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왜 이리 힘든지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델라인은 고개를 돌려 현관을 바라봤다. 근 일주일 만에 보는 알렉스의 모습은 땀투성이에 살짝 꼬질꼬질해 있었지만, 그래도 굶고 다닌 건 아닌지 그렇게까지 초췌하진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 편지에 있는 그 ‘사랑하는’이라는 단어에 대해 추궁하겠노라 생각했던 계획은 하얗게 백지가 되고 말았다.
결국, 아델라인은 자신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알렉스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인사했다.
“많이 늦었네요, 알렉스?”
“…여기는 어떻게.”
“자, 차를 끓여 뒀어요. 씻고 와서 한잔 들어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방을 챙겨 들고 방에 붙어 있는 욕실로 향했다.
3일간 야영과 기동을 반복하며 꼬질꼬질해진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기는 했는지,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잠시 뒤, 물소리가 끊기고 알렉스가 욕실에서 나왔다. 목욕 가운을 걸친 채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나온 그는 아델라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알렉스의 자리에는 막 찻잔에 따른 솔잎차가 모락모락 김을 피우고 있었다. 차를 한 모금 머금자, 메말라 있었던 입 안이 상쾌함을 되찾았다. 잠시 차의 향과 맛을 즐긴 알렉스는 잔을 놓고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꿈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델라인은 왜, 어떻게 이 먼 트레포드 항까지 온 걸까.
“여긴 어떻게 온 겁니까? 분명 해역 통제가 이뤄졌을 거고. 육로 이동은 훨씬 복잡했을 텐데.”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 방법이 있죠, 방법이. 그나저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편지를 썼는데… 아. 설마 제가 떠난 날 바로 따라오신 겁니까?”
그러자 아델라인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런 편지를 봐 버렸거든요. 그래서…….”
아델라인은 편지를 펼쳐 알렉스에게 보여 주며 물었다.
“알렉스에게 저는 그냥 아델라인인가요? 아니면… ‘사랑하는’ 아델라인인가요.”
* * *
“그래서, 오늘 회의에는 여사 대신 자네가 나온 거구만.”
“네, 그렇습니다.”
의회당 회의실. 마일즈 의원과 커크만 교수는 아델라인이 남긴 편지를 읽어 내리며 나이아와 대화를 나눴다.
“그나저나 갑자기 트레포드에 볼일이라. 무슨 일일까요?”
커크만의 물음에, 마일즈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맘때 되면 한두 번씩 일어나는 일이지. 매닝햄 대위를 보러 간 건가?”
“네, 그렇습니다.”
“매닝햄 대위? 아. 그 조사 결과문에 있던.”
커크만이 목걸이 사건 조사 결과문의 증인으로 올라가 있던 이름을 떠올리며 마일즈를 바라보자, 마일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플여단 장교일세. 오며 가며 한 번씩은 만나 봤을 법하다만.”
“언뜻 본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검은 머리에 훤칠하니 잘생긴 청년인가?”
나이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커크만은 이해가 간다는 듯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긴, 선남선녀입니다. 직접 만나지를 못했으니 성격은 뭐라 말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여사의 안목이 가볍지는 않으니 믿을 만한 사람이겠지요.”
“대위가 그 노력에 보답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군인이라는 게 참.”
마일즈의 말에, 두 사람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나만 해도, 집사람에게 내 마음을 온전히 털어놓는 게 쉽지 않았다네. 그때는 내전, 그리고 내전 뒤에 이어진 ‘5년 전쟁’ 중이었으니.”
“…….”
“열여덟 소위에 만나, 스물일곱 대위가 될 때까지 ‘사랑한다’ 한마디를 꺼내는 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어. 스무 살 때 고백하려던 첫 시도는 전쟁광 폭군의 갑작스러운 선전포고에 휘말려 들어갔고, 그 뒤에도 회군, 축출, 내전, 5년 전쟁…….”
