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추수제 아침
“…그래서 수수께끼의 답은 진짜 안 알려 주는 거야?”
“알게 될 거예요, 이제.”
아델라인의 물음에, 나이아는 머리를 빗겨 주며 답했다. 아델라인의 부스스한 머리도 이내 순식간에 정돈되기 시작했다. 그사이 다른 시녀들은 어제 의논했던 드레스를 꺼내 왔다. 노출이 많거나 화려한 드레스들을 제외한, 단정하고 차분한 드레스 중 하나였다.
나이아는 아델라인의 머리를 리본으로 깔끔하게 묶은 뒤 드레스를 바라봤다. 드레스에 달린 훈장의 존재는 그 어떤 보석 장신구보다 빛났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장신구를 조금 알아볼까요?”
“괜찮아. 용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 이 정도 드레스로도 충분해.”
아델라인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드레스를 입었다. 푸른색의 드레스는 별다른 장신구 없이도 그녀의 미모를 뒷받침했다. 지금 아델라인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그래도 그녀가 가지고 있던 장신구가 차지하던 빈자리가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나이아의 표정을 본 아델라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조금은 남겨 둘 걸 그랬나.”
“아끼시는 거 몇 개는 남기고 처분하시지 그랬어요.”
나이아는 그렇게 말하며 드레스의 매듭을 묶었다. 아델라인이 거울 앞에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자, 제가 생각하기에도 만족스러운 모습이 나타났다. 알렉스의 수수한 차림에 비하면 이 정도도 충분히 화려한 것 같았다.
“이제 가자. 사교 시즌 때처럼 사람들이 많이 몰릴 거야.”
“알겠습니다. 마차가 아래에서 대기 중입니다. 공작 각하께서는 먼저 출발하셨습니다.”
나이아의 말에, 아델라인은 천천히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현관으로 나섰다. 나이아와 아델라인이 마차에 오르자, 마부는 계단을 걷은 뒤 마차를 몰아 저택을 나섰다. 길가의 나무들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고, 거리는 여느 때보다 분주하고 활기찼다.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 황궁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간단한 검문을 거친 뒤 알현 궁 앞에서 마차를 세우자, 아델라인은 마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때, 붉은색 제복을 갖춰 입은 알렉스가 아델라인을 맞았다.
“오늘은 안 늦었네요, 오면서 정답은 생각해 봤어요?”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옅은 한숨을 쉬며 미소를 지었다.
“그냥 포기했어요. 대체 뭐길래 나이아도 그렇고, 꼭꼭 숨기는지.”
“실망하진 않을 거예요. 걱정 마요.”
알렉스는 그리 말하며 아델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델라인은 그 손을 살포시 잡으며 알렉스와 함께 걸음을 내디뎠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도착해 있던 이들의 대화 소리가 귀를 가득 메웠다. 아델라인과 알렉스는 서로를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현 장 구석으로 향했다. 사교 시즌 때처럼,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드레스 잘 어울리네요. 직접 고른 건가요?”
“고마워요, 나이아가 드레스를 골라 줬어요. 이제 가을이니 여름에 입던 드레스로는 추울 테니까요.”
“나이아가 안목이 있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잠시 잡담을 이어 가던 중, 두 사람에게 베르티에가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대위. 그리고 여사님도. 그동안 안녕하셨는지.”
베르티에가 아델라인에게 고개를 숙이자, 아델라인도 따라 고개를 숙여 답했다.
“안녕하세요, 보좌관.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본국과 연락하고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 보니, 대사관과 관사만 오가는 나날들이었지요.”
베르티에는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잠시 이 친구를 빌려 가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바라봤다. 알렉스는 잠시 베르티에와 눈을 마주친 뒤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주세요.”
“알겠어요. 다녀와요.”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허락을 받은 뒤, 알현 장 바깥으로 베르티에와 함께 나갔다. 혼자 남은 아델라인은 가만히 구석에 서서 알렉스를 기다렸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러 간 걸까. 아델라인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갈 대화를 추측해 보며 위를 바라봤다. 파견 중대의 라이플맨들이 대기하고 있던 간이 통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반대로, 알현 장 가장자리에는 마치 과시라도 하듯 알렉스보다 화려한 제복을 입은 친위대원들이 뻣뻣한 자세로 서 있었다. 병정 인형. 딱 그 단어가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때, 영애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피오나와 눈이 마주쳤다. 피오나의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친 아델라인은 시선을 돌렸지만, 피오나는 상대에게 양해를 구한 뒤 아델라인에게 다가왔다.
“좋은 오전입니다, 여사님.”
피오나가 먼저, 살짝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피오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이들까지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델라인은 으레 하던 대로 고개를 숙이려다, 허리를 살짝 숙여 피오나의 장단에 맞췄다.
“좋은 오전이에요, 영애.”
“재건 사업 지원 예산안이 통과된 걸 축하드립니다.”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제가 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아델라인의 말에, 피오나는 아델라인에게 한 발자국 다가와 고개를 저었다.
“겸손하시네요. 처음으로 구호소에 식량을 전달하고, 그 이후에도 재건위원회의 위원으로서 참여하셨으면 조금은 내보이셔도 될 텐데.”
아델라인은 피오나를 향해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사업에서 탈락한 루멘시아 백작가의 외동딸이, 스틸웰 공업에 표를 던진 자신에게 호의를 가질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협조가 없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극히 제한적이었겠지요. 아, 저번에 전해 주신 곡물은 잘 사용되었습니다. 기여에 감사를 표합니다.”
아델라인이 마치 철벽을 치듯 단호한 태도를 취하자, 피오나는 태도를 바꿔 고개를 푹 숙였다.
