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89화 (89/200)

89화 지금, 찾아갑니다

어느새 시간은 해가 뉘엿뉘엿 져 가는 저녁. 수도에서 멀어져 트레포드 항까지 3분의 1지점을 온 파견 중대의 마차 대열은 한 역참에 멈춰 섰다.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서자, 몇 시간 동안 짐칸에 찌그러져 있던 대원들은 차례대로 포장마차에서 나와 굳어진 몸을 풀었다.

“끄으으… 힘들다아…….”

“아이고, 죽겠네.”

알렉스도 마찬가지. 마차에서 나온 그는 몸을 쭉쭉 늘이며 굳어진 몸을 푼 뒤 대원들을 집합시켰다.

“모두 집합! 각 소대별로!”

알렉스의 외침에, 대원들은 부지런히 자신의 소대로 찾아들어 갔다. 마차 대열 맨 뒤에 있던 베르티에와 그 부하들도 미리 안내받은 대로 대원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지금부터 임무 하달한다. 1소대, 2소대는 역장에게 안내받아서 공터에 숙영지 꾸리고, 3소대는 배식 준비하자. 본부소대와 외인 소대는 마차 점검하고 땔감 좀 구해 오고. 장교들은 잠시 따라와.”

“알겠습니다.”

알렉스의 지시에, 대원들은 소대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사이, 알렉스는 장교들을 이끌고 길가의 도랑으로 내려가 넓적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다들 자리에 앉도록. 짧은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러자 장교들은 저마다 바위를 하나씩 골라잡아 앉았다. 아직 라이플맨 틈바구니에서 적응하느라 반쯤 얼빠져 있는 베르티에만 허둥지둥거리다 결국 애매한 바위에 몸을 기댔다.

“서로 통성명부터 하자고. 이쪽은 오스카 미셸 베르티에 중령. 얼마 전까지는 도약병 연대장, 현재는 프랑크 왕국 대사관 주재무관단장 보좌관…이지만 지금 당장은 내 따까리, 빌리 미첼 중위. 명목상으로는 본부소대장.”

알렉스의 소개에, 베르티에를 제외한 모든 장교가 급히 고개를 돌리고 끅끅 웃음을 참았다. 잠깐 시간이 흐르고, 소대장들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알렉스와 베르티에를 바라본 뒤 손을 내밀며 자기소개를 했다.

1소대장, 2소대장, 3소대장, 그리고 외인 소대의 노먼 중위까지. 악수와 통성명을 마치고 나자, 알렉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허리를 폈다.

“내일 아침 기상 시간은 07시. 트레포드 즈음 가면 길이 막힐 테니까 내일은 열심히 가 둬야지. 애들에게 커피 적당히 마시고 일찍 자라 그래라. 해산.”

“알겠습니다.”

알렉스의 지시에, 노먼을 비롯한 장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들의 소대원에게 향했다. 모두가 돌아가자, 알렉스는 바위에 앉은 채 품속에서 편지지와 펜을 꺼내 들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알렉스는 천천히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되짚어갔다. 마차에 앉자마자 잠에 빠져서, 일어나 보니 벌써 해는 중천에 떠 있었고.

비몽사몽 한 채 점심을 먹고, 마차에서 책 좀 읽다가 멀미 나서 눈 붙이고. 일어나 보니 4시. 잠도 안 와서 맞은편에 앉은 스워포드와 함께 체스를 두고.

“오늘 한 거 더럽게 없구만.”

알렉스는 한숨을 푹 쉬며 하늘을 바라봤다. 편지를 써야 오늘이든 내일 아침이든 역장에게 맡기고 길을 떠날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파병 갔을 때 동료들 편지 쓰는 거나 좀 어깨너머로 봐 둘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늘 편지를 안 쓸 수는 없었기에, 사소한 소재를 전부 끌어모아 머릿속에서 정리하며 첫 문장을 썼다.

[아델라인에게.

수도를 떠나온 지 첫날 저녁이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잘 지내셨나요? 설마 저를 보고 싶어서 따라오고 있는 중은 아닐 거로 생각합니다…….]

* * *

동 시각. 수도에서는 아델라인이 외출 준비를 마친 채 현관에 나와 있었다. 그 뒤를 따라 나온 나이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델라인을 향해 물었다.

“진…짜 가시게요?”

“위원회에는 잘 말해 줘. 부탁할게. 사정을 적어 놓은 편지도 써 놓았으니까 괜찮을 거야. 자, 받아.”

아델라인은 나이아에게 편지를 건넸다. 마일즈 의원과 커크만 교수에게 전하는 말이 편지에 담겨 있었다. 만약 중요한 결정 사항이 있다면, 나이아에게 자신의 의사 결정권을 위임한다는 내용이.

이미 그 내용에 대해 아델라인에게 들었던 나이아였지만, 걱정을 덜어 내긴 힘들었다. 나이아는 아델라인의 편지를 받으면서 물었다.

“왔다 갔다 하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기시면 어쩌시려고…….”

“길어 봤자 일주일인걸? 얼른 다녀올게.”

“…몸조심하세요. 꼭.”

“약속할게. 그동안 이곳을 잘 부탁해.”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나이아를 두 팔로 안았다. 그사이, 마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짐을 싣던 안드레이가 아델라인에게 다가왔다.

“준비되었습니다.”

안드레이의 말에, 아델라인은 품속에서 나이아를 풀어 준 뒤 마차로 향했다. 안드레이의 옷차림은 진녹색 제복이었다.