달그락. 마일즈의 손에 들린 커피 잔이 티코스터에 내려앉았다.
“수많은 전장과 죽음을 보고 나니, 사랑이라는 당연한 감정을 말하는 게 무서워지더군. 내가 죽으면, 내 고백을 들은 그녀는 괜찮을까, 하면서.”
“…그러고 보니, 새 체제가 들어선 지 벌써 40년이 지났군요. 지금 내각이 11대이니.”
“아무튼, 멀리서나마 매닝햄 대위가 제 마음을 일찍 고백하길 바라는 바이네. 같은 군인이었던 사람으로서. 그러면, 그의 아버지였던 매닝햄 중사도, 그리고 던컨 중령도 편히 눈감을 수 있겠지.”
“던컨 중령이요?”
“자, 이제 일해 볼까. 별로 할 일도 없지만 모인 이상 뭐라도 해서 회의록을 남겨야겠지.”
나이아가 던컨 중령에 관해 물었지만, 마일즈는 곧바로 화제를 전환해 버렸다. 이내 세 사람은 재건위원회가 처리해야 할 안건들을 의논해 갔다.
그러나 던컨 중령이라는 이름은, 나이아의 머릿속에 남아 의구심을 일으켰다. 대체 누구기에, 알렉스의 아버지와 함께 거론된 걸까.
* * *
아델라인과 ‘사랑하는’ 아델라인.
그 질문을 받은 알렉스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물론 어제 점심때만 해도 ‘아델라인이 트레포드에 찾아오면 고백하겠다.’라고 속으로 마음먹기는 했지만, 진짜로 그게 눈앞의 현실이 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알렉스가 시선을 돌리려 해도, 아델라인의 매서운 눈매는 여전히 그를 향하고 있었다. 속은 부드럽고 여린 사람이란 걸 아는데도, 아델라인의 노려보는 시선은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때, 아델라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아델라인이 한 박자 늦게 얼굴을 붉히고, 알렉스가 웃음을 터뜨리려는 찰나, 알렉스의 배에서도 마치 답장이라도 보내듯 꼬르륵 소리를 냈다. 그러자 알렉스도, 귀를 살짝 붉히며 멋쩍게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 아침 안 먹었어요?”
“아침이야 먹었지만… 뭐 수프 좀 먹은 게 답니다. 페미컨 염장 고기 비스킷 수프요.”
아델라인은 그 말을 듣고 입을 쩍 벌렸다. 알렉스가 내준 식량 보급 과제 예제에서 빠짐없이 나오는 보존 식량들이었다. 설마 3일 동안 그것만 먹은 건가? 라는 생각이 들자, 아델라인의 눈에서는 점차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3일 동안 음식 같지도 않은 걸 먹고 온 사람을 앉혀 두고 단어 하나의 의미를 추궁하기에는 아델라인이 너무 모질지 못했다.
“아델라인은, 여기까지 어떻게 온 겁니까?”
“가문의 티 클리퍼를 타고 왔지요. 마침 수도 근처의 항구에서 대기 중이라길래. 물론 트레포드 근해까지 와서 해역 통제 사실을 알고 올드 트레포드로 돌아갈 뻔했지만, 친절하신 장교분이 도와주셨죠.”
아델라인의 대답에, 알렉스는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생각지도 못한 수단으로 해결했기에, 뭘 따져 물으려 해도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공작가의 영애쯤 되면 스케일이 다르구나 싶은 생각만 들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야겠군요. 뭐라도 먹어야 할 테니.”
목욕 가운 차림의 알렉스가 배낭에서 여분의 옷을 꺼내 욕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객실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룸서비스입니다, 대위님.”
