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일정 하달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붉게 물들었던 낙엽은 순식간에 져 버렸고, 텅텅 비었던 관사는 다시 대원들로 가득 들어찼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온 첫날 아침, 식사를 마친 알렉스는 집무실로 돌아와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들을 내려다봤다. 그동안 미뤄진 업무를 처리하고, 또 앞으로 있을 임무도 준비해야 했다.
그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온 장교와 부사관들이 하나둘씩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끝으로 의약품 검수를 마친 팩이 문을 닫고 들어오자, 넓지 않은 집무실이 사람으로 꽉꽉 들어찼다.
“다들 푹 쉬었나?”
“네!”
“다행이군. 모두 집중. 추수절 동안, 진행된 안건이 있다.”
알렉스는 대원들을 바라보며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평소와 사뭇 다른 분위기에, 집무실 안의 다른 이들은 모두 알렉스를 바라봤다.
“우리 라이플여단 파견 중대는 연말에 진행되는 연합 훈련에 파견될 예정이다. 위치는 프룬츠베르크 공국. 오베른 시 동편의 국경 지대 평야다. 국경 너머에서는 프랑크 왕국 군을 비롯한 동맹군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훈련을 진행할 것이다.”
“…….”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연합 훈련에 참여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1대대와 함께 오베른 시에 진입, 프랑크 왕국 군 제3 도약병 연대와 함께 경매장 강습 작전을 실시할 예정이다.”
알렉스의 말에, 대원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프랑크 왕국 군과의 공조라니. 그것도 라이플맨들이 주야장천 상대하던 도약병들과.
그때, 그들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때마침, 그 의문을 해소해 주기 위해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알렉스에게 질문했다.
“지휘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우리 여단 선임대대장, 1대대 아서 스튜어트 대령. 차순위 지휘권은 제3 도약병 연대장 아드리앙 르페브르 대령. 그 뒤론… 세부 결정 사항이 없다. 거기까지 내려가면 각자도생이 훨씬 생환 가능성이 높겠지.”
알렉스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 개다. 첫째.”
알렉스는 세 개를 들어 보이며 그들에게 말했다.
“지난 수도 남부 암시장 강습 작전 자료 정리해서 한 번 더 디브리핑하고, 프랑크 왕국 대사관의 베르티에 중령에게 전달한다. 검열할 거 검열해 놓고. 그쪽에서도 본국에서 자료 받는 대로 주기로 했어. 아마 3일 정도 뒤에 올 것 같은데.”
“무슨 자료 말입니까?”
“그쪽에서 보름달 계획 관련 인원 체포 작전과 탈출한 인원 추적 작전 진행한 거. 물론 그쪽도 일정 부분 검열해서 오겠지. 아무튼 이게 첫 번째. 2소대장이 이거 맡아서 진행할 수 있도록. 대사관 가기 전에 보고해.”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약지를 접었다.
“두 번째는, 지금 중대 구성이 본부소대, 외인 소대, 그리고 1, 2, 3소대인데. 프랑크어를 비롯해서 외국어 할 줄 아는 인원 명단 뽑아서 정리. 이 부분은 1소대장이 해 줘. 해외에서 진행하는 작전이니, 각 소대마다 골고루 배분될 수 있도록 재배치할 거야.”
알렉스가 중지를 접으며 1소대장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마지막으로. 장비 망가진 거 있으면 관사 떠나기 전에 인수해야 하니까 미리미리 보급 신청할 수 있도록. 특히 외인 소대는 이걸 우선적으로 진행해 주세요. 규격 외 장비는 재보급에 시간이 꽤 걸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모두 해산.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서둘러서 진행할 수 있도록.”
알렉스의 말에, 모두가 차례대로 알렉스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자 가득 들어찼던 집무실이 순식간에 휑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조용해졌다. 그 빈 집무실을 멍하니 바라본 알렉스는 고개를 저은 뒤, 차를 끓였다.
그러나 차를 다 끓여도, 그리고 그 차를 목구멍으로 넘겨도 산만해진 정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의욕이 점점 줄어들었다.
알렉스는 달력을 바라봤다. 여러 일정이 기록되어 있었고, 그중에는 아델라인과의 수업 일정도 있었다.
앞으로 세 번. 3주 뒤에는 자신도 트레포드 항으로 가, 수송선에 몸을 싣고 프룬츠베르크 공국으로 가야 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을 끝내고 다시 수송선을 탄다면, 아마 해가 넘어가 있겠지.
분명 새해에는 새해 기념 연회가 열릴 텐데, 아델라인의 파트너는 누가 될까.
알렉스는 찻잔을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을 이어 가 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델라인의 옆에 자신 이외의 사람이 서 있는 장면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젠장.”
알렉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앉아서 시간 낭비하는 건 자신의 성격에 더럽게 안 맞았다. 알렉스는 자신의 라이플을 집어 들어 차근차근 분해하기 시작했다.
강선은 닳지 않았나. 개머리판의 수납공간에 넣어 둔 천 패치는 아직 넉넉한가. 가늠자와 가늠쇠는 여전히 곧게 뻗은 일직선을 유지하고 있나. 총검을 꽂는 장치는 헐겁지 않은가. 부싯돌을 내리치는 공이의 스프링은 멀쩡한가.