“…제 가문이 무엇이 부족했나요?”
피오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몇몇 사람들은 안타깝다는 듯 피오나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던졌다.
“우리 가문은 진정으로 공익을 위해 이번 사업을 준비했어요. 낮은 이익률을 산정한 것도 그 진심을 보이려 했던 것이고요. 근데… 상대는 20퍼센트의 이익률을 제시했잖아요.”
“…….”
“이번 일을 장사 기회로 보고 있는 평민들에게 일을 맡긴 이유를, 알고 싶어요.”
“납득할 수 없는 겁니까?”
아델라인의 물음에, 피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자 동정의 시선이 피오나에게 향했고, 반대로 아델라인에게는 의문과 의심의 시선이 쏟아졌다. 아델라인은 잠시 눈을 감고 할 말을 정리한 뒤 피오나를 바라봤다.
“솔직함입니다.”
“…….”
“돈을 투자해 이익을 얻겠다는 태도에서 보인 솔직함입니다. 이번 재건 사업을 단지 선심으로 베푸는 봉사활동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투자와 수확을 반복할 첫 단추로 바라보고 있다는 솔직함 말이죠.”
아델라인의 단호한 말에, 둘의 대화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분위기는 양쪽으로 갈렸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델라인의 의견에 동의하는 이들과 억울하다는 듯 눈물 흘리는 피오나를 동정하는 이들로. 양팔 저울의 깨질듯한 균형이 유지되고 있던 찰나, 아델라인은 피오나를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혹시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네.”
눈물을 훔치는 손가락 사이로 피오나의 보랏빛 안광이 번뜩였다. 그러나 그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피오나는 다시 가련한 영애의 얼굴로 돌아왔다.
“혹시, 다른 위원분들께도 여쭤보셨나요?”
“네?”
“왜 백작가의 손이 아닌, 스틸웰 공업의 손을 들어줬는지. 커크만 교수님이나 마일즈 의원님께 여쭤보셨나요? 아니면…….”
아델라인은 잠시 팔짱을 끼고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두드리며 뜸을 들였다. 그사이, 사람들은 하나둘 뒤에 이어질 말들을 어림짐작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만만해 보여서, 자신에게 다가와 물어본 거냐고. 전직 4성 장군이나 아카데미 교수보다, 자신이 만만해 보였냐고.
사람들이 추측할 수 있도록 아델라인은 그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잠시 뒤, 그녀는 팔짱을 풀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그저 궁금하셨던 것이라고 믿을게요. 괜한 오해를 낳을 수 있으니까요. 말이 길어졌네요. 제 의견은 납득이 되셨나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피오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끄덕여 답했다.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저도요. 즐거운 추수제 되세요.”
피오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아델라인에게서 멀어졌다. 그녀의 옆으로는 동정의 시선을 보내던 이들이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듯한 사람들을 훑어보며 아델라인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알렉스는 왜 이리 안 오는 걸까. 분명 한참 지난 것 같은데.
그때, 아델라인의 목덜미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히익!”
아델라인이 급히 뒤를 돌아보자, 알렉스가 미소를 지으며 아델라인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있었다. 아델라인이 몸을 돌려 그를 살짝 올려다보자, 그제야 알렉스는 목덜미에서 손을 치운 뒤, 그 손으로 아델라인의 손을 살짝 잡았다.
“생각보다 길어졌네요. 많이 기다렸어요?”
“…조금요. 무슨 이야기를 하다 온 거예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가 짧게 답했다.
“일 이야기요. 그나저나 말 잘하던 데요? 반할 것 같았어요.”
짤막하게 답한 뒤 화제를 틀어 버리는 알렉스. 더 알려 줄 수 없다는 속내가 느껴져서, 아델라인은 순순히 그에게 어울려 주기로 했다. 물론, 조금은 엇나가면서.
아델라인은 서운하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며 알렉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이 물었다.
“…알렉스는 반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저번처럼 많은 사람 앞에서 입술을 맞추나요?”
지난번의 재건위원회 본회의가 끝나고 있었던 일을 언급하자, 알렉스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그녀가 곁눈질로 흘긋 알렉스를 바라보자, 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 그게 아니라.”
“실망이에요. 저는 진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델라인은 알렉스에게서 얼굴을 돌리며 그를 외면하는 척 곁눈질을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알렉스의 모습은, 혼자 보기 아까웠다.
“그런 뜻 아니니까… 미안해요. 화 풀어요.”
“맨입으로?”
“…….”
아델라인이 토라진 얼굴로 알렉스를 바라보자, 그는 한숨을 쉬며 아델라인에게 속삭였다.
“소원권 한 장이면 충분하겠습니까?”
소원권이라. 그러고 보니 알렉스는 소원권을 가지고 있었지. 그것도 세 장씩이나.
“한 장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나요?”
“…….”
알렉스의 얼굴에서 갈등이 일었다. 아델라인이 원하는 대로 한 장 더 높게 불러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한 번 더 물어볼지.
아델라인은 그 고민하는 모습이 너무 진지해 보여서 그만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자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장난에 휘말린 걸 깨닫고는 화악 얼굴을 붉혔다. 그런 알렉스를 향해, 아델라인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관대하니까, 소원권 한 장으로 퉁 칠게요. 좋죠?”
“…다음번엔 뜻대로 안 될 겁니다. 아델라인.”
알렉스는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 마디 더 하려는 찰나, 의전관이 행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들어오시니, 모두 예를 표하시오!”
그러자 알렉스는 할 수 없이 입을 다물고 손을 들어 경례했다. 그사이, 분한 표정이었던 얼굴이 어느새 다시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델라인의 장난이 싫지만은 않은, 그런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