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한 곡 함께 추시겠습니까?
한참을 뛰다시피 걸었을까. 아델라인은 차오르는 숨에 그만 발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허억… 허억…….”
아델라인이 멈추자, 손을 잡고 함께 뛰었던 알렉스는 그 자리에 바로 멈추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아델라인과 달리, 알렉스의 호흡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누가 보면 동전 하나 던져 주고 도망치는 사람 같습니다.”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이 얼굴을 붉혔다. 너무 허겁지겁 도망치듯 달렸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약간 부끄럽기도 했다. 그때, 알렉스가 아델라인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좋습니다. 아델라인다워서.”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간신히 식혔던 얼굴이 다시 뜨거워지는 듯했다. 아델라인다워서 좋다는 그 한 마디가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한껏 붉어진 얼굴을 한 채 그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아델라인답다는 게… 뭔데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눈을 감고 답했다.
“착하고, 순진하고, 한결같은 모습이요.”
알렉스는 눈을 뜨고 다시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은, 아델라인 당신의 모습이요.”
“…….”
아델라인은 자신의 손을 볼에 가져다 댔다. 화끈화끈. 손에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고, 머릿속은 하얗게 백지로 변해 갔다.
그때, 그 하얗게 변한 머릿속으로 음표가 하나씩 통통 튀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델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알렉스의 팔을 잡고 음악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던 시장 가운데의 광장이 어느새 빈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공간에는 악단만이 자리해 연주하고 있었다.
마치 사람들을 기다리는 듯, 끊어질 듯 말 듯 계속 이어지는 곡을 연주하고 있자, 사람들이 짝을 지어 한 쌍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가, 그다음에는 일곱 살 정도 될까 말까 하는 아이들이, 그다음에는 간만에 고운 옷을 차려입은 중년의 부부가, 그리고 해군 정복을 입은 남자와 그 연인이.
그 광경을 본 알렉스가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도 갈까요?”
“네?”
“파트너라고 해도, 한 번도 같이 춤춰 본 적 없잖아요, 우리. 연습 때 빼고.”
“그건…….”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 행사에서는 알렉스가 일하느라, 다른 일정에는 또 다른 잡다한 이유로. 그리고 사교 시즌 마지막 날의 수여식 때는 알렉스가 다쳐서 나타나, 차마 춤을 출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렇네요. 연습은 열심히 해 놓고서. 약간 억울하기까지 한데요.”
“그럼. 한 곡 함께 추시겠습니까?”
알렉스가 허리를 숙이며 춤을 청하자,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손 위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인의 허락을 구한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 즉석에서 만들어진 무도회장의 빈자리로 들어갔다.
아델라인과 알렉스까지 들어오자, 악단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다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경쾌하고 활발한 곡이 시작되자, 서로 짝지어 선 사람들은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박자에 맞춰 박수를 치며 흥을 돋웠다.
아델라인과 알렉스는 마치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경쾌하게 발을 놀리며 음악에 맞춰 움직였다. 두 사람이 사람들 앞으로 다가갈 때마다,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기 많은데요, 아델라인?”
“알렉스 보고 환호하는 거 아니에요?”
“에이. 보니까 곧바로 아델라인에게 한 곡 청하려고 하는 청년들이 줄을 섰는데요.”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바싹 붙으며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그래서, 절 놓아줄 거에요?”
아델라인의 장난스러운 미소에, 알렉스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제가 놓아줄 것 같아요?”
그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살짝 좌우로 저었다. 아델라인도 오늘만큼은 알렉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춤을 계속 추자, 악단의 연주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아델라인과 알렉스는 다음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처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춤을 추러 안으로 들어가자, 오히려 바깥은 춤추기 전보다 약간 한산해져 있었다. 다음 곡이 시작되자, 아델라인은 다른 사람처럼 박자에 맞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황궁 연회보다 좋네요.”
아델라인의 소감에, 알렉스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때, 알렉스의 발 앞으로 조그만 보석함 하나가 굴러왔다.
알렉스가 파란색 천으로 감싸진 보석함을 집어 들자, 아델라인은 계속 박수를 치며 보석함을 바라봤다.
“뭐에요, 그건?”
“어디서 굴러온 것 같은데…….”
알렉스가 보석함을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자, 한 쌍의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본 아델라인이 주변을 둘러봤다.
“이거… 누군가 프러포즈를 위해 준비한 반지 같은데요?”
“그렇군요. 이니셜도 적혀 있는 걸 보면.”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반지 안쪽의 각인을 들여다봤다.
[J. W.]
알렉스가 잠시 이니셜로 이름을 조합해 보는 동안, 그의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여기 어디쯤 떨어졌을 텐데…….”
그 중얼거림에, 알렉스와 아델라인은 동시에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바라봤다. 해군 정복을 입은 청년이 바닥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초조한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알렉스는 주머니에 보석함을 넣으며 그를 불렀다.
“함장!”