알렉스는 그 모든 것을 확인한 뒤, 강중유를 천에 묻혀 부품들을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탄매와 먼지가 닦이며 부품들은 제 색을 되찾았지만, 수없이 새겨진 흠집만큼은 집요하리만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특히 총열과 그를 받치는 목제 총몸에는 수많은 날붙이를 막고 되받아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몇 번이고 새 라이플을 마련할까, 고민하다가도 결국 포기하게 되는 건 물론 그들이 사용하는 라이플이 머스킷보다 훨씬 비싼 것도 있겠지만.
“언젠간 교환 신청해야지.”
수십 번을 부딪쳐도 비틀어지지도 휘지도 않은 총열과 금 한 번 가지 않은 총몸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동질감이 들어 쓰던 교환 신청서도 접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어느새 방 안을 가득 채운 강중유의 냄새에, 알렉스는 창문을 연 뒤 라이플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부품 하나하나의 상태를 다시 살펴 가며 조립한 끝에, 라이플의 공이에 날카롭게 다듬은 부싯돌을 물렸다.
그때, 집무실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노먼 중위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요.”
그 목소리에, 알렉스는 라이플을 책상에 기대어 놓으며 노먼을 바라봤다. 그렇게, 그는 다시 당장의 현실로 돌아왔다.
다가올 이별에 대한 고민은, 라이플과 함께 책상에 기대어 놓은 채.
* * *
추수절이 끝나고, 의회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추수절 동안 세상이 멈춘 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아침은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가족들과 휴일을 즐기다 돌아온 그린우드도 마찬가지. 각 위원회의 업무 진행 상황과 분위기를 전해 들은 그린우드는 마지막 순번인 마일즈와 대화를 하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장성 출신은 다르군요.”
“간단한 눈속임일 뿐입니다. 남부당 당수와 황후를 찔러 시선을 돌리고, 그사이 커크만 교수와 친분이 있는 피츠허버트 의원을 설득한 것이지요.”
그린우드는 커피를 홀짝이며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환갑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여전히 그의 머리는 혜안을 내놓았다.
“황후는 로피츠 여사를 건드렸다가 뒤로 물러나야 했던 경험이 있었으니, 여사가 황궁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경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남부당 당수는 의원의 접견 신청을 남부당 전체를 회유하려는 시도로 해석했겠군요.”
“어차피 정족수만 채우면 되는 판이었습니다. 물론… 커크만 교수가 설득해 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마일즈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벽시계의 시침은 어느새 2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마일즈를 따라 시계를 본 그린우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제가 의원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나 보군요.”
“아닙니다. 어차피 아래층이니.”
마일즈도 따라서 일어나며 고개를 돌렸다. 아마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느라 목이 뻐근했으리라.
으레 그러하듯 그린우드와 악수를 나눈 마일즈는 집무실을 나서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아델라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좋은 오후입니다, 의원님.”
“좋은 오후네, 여사. 커크만 교수는?”
“잠시 바람 좀 쐬고 오신다 하셨습니다.”
마일즈는 아델라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 안을 둘러봤다. 일곱 명 자리에, 사람의 흔적을 보이는 자리는 오직 셋뿐이었다.
“사람이 많이 비어 보이는데.”
“세 분은 이미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을 했고, 한 분은 오늘 건강상의 이유로 위원장님께 의사 결정권을 위임하셨습니다.”
“…일이 두 배로 느는구만. 무책임한 인간들.”
마일즈는 그렇게 말하며 아델라인이 건넨 네 통의 서신을 받아들었다. 떳떳하지 못한 인간들. 마일즈는 한숨을 한 번 푹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이 제 몫은 하는 사람들이니, 위원회 자체는 엎어질 일이 없을 듯했다.
“아무튼 고맙네, 앉게. 커크만 위원이 오면 회의를 진행하지.”
그때, 아델라인이 마일즈를 향해 질문했다.
“의원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하게.”
“…혹시 근시일 내로 파견 중대가 멀리 떠나는 일이 있을까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마일즈는 곰곰이 생각했다. 프룬츠베르크 공국에서 진행되는 연합 훈련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황궁에 주둔해 있는 파견 중대가 머나먼 프룬츠베르크 공국까지 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이것도 확실치 않은 가설이라, 마일즈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없을 거로 생각하지만, 전역한 지는 4년 가까이 되어서 말이지. 그래도 내 한번 알아보겠네.”
마일즈의 대답에, 아델라인은 한결 안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을 본 마일즈는 머릿속에서 어떤 단서들이 맞물리는 걸 포착하고는 아델라인에게 물었다.
“혹시 매닝햄 대위가 멀리 간다고 말했나? 보직이 변경된다든지.”
마일즈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저었다. 보직 변경도 아니고, 진급에 따른 인사이동도 아니면.
마일즈는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가설. 마일즈는 마치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처럼 노련하게 표정을 숨긴 뒤, 다시 확인이라도 해 주듯 아델라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내 한번 알아보겠네. 지금은 당장 눈앞에 놓인 일에 집중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의원님.”
아델라인의 미소를 보자, 마일즈의 마음속에서는 불안감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직감이, 그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