비록 모자챙에 살짝 가려져 있긴 했지만, 로피츠 공작가의 사용인으로서 항상 눈웃음을 짓던 눈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안드레이가 아니라 레이크 하사로 불리던 시절로 돌아온 듯했다.

“지시하신다면, 지시하신 대로.”

아델라인은 그런 안드레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안드레이에게서 알렉스의 얼굴을 겹쳐 본 그녀는 치마를 양손으로 잡아 살짝 들어 올리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탁할게요, 저를 트레포드 항까지… 아니, 알렉스에게 데려다주세요. 최대한 빠르게.”

그러자 안드레이도 따라서 고개를 숙이며 아델라인의 부탁에 답했다.

“지시하신 대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드레이는 아델라인을 마차로 이끌었다. 마차 안에는 아델라인의 가방, 안드레이의 가방, 그리고 가면서 먹을 요깃거리가 담긴 바구니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마차 위에는 여분 마차 바퀴 등의 부품이 실려 있었다.

공작가의 마차는 항상 최고의 상태로 관리되고 있었지만, 만약 마차의 부품이 망가져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이 닥치면 큰일이므로.

아델라인이 먼저 마차에 몸을 싣고, 그 뒤에 안드레이가 마차에 타며 문을 닫자 마부가 말들을 채근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수도를 빠져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느새 수도의 높은 건물이 차지하던 창밖의 풍경은 들판과 농가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마부석의 랜턴 빛이 비치는 범위는 넓지 않았지만, 찬란한 달빛은 랜턴이 비추지 못하는 풍경을 밝게 비췄다.

그때, 마차의 양옆으로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수도사단 직할 기병대의 제복을 입은 기병대원들이 마차 양옆에 밀착한 채 호위 대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 중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랜턴을 들어 창문을 통해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을 살폈다. 아델라인의 얼굴을 확인한 기병 장교는 이내 안드레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라이플 여단 고유의 진녹색 제복과 안드레이의 얼굴을 확인한 장교는 그를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사단장. 호위. 지시. 목적지까지. 유도에 따를 것.’

그러자 안드레이는 가볍게 모자챙을 잡고 들어 보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기병 장교는 손을 들어 경례하고 다시 대열로 돌아가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기병들은 마차 양옆으로 3기씩, 앞으로는 2기, 뒤로도 2기라는 정석적인 에스코트 대형을 갖췄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마부에게 기병 장교의 지시를 전달하고 안심시킨 안드레이는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이런 건 언제 준비한 건가요?”

분명 점심쯤에 안드레이에게만 넌지시 부탁한 일이었는데, 언제 이런 준비를 마쳤는지 궁금했다.

그러자 안드레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에는 경로 설정을 위한 주변 자료를 얻기 위해 구호소 근처에 자리 잡은 수도사단 행정지원단을 찾아갔지요. 근데 마침 헤네스 소장이 행정지원단을 방문하셨더라고요.”

수도사단장 헤네스 소장. 직접 본 건 그린우드를 따라 구호소에 갔을 때 딱 한 번뿐인데. 아델라인은 그때 봤던 헤네스 소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안드레이를 바라봤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런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치 말끝에 ‘참 쉽죠?’를 붙여야 할 것 같은 안드레이의 표정에, 아델라인은 헤에… 하는 표정으로 답을 대신했다.

잠시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흐르고, 출출해진 아델라인은 나이아가 챙겨 준 바구니에서 러스크를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혼자 먹기 무안하니 안드레이에게도 하나 건네준 그녀는 러스크를 오물오물 씹으며 생각했다.

그때 러스크 보면서 먹은 연극… 아니, 러스크 먹으면서 본 연극의 내용이 뭐였더라.

분명 오래되지 않은 기억이었지만, 생각나는 게 없었다. 오직 생각나는 건…….

서걱.

‘맛있네요. 누가 만든 거예요?’

태연하게 자신의 입에 물려 있던 러스크를 베어 먹던 알렉스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아델라인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가방에 어떻게 넣었는지 모를 카빈을 꺼내 무릎에 올려놓고 정비를 하던 안드레이는 그 모습을 보며 아델라인을 향해 물었다.

“중대… 아니, 매닝햄 대위에 대해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편한 대로 불러요, 안드레이도 지금 간만에 분위기 내고 있으면서. 이럴 때라도 편한 대로 불러야지.”

아델라인이 안드레이의 제복을 바라보며 말하자, 안드레이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떨쳐 내지 못한 그리움이 남아 있나 봅니다. 미우나 고우나 30년 인생 중 절반 넘게 있었던 군대니까요. 덕분에 나이아를 남부럽지 않게 뒷받침해 줄 수 있었고.”

아델라인은 안드레이를 바라봤다. 마차 안의 랜턴 빛에 비친 안드레이의 얼굴에는 고생한 기색이 주름마다 새겨져 있었다.

“안드레이는… 어쩌다 라이플맨이 된 거야?”

아델라인의 물음에, 안드레이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타이밍이면 중대장님에 대해 물어보실 줄 알았는데.”

“…알렉스의 이야기는 알렉스에게 직접 물어볼 거야. 지금은 내 사람 이야기를 들어야지. 이렇게 둘만 있을 기회도 흔치 않고.”

그 말에 안드레이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은 뒤,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내며 카빈을 기대어 놓은 뒤 어깨를 으쓱였다.

“나이아에게는 말하지 말아 주십쇼, 결코 깨끗하거나 숭고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안드레이는 천천히 입을 열어, 이야기의 운을 띄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