룸서비스. 이런 큰 여관이라면 있을 법도 하지만, 지금은 1대대가 통째로 여관을 세놓은 상태일 텐데. 무슨 룸서비스지… 하며 알렉스가 문을 열자, 한 손으로 용케 쟁반을 들고 온 안드레이가 미소와 함께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의 눈에 알렉스의 몸에 걸쳐진 목욕 가운이 들어오자, 안드레이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오늘은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무슨 개소리… 그냥 씻은 거다. 그건 뭔데?”
“아, 이거 말입니까?”
안드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걸어 들어와 테이블 위에 쟁반을 놓았다. 그가 쟁반을 덮고 있는 천을 걷어 내자, 먹음직스러운 감자튀김과 생선튀김, 그러니까 피시 앤 칩스가 흰색의 타르타르소스, 그리고 붉은색의 케첩과 함께 접시 한가득 담겨 있었다.
공작가에서 이런 요리를 내왔다면 요리사가 문책당할 사안이겠지만, 여기는 군인들로 가득 찬 여관. 이 정도 요리도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아침도 굶고 안드레이의 인도에 의지한 채 수많은 군인을 뚫고 지나온 아델라인과 아침에 야외에서 끓여 먹은 수프는 한 시간가량의 구보에 싸악 내려가 허기가 진 알렉스에게는 더더욱.
아델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포크를 들고 감자튀김을 조준했다. 그러나 알렉스는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안드레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만들었냐?”
그 질문에, 아델라인도 포크로 찍어 입으로 집어넣으려던 감자튀김을 멈춰 세웠다.
“뭐, 그…….”
안드레이는 알렉스의 시선을 잠시 회피했다. 그러자 아델라인과 알렉스의 표정이 불안감에 물들었다. 뭘 했구나. 안드레이 네 이놈.
“살짝 손만 댔습니다, 손만.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그러자 두 사람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알렉스가 대체 뭔 짓을 저지른 거냐는 시선을 보냈지만, 안드레이는 허허, 웃으며 조용히 객실을 나갔다.
“…제가 먼저 먹어 보겠습니다.”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레 감자튀김을 하나 입에 넣고, 분석하듯 천천히 맛을 봤다. 그다음, 생선튀김을 반으로 갈라 상태를 확인한 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다행히, 맛있는 감자튀김과 생선튀김이었다. 적당히 고소하고 기름기 있으며 짭조름한, 갓 튀겨 김이 모락모락 나는 튀김.
“…안드레이가 장난친 모양입니다. 맛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감자튀김을 입에 넣었다. 아델라인이 빙의 전 맛봤던 감자튀김과 비슷한 수준의, 훌륭한 맛의 감자튀김이었다. 생선튀김도 마찬가지. 빙의 전 맛있게 먹었던 생선가스와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는 식감과 맛이었다.
타르타르소스를 곁들이자, 더욱 훌륭한 풍미가 아델라인의 입 안을 감쌌다. 그건 알렉스도 마찬가지였는지, 두 사람은 빠르게 피시 앤 칩스를 해치웠다. 그리고 이내 넓은 접시가 텅 비어 버렸다.
허기진 배를 달래자, 이내 노곤함이 찾아오며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먼저 아델라인의 눈이 천천히 끔뻑이자, 알렉스가 아델라인을 향해 말했다.
“피곤하신 것 같은데, 침대에서 주무십시오.”
그러자 아델라인이 마찬가지로 눈에 핏발이 선 알렉스를 바라보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알렉스야말로 피곤한 것 같은데요. 자, 어서 누우세요.”
그렇게 기운 빠지고 노곤한 실랑이가 잠시 이어지고, 어느새 그들은 자연스럽게 여관방의 넓지도 좁지도 않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래서. 저는 아델라인이에요… 사랑하는 아델라인이에요…….”
아델라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질문하며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따듯한 몸을 끌어안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언제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아델라인이죠…….”
눈이 감긴 채, 노곤한 목소리로 답한 알렉스였지만, 아델라인은 그에 대해 물을 의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손과 달리 따듯한 알렉스의 품에 안겨, 잠에 빠져드는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