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선의는 선의로
이튿날도 저물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어느새 배에 익숙해진 아델라인은 선원들이 아침 점호를 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 옷을 갈아입고 선실 바깥으로 나왔다.
“…지금쯤이면 도착했으려나.”
시계를 바라보니 오전 6시. 선장의 말대로라면 지금쯤이면 트레포드가 눈앞에 다가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갑판으로 나가자, 멋진 풍경이 그녀를 맞았다.
아침 햇살을 받아 하루를 시작하는 거대한 항구와 그 항구에 가득 들어찬 범선들. 비록 이른 아침의 매서운 바닷바람은 아델라인이 무의식적으로 손에 입김을 불어 넣게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가슴은 콩닥거렸다.
드디어, 드디어 알렉스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델라인은 손을 입가로 가져가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췄다.
일주일 동안 알렉스는 어떻게 지냈을까.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비록 처음에는 알렉스의 편지에 써진, 그리고 두 줄 긋기로 지워 버린 ‘사랑하는’이라는 단어의 출처에 대해 추궁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시작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오직 기대감만이 아델라인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때, 갑판 위에 올라온 선장들과 그 간부들이 의논하는 소리가 아델라인의 귀에 어렴풋이 들렸다.
“그러니까 올드 트레포드로 가서 트레포드 항으로 육로 이동하는 게…….”
“여기서 뱃머리를 돌리면 역풍 맞고 태킹해야 하는데, 차라리 순풍 타고 안필드 항에 내려 주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냥 깡으로 밀어붙이면 안 됩니까?”
“공작님 이름에 누가 되는 일은 절대 안 된다. 책잡힐 일은 피해야지…….”
아델라인에게서 등을 보이며 의논을 이어 가던 선장과 간부들은 이내 아델라인의 시선을 느끼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가요? 혹시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그, 그것이…….”
선장은 잠시 말을 흐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현재 트레포드 항에 입항 통제가 걸려서 입항을 못 하고 있습니다.”
“입항 통제요?”
아델라인의 되물음에,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합 훈련에 참여하는 육군 병력을 수송할 함선들로 가득 차서 항구 수용량이 포화 상태인 데다가, 이를 호위하는 해군 전단 함선들이 인근 해역에도 통제를 걸었습니다.”
“…….”
선장의 설명에, 아델라인은 당황해서 항구를 바라봤다.
“그래서 지금 대책을 논의 중입니다, 아마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때, 한 척의 슬루프가 벨파스트호의 현측으로 다가왔다. 벨파스트호보다 짧고 통통한 슬루프의 갑판에 선 한 장교는 확성기를 들고 벨파스트호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벨파스트호, 여기는 HMS 헬리온. 현 해역은 북부함대 산하 소함대 그린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다른 항구로 돌아가라. 현재 트레포드 항의 수용량 한계로 인해 입항할 수 없는 상황이니, 올드 트레포드나 안필드로 돌아가라.”
해군 함장에게서 직접 통보를 받자, 선장도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올드 트레포드로 항로를 수정한다. 갑판장, 선원들 배치해.”
“알겠습니다. 선장님.”
선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돛을 펴는 동안 아델라인은 기억 속을 더듬었다. 어쩐지 들어본 것 같은 함명.
HMS 헬리온… 어?!
“저기, 장교분! 혹시 함장과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아델라인이 난간에 기대어 묻자, 귀족 영애가 있을 거로 예상하지 못한 장교는 잠시 얼을 탔다. 하지만 곧바로 확성기로 아델라인의 요청을 거부했다.
“영애, 죄송하지만 해역 통제는 상부의 지시입니다. 또한, 함장님께서는 야간 근무를 마치고 오침 중이십니다.”
그때, 바깥의 소란에 반응한 건지 슬루프의 승강구를 열고 한 사람이 갑판으로 나왔다. 그러자 슬루프의 갑판의 선원들이 경례를 하느라 일제히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아델라인은, 하품하며 대충 경례를 받는 함장과 눈이 마주쳤다. 함장도 아델라인을 알아봤는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추수제 때?”
* * *
“그때는 알아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로피츠 여사님.”
“아니에요. 편하게 아델라인이라 불러 주세요.”
“아닙니다, 저는 이쪽이 편합니다.”
벨파스트호와 HMS 헬리온의 조우 30분 뒤.
아델라인은 안드레이와 함께 벨파스트보다 작은 HMS 헬리온에 몸을 싣고 조용히 트레포드 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델라인은 함장실에서 윌포드 함장과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추수제 이후 어떻게 지냈는지, 프러포즈는 잘 되었는지… 소소한 대화를 주고 받다가, 화제는 어느새 알렉스로 옮겨 가 있었다.
“그러면 매닝햄 대위도 훈련에 참여하는 거군요.”
“별일 없을 거라는 걸 아는데도,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고 싶어서요.”
“그 마음 잘 알지요. 저도 그러거든요.”
윌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에 타 오랫동안 연인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신세니까 아델라인의 심정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때, 함장실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공녀님, 이제 함선이 접안을 준비합니다.”
“알겠어, 곧 나갈게.”
안드레이의 말에 답한 아델라인은 찻잔을 비운 뒤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아델라인과 악수를 나눈 윌포드는 그대로 함장실 한편의 침대로 쓰러졌다. 야간 근무했다고 했었지, 생각해 보니.
결국, 순식간에 잠에 빠져 버린 윌포드를 뒤로 하고 갑판으로 나가자, 부두에 접안한 게 아니라 연결 가교만 놓을 공간에 배를 붙인 모습이 보였다.