그 제복 위에 얹어진 계급장을 본 알렉스의 외침에, 그 남자는 곧바로 알렉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름이 뭡니까?”
“제임스 윌포드입니다, 대위. 혹시 이 근처에서 이만한 보석함을 찾지 못했습니까?”
“붉은색?”
알렉스의 물음에, 윌포드는 고개를 저었다.
“푸른색입니다. 안에 반지가 한 쌍 들어 있지요.”
그 답을 들은 알렉스는 주머니에서 보석함을 꺼내 툭, 던졌다. 윌포드가 두 손으로 조심스레 보석함을 받아들자, 알렉스는 그를 향해 질문했다.
“오늘 고백하는 겁니까?”
알렉스의 물음에, 내용물을 확인한 윌포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모레가 되면 트레포드 항으로 가서 제 배를 인도받게 될 예정입니다. 그 전에… 고백하는 거지요. 어엿한 함장이 되었으니.”
“함 이름이 뭡니까?”
“HMS 헬리온입니다. 18문 슬로프지요.”
“독특한 함명이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행운을 빌지요.”
알렉스의 응원에, 윌포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석함을 품속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귀관의 이름을 못 들었군요.”
“알렉스, 알렉스 매닝햄 대위입니다.”
“매닝햄 대위. 좋은 추수절 되길 바랍니다.”
알렉스가 손을 내밀자, 윌포드는 그 손을 잡고 힘차게 악수를 한 뒤 뒤를 돌아 허겁지겁 멀어졌다. 아마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연인을 향해 가는 것이겠지.
“…이번 추수절은 좀 특이하네요. 자꾸 선행하게 되네.”
“뭐, 사람들을 돕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 언젠가 다시 그 선행이 돌아올 수 있는 거고.”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아델라인 다운 말이었다. 착하고 순진한 모습이.
알렉스는 곡이 바뀌고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며 아델라인에게 물었다.
“아델라인은 어떨 것 같아요?”
“뭐가요?”
“…방금 저 해군 장교처럼. 곧 떠나야 하는 사람한테 고백을 받으면 어떨 것 같나요?”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다시 시작된 노래에 맞춰 박수를 치며 생각에 빠졌다. 박수를 얼마나 쳤을까,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바라보며 답했다.
“일단… 기쁠 것 같아요. 고백해 준다는 게.”
알렉스의 질문에서,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앞에 놓인 상황을 간파했다. 조만간 멀리 떠나야 하는 일이 생길 것이라고. 아직 알렉스는 그와 관련해서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과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감정이 묻어나 있었다.
알렉스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델라인은 진심을 담아,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걱정되겠죠. 군인이라는 게 항상 안전한 일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연락이 오랫동안 닿지 않으면 걱정할 거예요. 정말 많이… 걱정할 거예요. 그래도.”
아델라인은 왠지 모르게 북받쳐 오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알렉스와 눈을 마주쳤다.
“힘들 때마다, 저를 생각하면서 버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쁠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알렉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잠시 아델라인에게서 시선을 피한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기도 하고, 미간을 손가락으로 누르기도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본 아델라인은 확실히, 그가 언젠간 먼 길을 떠나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길에는 위험이 함께 하리라는 것도. 그래서 알렉스가 저렇게 고민에 빠져 있는 거겠지.
“계약 내용은 알고 있죠?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늦지 않게 말해 주기. 이유는 안 말해 줘도 되니까.”
알렉스는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바라보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촉하지는 않을 거니까. 늦지 않게 말해 줘요.”
그 미소가 너무 해맑아서, 알렉스는 가슴이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애써 미소를 짓는 아델라인의 얼굴에, 죄책감이 절로 들었다.
“…알겠습니다.”
알렉스가 끄덕이자,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팔을 끌어안고 거리로 향했다.
“자, 저녁이 되었으니까, 뭣 좀 먹고 다시 춤춰요. 아직 추수절이 끝난 게 아니잖아요? 저거 맛있어 보인다.”
아델라인이 급히 화제를 전환하는 게 느껴졌지만, 알렉스는 굳이 트집을 잡지 않고 그녀의 뜻대로 따랐다. 그녀의 말대로, 추수절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아직 한 달이란 시간이 남아 있었고, 그동안 아델라인과 함께할 기회도 많았다.
“알렉스가 사 줄 거죠? 저 가져온 돈의 절반이나 넘게 써 버려서. 알렉스는 저보다 돈 많이 벌잖아요.”
아델라인의 뻔뻔한 미소에,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뱉으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저렇게 해맑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얼굴에도 다시 미소가 깃들었다.
“그래요, 그래도 먹은 만큼 숙제도 열심히 하는 겁니다?”
“…이러기 있어요? 너무해! 먹을 때는 건드리는 거 아니라는데.”
아델라인의 가벼운 항의에, 알렉스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그러니까 열심히 먹고, 열심히 공부하세요.”
‘제가 다시 당신에게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