뒤를 돌아보자, 나이아가 아델라인의 어깨에 숄을 덮어 줬다. 잠시 아델라인을 바라본 나이아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나는.”
“…….”
괜찮다. 라고 말하는 아델라인의 겉모습은 그 말대로 괜찮았다. 위원회에도 꼬박꼬박 출석해 안건들을 의논하고, 나이아의 수업도 착실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같이, 하루에 한두 번씩은 찬 바람이 부는 발코니에 앉아 녹색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정원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지금은 없는 녹색을 그리워하듯.
“…안드레이는 알고 있었겠지. 알렉스는 당사자고.”
“…….”
“사정은… 사정은 충분히 이해해. 나라도. 나라도 그래야 했을 거고. 그런데 왜…….”
아델라인은 한숨을 푹 쉬며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왜 이리 마음이 아픈 걸까.”
발코니의 테이블 위에는 두 장의 편지가 올려져 있었다. 알렉스가 트레포드에서 떠나기 전 써서 보낸 편지는, 벌써 약간의 손때가 타 있었다.
마일즈의 말대로, 그 편지들에는 힘든 이야기라고는 하나도 쓰여 있지 않았다. 재미있는 이야기, 평화로운 이야기, 웃긴 이야기들만 쓰여 있었다. 마치 나는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애써 웃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 한 시녀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공녀님 앞으로 온 편지입니다.”
“어디.”
나이아는 아델라인을 대신해 편지를 받았다. 봉투 겉면에는 알렉스의 이름이, 낯선 이름의 항만사무소 주소와 함께 적혀 있었다.
“하켄 공국의 항만으로 상륙했나 보네요.”
“줘 봐.”
아델라인은 편지 봉투를 확인했다. 알렉스의 글씨체였다. 항만사무소의 우편 접수일을 보니 딱 10일 전에 접수된 편지였다. 편지 봉투를 뜯자, 안에서는 저마다 날짜가 다른 여러 장의 편지가 나왔다.
“아, 나이아에게도 편지가 왔습니다.”
“내게도?”
“여기요.”
나이아는 편지를 받아든 뒤 이름을 보고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아델라인이 뭐냐는 듯 바라보자, 빠르게 편지를 등 뒤로 숨기며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자리를 비워 드릴까요?”
나이아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이아는 다른 시녀와 함께 발코니에서 물러났다.
아델라인은 편지지를 하나하나 꺼냈다. 총 네 장의 편지. 그중 두 장은 원래 알렉스의 필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필체로 쓰여 있었다. 날짜순으로 세워 본다면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의 편지만 알렉스의 필체로 적혀 있었다.
[언제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아델라인에게.]
“…뭐야.”
‘사랑하는’이라는 단어가 힘들었으면 ‘친애하는’ 같은 표현도 있었을 텐데 꿋꿋이 이런 복잡한 표현을 쓰는 게 퍽 웃겼다. 물론 이편이, 알렉스답기도 했다.
[30분 뒤에는 배에 몸을 실어야 하는지라, 이게 하선 전까지는 제 손으로 쓸 수 있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습니다.]
그 문장을 보자, 나머지 두 개의 편지가 왜 다른 사람 글씨체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린 것이리라. 안드레이의 말에 따르면 알렉스는 뱃멀미에 약하다 하니.
[아마 이 편지는 하켄 공국에 도착해서야 부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짧아도 2주 뒤에나 도착하겠지요. 2주 뒤의 아델라인은 잘 지내고 있나요? 설마 이번에는 프룬츠베르크까지 오는 건 아니겠지요.]
“…당장에라도 가고 싶은데.”
아델라인은 중얼거리며 편지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상당히 급했는지, 글씨체는 많이 흔들려 있었다. 그리 많은 이야기가 담긴 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당부와 걱정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음 편지로 넘어가자, 확연히 다른 글씨체가 아델라인을 맞았다.
[아델라인(폰 로피츠 여사께)에게.
중대장님께서 죽어 나가려고 해서 본부소대 크레이튼 ‘팩’ 파코우스키 병장이 받아 적습니다. 다른 사람 필체라고 버리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중대장님께서 강조하시더군요.]
알렉스의 상태가 영 안 좋았는지, 팩이 대신 받아 적었다는 문장이 처음으로 적혀 있었다. 그 뒤에는 알렉스가 특히 강조했다는 말까지.
“안 버릴 건데…….”
[지금 우리는 HMS 디파이언스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다행히 여단 본부에서 조금 챙겨 준 건지, 파견 중대 앞으로 온 부식이 한가득 실려 있더군요. 덕분에 또 페미컨 비스킷 염장 고기 수프로 배를 채우는 신세는 면했습니다.]
“다행이네…….”
[단독 항행이 아니라 다른 수송선, 그리고 호위전단과 함께 기동하니 일이 크게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배에 물새면 바로 옆 배로 옮겨 타면 되는 거니까요. 물론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지만.]
“…뭐, 무사히 도착한 거겠지.”
아델라인은 찬찬히 편지를 읽어 나갔다. 알렉스의 손이 아닌 팩의 손으로 쓰인 두 장의 편지에는 수송선 안에서 어떤 음식이 나왔고 맛이 어땠는지. 뭘 하며 지냈는지가 주로 쓰여 있었다.