“가시죠, 서두르지 않으면 다시 자리를 잡아야 할 테니까요.”
안드레이의 말에, 아델라인은 서둘러 안드레이를 따라 가교를 건넜다. 그의 말대로, 아델라인과 안드레이가 가교를 건너 부두에 발을 디디자 헬리온은 한 소리 들을세라 그대로 가교를 잡아당겨 거둔 뒤 돛을 펴고 후다닥 멀어졌다.
작별 인사를 하기도 전에 떠나 버린 헬리온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아델라인은 안드레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육지로 올라오니 혈색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마치 배에 타고 있는 동안은 꾀병이라도 부린 것처럼.
“그동안 엄살이라도 부린 거야? 혈색이 금방 돌아오네.”
“뭐, 사람은 역시 땅을 밟고 살아야 하는 법이지요. 그나저나…….”
안드레이는 한숨을 내뱉으며 앞을 바라봤다.
그들의 앞에 펼쳐진 건 다름이 아니라…….
“제32 연대! 집합!!”
“제17 경기병 연대! 이쪽이다!”
“29 포병 연대는 언제 오는 거야! 걔네들 포 손발로 끌고 오고 있대?!”
“선두 대열 탄약 수송 마차가 망가져서 길이 막혔다는데요!”
“빌어먹을 땅개 놈들! 기껏해야 24파운드면서 그것도 못 옮기나! 우리는 68파운드 캐러네이드도 두손 두발로 옮기는데! 지금 안 타면 위에서 쿠사리 먹는 건 우리라고!”
형형색색의 제복을 입은 군인들 물결이 온갖 소리를 내며 부둣가를 넘어 시내까지 넘실거리고 있었다. 언뜻 보면 예측할 수 없는 혼돈 그 자체이지만, 조금만 유심히 보면 곳곳에 서 있는 군기와 서로 같은 소속임을 드러내 주는 제복이 그 혼돈 속에서도 규칙을 자아내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이 흐름을 뚫는 게 더 힘들어 보였다. 단단한 사람의 장벽이 눈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듯했다.
“…약간 무서울 정도네. 이제 뭘 해야 하지?”
“뭐, 일단 사령부를 찾아가 보죠. 사령부에서 라이플 여단 병력이 어디에 있는지 알면, 찾아가서 기다리든 아니면 만나든 하면 되니까요.”
안드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어깨에 멘 뒤 아델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중대장님 속상하실까 봐 팔짱 끼자는 말은 못 하니, 손목이라도 꼭 잡으십시오. 손목이 손을 잡는 것보다 더 단단합니다.”
안드레이의 말에, 아델라인은 안드레이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아델라인의 손을 말없이 한번 흔들어 본 안드레이는 마치 잠수부처럼 심호흡한 뒤, 눈을 뜨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갑시다.”
* * *
꾸벅. 꾸벅.
마차가 흔들리며, 졸음에 빠진 알렉스의 머리도 이리저리 힘없이 흔들렸다. 그러다 마차가 딱 멈춰 서자, 알렉스의 머리가 뒤로 확 젖혀지며 잠이 깼다.
“끄음… 뭔 일이야.”
알렉스는 찌뿌둥한 몸을 펴며 마차에서 내렸다. 앞을 바라보자, 길게 늘어선 대열이 길 위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알렉스는 한숨을 쉬며 마차 선두의 1소대장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래요?”
“저도 지금 파악 중입니다, 이게 한참 앞에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뭐, 짐마차가 넘어져서 시내 교통이 개판이 되었다라나.”
그 말에, 알렉스는 지도를 펴고 주변을 바라봤다. 시내는커녕 양옆으로 펼쳐진 건 추수를 마친 드넓은 밭과 목축지뿐인데. 이래서야 오늘 점심은커녕 저녁도 페미컨 염장 고기 비스킷 수프일 게 뻔했다.
“하아아… 일단 다들 나와서 몸 좀 풀라 그러자. 어차피 가다 서다 할 텐데.”
“알겠습니다.”
사실상 트레포드가 가까워지며 마차의 역할은 ‘빠르고 편하게 가는 것’에서 ‘편하게 짐 싣고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마차를 타든 말을 타든, 두 발로 걷는 보병들의 속도에 맞춰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떨 때는 두 발 두 팔로 수 톤짜리 대포를 끄는 포병대의 속도에 맞춰 느릿느릿 기어가야 하기도 했으니. 알렉스는 암담한 현실에 손으로 눈 앞을 가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델라인이 보고 싶었다. 아델라인이 자신 앞에 나타난다면 어제 자신이 다짐했던 것처럼 사랑 고백은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 정도 발이 묶여 있을 때, 저 멀리 앞에서 알렉스와 같은 진녹색 제복을 입은 라이플맨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1대대의 와펜을 오른팔에 붙인 라이플맨은 알렉스를 비롯한 파견 중대를 보더니 속도를 더욱 높여 달려와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충성. 오랜만이십니다, 선임 위관님.”
“오랜만이네. 1대대는 벌써 도착했어?”
“1대대야 어제 도착했지요. 지금 앞에 포병대 탄약 마차가 퍼져서 부대별로 우회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대대장님께서 중대장 늦을 것 같으면 도보로 오라는데요. 빌리 미첼 중위랑 함께.”
라이플맨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옆에 있던 1소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알겠어. 1소대장, 노먼 중위에게 나 먼저 도보로 간다고 전해. 노먼 중위가 지금부터 중대를 통솔한다.”
“알겠습니다. 트레포드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