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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95화 (95/200)

95화 마지막 하루가 주어진다면

끔뻑.

알렉스가 눈을 뜨자,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아델라인이 보였다. 당황해서 고개를 살짝 돌리자, 자신의 팔이 그녀를 꼭 감싸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자 알렉스는 잠이 들기 직전, 자신이 뭔 짓을 했는지 떠올렸다. 빌어먹을. ‘사랑하는 아델라인’도 아니고, ‘언제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아델라인’이라니. 대체 자신이 뱉어 놓고도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델라인을 품에서 놓은 알렉스는 침대에서 벗어나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러자 한결 마음이 차분해지는 듯했다. 그래. 일단 아델라인은 아델라인이고, 일은 일이다.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중대장님, 계십니까.”

“어, 잠깐만.”

알렉스는 군화를 신은 뒤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이제 막 도착한듯한 노먼 중위가 알렉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장교단 집합입니다. 4층 행정반으로.”

“장교단 집합?”

“네, 그렇습니다.”

“바로 갈게, 먼저 가 있어.”

알렉스의 말에, 노먼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나 계단으로 향했다. 알렉스가 문을 닫자 뒤에서 아델라인이 잠꼬대를 하는 게 들려왔다.

“으으… 추워…….”

알렉스의 온기가 사라지자 추위를 타는 아델라인의 모습에, 그는 어느새 내려가 있던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줬다.

아델라인이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짓자, 알렉스는 안심한 얼굴로 열쇠를 챙긴 뒤 문고리의 버튼을 누르고 문을 닫았다.

찰칵. 문이 닫히며 저절로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4층의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그가 가장 늦게 도착한 건지, 이미 1대대와 파견 중대의 장교들이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아, 선임 위관님!”

“오랜만이네, 다들. 잘 지냈냐?”

“항상 훈련과 작전의 연속입지요. 뭐, 파견 중대만 하겠냐마는.”

1대대의 대다수 장교는 알렉스를 향해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때, 테이블 위에 앉아 있던 아서 대령이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들 잡담하러 왔나?”

“아닙니다!”

“선임 위관, 인원 체크.”

대령의 명령에, 옆에 서 있던 1대대 선임 위관이 장교들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그 틈을 타 옆에 있던 1대대 장교에게 물었다.

“…내가 방 안에 있을 동안 뭔 일이 있었길래 심기가 틀어졌냐?”

“뭐, 식사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설익은 생선튀김에, 반쯤 탄 감자튀김. 먹는 게 낙인데 그 낙마저 놓쳤으니 잠시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요.”

그의 말대로, 대령이 앉은 테이블 위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듯한 피시 앤 칩스 접시가 올려져 있었다. 알렉스는 그걸 보자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채고 말았다.

안드레이 네 이놈… 대대장을 암살하려 들다니…….

“전 장교단 집합했습니다.”

“후우우… 좋아. 일단, 수도에서 올라오느라 고생 많았다, 파견 중대. 쉬어야 할 테니, 빠르게 몇 가지 전달 사항만 전하고 해산하지.”

대령은 심기 불편한 표정에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우선 오늘 20시까지 자유행동, 21시에 점호, 22시에 취침이다. 1대대에서 할 테니까, 파견 중대에서 불침번은 따로 뽑을 필요 없다. 기상은 내일 오전 04시. 04시 30분까지 중대별로 지정된 수송선에 탑승해 05시에 출항한다. 오늘 저녁은 알아서 사 먹어. 나도 그럴 거야. 다음.”

그는 물로 목을 축인 뒤 다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장비 새롭게 지급받아야 하는 인원 있으면 19시까지 군단 사령부로 가라. 라이플 여단 보급 대대 파견 인원들이 재보급 해 준 댄다. 갈 때 망가진 장비는 챙겨 가야 하는 거 잊지 말고.”

“넵.”

“마지막으로, 작전 투입 전까지 오베른 시에서 정보 수집을 담당할 선행정찰조를 뽑아야 한다. 1개 소대 인원이면 충분히 로테이션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프랑크어랑 도이치어 할 수 있는 인원들 정리해서 추려 보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달할 사항은 다 전했으니 해산하자. 배에서 먹을 간식 같은 건 오늘 미리 사 둬라. 편지 같은 것도 미리 부치고. 해산!”

아서 대령의 해산 명령에, 장교들은 전달 사항을 알리기 위해 부지런히 아래로 내려갔다. 알렉스도 마찬가지. 그는 노먼을 바라보며 질문을 했다.

“노먼 중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일이 있어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다 오십시오. 그리고 그 되도록 ‘사랑하는’ 같은 표현은 확실히 하시고.”

“…누가 말했습니까?”