그 두 장의 편지를 다 읽어 갈 찰나, 아델라인은 편지지 한쪽 구석의 추신을 발견했다.
[PS. 불경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중대장님이 올해 안에 고백한다, 못 한다에 스워포드 상병과 5파운드 내기를 했습니다. 스워포드는 못 한다에 걸었고요. 괜찮으시다면, 답신을 통해 승패를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아델라인은 그 문장을 보고 피식 웃었다. 어느새 소문이 다 난 걸까. 살짝 부끄럽기도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장의 편지를 읽고 나자, 마지막 편지가 나타났다.
[언제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아델라인에게.]
알렉스가 직접 쓴 편지에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이라도 하듯, 앞의 두 장보다 훨씬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아무래도 팩의 손을 빌려 쓰지 못하는 마음들이 한 번에 우르르 쏟아져 나온 듯했다.
항구에 상륙하고 집결하며 있었던 사소한 사건들을 쓴 내용 사이사이에, 자신과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섞여 있었다. 자신만 그리워했던 게 아니었구나.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으며 편지의 마지막 문단을 읽어 내렸다.
[나이아와 안드레이는 잘 지내고 있나요? 휘태커 경감은 물론 많이 바쁘실 테고. 그 무엇보다, 아델라인은 잘 지내고 있나요? 연말이라 많이 바쁠 수도 있겠네요. 정성 들인 편지는 보내 주시지 않으셔도 되니, 잘 받았다는 내용의 단신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아, 편지는 편지의 발송지로 적혀 있는 항만사무소 주소를 적으시고, 옆에 ‘라이플여단 파견대 알렉스 매닝햄 대위’라고 써서 보내 주시면 제가 지금 주둔하고 있는 야영지로 온다고 합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PS. 며칠 전부터 스워포드와 팩이 제게 고백했냐고 물어봐서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왜 물어보는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고. 혹시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다면 알려 주세요.]
알렉스의 편지 마지막에 적혀 있는 추신을 본 아델라인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잠깐 시간이 흐른 뒤, 아델라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발코니에서 나왔다. 그러자 자신 앞으로 온 편지를 읽고 있던 나이아가 보였다.
“다 읽으셨나요?”
급하게 편지를 감추고 묻는 나이아를 보며 누가 보낸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델라인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편지지와 펜을 준비해 줘. 그리고 안드레이도 불러와 주고.”
“알겠습니다.”
* * *
12월 중순. 화려한 오베른 도심지가 저 멀리 보이는 국경 지대 평야는 참 묘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두 강대국과 그 동맹국들의 군세가 대치하고 각자 과시하듯 훈련을 하는 상황은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온 대륙의 돈 좀 있다 하는 양반들은 오베른 중앙경매장의 경매에도 참여할 겸 미리 도착해, 낮에는 두 군세를 구경하고 밤에는 오베른 시의 유흥을 즐기고 있었다.
덕분에 오베른 시는 그 어떤 해보다 훨씬 큰 호황을 누리며 야경에 화려함을 한층 더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제국군 진지에서도 보일 만큼.
그리고 그 야경을 바라보던 정장 차림의 알렉스는 한숨을 푹 내쉬는 중이었다.
“…눈이 너무 많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핫초코 드시겠습니까?”
“고맙네, 미첼 중위.”
알렉스는 베르티에가 건넨 양철 컵을 받아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핫초코가 입 안에 퍼지자, 몸이 한결 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알렉스의 입에서는 연이어 한숨이 푹 내쉬어졌다.
“…일이 점점 복잡해지는 느낌이야.”
“보는 눈이 많아졌습니다. 오베른 시 내부에 병력을 투입하는 것부터가 난관이겠군요.”
“방법을 강구해야지. 우회 기동이라든지. 야간 강습 작전이라든지.”
알렉스는 빠르게 식어 벌써 미지근해진 핫초코를 반 정도 마신 뒤 오베른 도심을 바라봤다.
도시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중앙경매장. 그 경매장으로, 그들은 들어가야 한다. 수 개월간 이어 온 노력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지하에 있는 암시장 규모는?”
“양국의 자료를 기반으로 교차 검증된 정보에 의하면 꽤 크기가 큽니다. 아편이나 귀금속 정도는 공용 화폐 수준이고, 미술품이나 유물, 마물, 금지된 마도서 등도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오직 경매장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합니다.”
“또?”
“편의 시설이나 도박장도 꽤 호화롭게 갖춰져 있으니, 사람 서넛 티 안 나게 박아 두는 데는 문제 없겠지요. 마법사 중 한 명은 이전에 도박으로 징계를 받았을 정도로 중독자이니, 경매장이 아니라 그 아래 암시장에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베르티에는 양철 컵의 핫초코를 쭉 들이켠 뒤, 알렉스를 향해 물었다.
“이 작전에 확신이 드십니까?”
“확신이 안 들어도, 여기까지 온 이상 그 끝은 봐야지. 안 그렇나?”
그때, 정장 차림의 스워포드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피는 못 속이는지, 옷 한 벌 잘 갖춰 입었다고 꽤 그럴듯한 사업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선행 정찰 나갈 준비 하셔야지요. 핫초코 다 마셨으면.”
“그래.”
알렉스는 옆에 벗어 두었던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중절모를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확신을 얻을만한 결과물이 나오길 바라야지. 가자고, 중위.”
“알겠습니다, 중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