“이 늙은이도 귀가 있답니다. 허허.”

노먼의 웃음에, 알렉스는 이마를 탁 짚을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소문이 다 퍼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 내년 즈음 되면 여단 전체에 소문이 퍼지겠지.

연신 한숨을 푹푹 쉬던 알렉스는 노먼의 손에 등 떠밀려 스위트룸을 나온 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복도마다 서 있는 라이플맨들이 모두 알렉스를 보고 두 가지 반응을 내비쳤다.

기혼자나 연인이 있는 사람들은 실실 미소를 지었고, 미혼 독신들은 부러움과 질투에 가득 차 있었다. 자연스레 얼굴이 붉어진 알렉스는 후다닥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알렉스의 코에 부드럽고 달콤한 꽃향기가 느껴졌다.

“아, 왔어요?”

그사이 씻고 단장을 마친 건지,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아델라인이 알렉스를 맞았다.

“어디 갔었어요?”

“아, 파견 중대가 도착해서 장교단 집합 한번 했습니다. 오후 8시까지는 자유 시간이네요. 지금이 5시쯤이니까… 바깥 구경이나 할까요? 저녁 식사도 할 겸.”

“좋아요.”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알렉스는 숄더 홀스터를 착용하고 세이버와 피스톨을 챙긴 뒤 아델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델라인은 그의 손을 잡으며 여관을 나섰다.

한차례 병력을 실어 날라서인지, 거리는 한결 한적해져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병사들은 삼삼오오 뭉쳐 다니며 각자의 용건을 보고 있었다.

한 병사는 검열에 앞서 잃어버린 부싯돌과 총검을 메꾸기 위해 한 노점상과 흥정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기병대의 화려한 제복을 입은 부사관들이 길가에 차려진 노점에 앉아 술 한잔을 걸치고 있었다.

수도에 비하면 약간 투박하지만, 그렇기에 더 정감이 가는 저녁 풍경이었다.

“트레포드에는 많이 와 봤어요?”

“오기야 몇 번 왔지요. 아, 그러고 보니 꽤 괜찮은 식당이 있던 거로 기억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 자, 안내하시죠. 신사분.”

“분부대로.”

아델라인과 알렉스는 하나둘 등을 켜기 시작하는 거리를 거닐었다. 그러자 어느새 근사한 외양을 지닌 레스토랑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식사를 위해 이 레스토랑을 찾아온 장교들이 많았지만, 다행히 자리가 남아 있어 기다림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순조롭게 주문까지 마치자, 두 사람 앞에 식전주가 한 잔씩 놓였다.

“듀보넷에 허브들을 곁들인 음료입니다. 원래 저녁은 5코스로 제공되나, 장교분들이 많아 3코스로 제공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종업원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알렉스는 실링 은화 하나를 팁으로 건네며 말했다. 아마 이 종업원도 오늘 하루 장교들에게 시달리며 고생이 많았겠지.

“고생이 많습니다.”

“아닙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종업원이 자리를 떠나자, 두 사람은 잔을 들어 식전주를 홀짝였다. 듀보넷과 허브의 향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식욕을 돋웠다.

“좋네요, 이거.”

“건강에도 좋으니, 열대지방으로 파견 가는 몇몇 장교들은 이걸 궤짝으로 사가서 파병 기간 내내 먹기도 합니다. 말라리아 예방에 좋다나.”

“그래요? 신기하네요. 그나저나 여기까지 오면서 진짜 수프만 먹은 거예요?”

“원래는 빵도 같이 먹으려고…….”

아델라인의 물음에 답하려던 알렉스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 편지에 다 써 놓았으니 가서 읽어 보십시오.”

“에, 뭐에요. 그거.”

“스포일러는 범죄잖아요? 직접 읽어 보세요. 제 입으로 말해 드리기엔 아까운 내용이니까.”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은 뒤 식사를 이어 나갔다. 싱그러운 채소들을 기반으로 한 전채 요리, 그리고 신선한 해산물들로 만든 메인 요리는 두 사람의 입을 즐겁게 만들기 충분했다.

맛있는 식사와 즐거운 잡담이 이어졌다. 주로 아델라인이 말하고, 알렉스가 듣는 쪽이었다. 아델라인이 종종 알렉스를 떠봤지만, 그는 지난 이틀간의 이야기를 꼭꼭 숨겼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두 사람의 테이블에는 홍차와 디저트가 올라 있었다.

“그나저나 오베른 근처라.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요. 진짜 훈련만 하러 가는 거 맞죠?”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원래의 표정을 되찾은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기껏해야 프랑크 군 포병 훈련 중에 눈먼 포탄이 날아오는 정도겠지요. 뭐, 일반적인 포탄은 쇠구슬이니 보고 피하면 그만입니다.”

알렉스의 허세 섞인 말에, 아델라인은 옅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알렉스의 말이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몇 시간 전 들었던 아서 대령의 지시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작전 투입 전까지 오베른 시에서… 선행정찰조… 프랑크어랑 도이치어 할 수 있는 인원…….’

방음이 제대로 안 되었던 건지, 아서 대령의 힘 있는 목소리는 바로 아래층에서 침대에 누워 있던 아델라인의 귀에 들려오기 충분했다.

작전 투입.

아델라인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가설이. 알렉스가 단지 훈련을 가는 게 아니라, 위험한 일을 하러 간다는 가설이 조금이나마 현실로 드러났다. 그러자 지금 당장에라도 알렉스를 향해 캐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솟아났다. 대체 뭘 하러 가는 거냐고, 위험한 일이냐고.

그러나 허세 섞인 말을 내뱉고,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을 향해 변함없이 미소짓는 알렉스를 보자 차마 그를 향해 재촉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도 걱정이나 두려움을 털어놓지 못하는 그의 상황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아델라인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감정을 다스린 뒤 그를 향해 또 한 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먼 포탄에 맞지 말고, 몸 성히 돌아오세요. 내년 사교 시즌에도 파트너가 되어 줘야죠.”

“내년에는 사냥대회 상도 타 보고?”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열심히 노력해 보죠. 애초에 베르티에 그놈이 버티고 있는 한 가능할는지 모르겠지만.”

“뭐에요, 베르티에 보좌관 앞에서는 허세란 허세는 다 떨더니.”

“앞에 있으니 허세를 떠는 거지요.”

아델라인은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아델라인의 핀잔을 들은 알렉스는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그녀를 따라 웃어 보였다.

어느새 찻잔도, 디저트 접시도 다 비워졌다. 계산서를 건네고 값을 치른 알렉스는 아델라인과 함께 밖으로 나와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는 부둣가를 거닐었다.

부른 배가 꺼질 즈음, 아델라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황궁에서는 연말연시에 연회를 연대요.”

“새해를 맞이하는 불꽃놀이는 장관이지요. 연회 예산 반절이 거기 들어갔을걸요?”

“본 적 있어요?”

“뭐, 친위대 놈들 업무 대신하느라 제대로 감상하진 못했지만요. 시끄럽기만 시끄러웠지.”

“그렇군요. 그래서.”

아델라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러자 알렉스도 따라서 걸음을 멈추고 아델라인을 마주 봤다.

잠시 알렉스의 눈을 응시한 아델라인은, 그를 향해 질문했다.

“저는 아직, ‘사랑하는’ 아델라인은 아닌 건가요?”

“…소원권. 지금 쓸 수 있나요?”

제 질문과는 맞지 않는 대답. 하지만 어렵게 입 밖으로 내뱉은 듯한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잠시 그를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알렉스는 마음속으로 할 말을 정리했다. 한 시간을 내리 달려도 잠잠하던 심장이 아델라인의 앞에만 서면 격하게 두근거렸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 가슴은 진정하지 못하고 요동치고 있었다.

사랑한다,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염치없는 짓이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작전을 앞두고 ‘사랑한다’라고 말할 만큼 알렉스는 뻔뻔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봤기에, 그는 한참 고개를 푹 숙였다가 치켜들기를 반복하며 머뭇거렸다.

결국, 알렉스는 중간에서 타협을 보기로 했다. 적당히 표정을 가다듬은 그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언제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아델라인. 맘 편히 ‘사랑한다’라고 말하기에는 제가 등에 진 게 너무 많네요. 뭐, 구체적으로 뭘 등에 지고 있는지 말하기는 힘들지만.”

알렉스는 잠시 말을 멈춘 뒤 아델라인을 품에 끌어안았다. 갑작스럽게 안긴 아델라인의 눈이 잠시 크게 떠졌지만, 그래도 그녀 역시 알렉스처럼 그의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소리 없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던 알렉스의 입에서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곧 모든 게 정리될 거예요. 그때까지만. 잠시 기다려 줄 수 있나요?”

차분함을 가장한 목소리. 그러나 아델라인은 그의 목소리에 감춰진 간절함과 슬픔을 읽어 버리고 말았다. 대체 무엇을 하러 가기에 ‘사랑한다’ 그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힘든 건지 추궁하고 싶었지만, 아델라인은 그리 모질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억누르며 알렉스의 품에 얼굴을 묻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델라인의 대답을 확인한 그는 다정하게 그녀를 꼭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그녀의 온기는, 겨울바람을 잊을 정도로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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