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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78화 (78/200)

78화 형세 역전

“…….”

의회당 근처 커피 하우스. 아델라인은 나이아와 나란히 의자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씁쓸한 맛이 아델라인의 입을 감쌌지만, 오히려 커피의 맛은 달게 느껴졌다. 지금 처한 상황에 비하면.

아델라인의 맞은편에 앉은 커크만과 마일즈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들은 커피에 미친 듯이 설탕과 크림을 넣고 있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당이 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커피로 떨어지는 당을 간신히 채운 마일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대놓고 진행 방해를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나이아는 호외로 뿌려진 단신을 담은 종이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남부당 의원들이 모두 보이콧 하고, 황색당과 무소속 의원들 몇몇도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이쪽은 추수제 준비나 예정된 지방 일정이 있었지만.”

“절묘한 타이밍이군요. 왜 하필 지금일까요.”

“아마 시간을 벌기 위함이겠지, 추수제 기간 동안은 의원들 상당수가 영지로 돌아가거나 귀향을 하니, 의사 결정도 보류하는 게 관례니까. 사실상 오늘과 내일이 본 의회의 동의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네.”

“그동안 스틸웰 공업에 대한 언론전을 준비하겠군요. 스틸웰 측에서 떳떳한 방법만 쓰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지요.”

“가장 약한 고리는 리먼이지. 빌어먹을. 이래서 내가 경제계 출신을 믿지 않아. 받아 처먹었으면 계속 붙어 있기라도 하지.”

마일즈는 품속에서 여송연을 꺼내 불을 붙이려 하다가 커크만과 아델라인을 의식하고는 다시 여송연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황후와 드라무스 후작가의 발을 묶을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마일즈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리며 고민에 빠졌다. 커크만도 머리를 굴렸지만, 천성도 경력도 정치인과 거리가 먼 학자의 두뇌는 쓸만한 아이디어를 토해 내지 못했다.

그때, 아델라인과 나이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동시에 떠오르며 눈이 크게 떠졌다. 그 모습을 본 커크만과 마일즈는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아델라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비 소집과 본회의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델라인은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고, 어느새 맞은편의 두 사람은 아델라인의 입에 시선을 고정하고 집중해 듣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두 사람의 표정은 굳어 가기 시작했다. 황후가 직접 아델라인을 담그려 손을 썼다는 이야기는 두 사람을 충분히 충격에 몰아넣기 충분했다.

체급을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제2 정당인 남부당을 손에 넣고 흔드는 황후. 그리고 공작이 손을 떼고 일절 간섭하지 않고 있는 아델라인. 두 사람의 체급 차는 열두 살 애와 서른 살 장정의 차이와 같았다.

커크만은 그리 생각하며 동의를 구하듯 마일즈를 바라봤다. 그러나 마일즈는 입을 꾹 다문 채 애먼 커피잔만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증할 수 있는 증인과 문서가 있나? 말하지는 말고 여기에 쓰게.”

그렇게 말하며 마일즈가 수첩과 만년필을 꺼내 아델라인에게 내밀자, 아델라인은 두 사람의 이름을 썼다.

[파견 중대 알렉스 매닝햄 대위.

제3 수도경비대 채드윅 클린턴 경위.

조사 결과문.]

그 단어들을 본 마일즈는 잠시 고민을 이어 갔다. 이윽고, 수십 년을 복무한 노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각자 할 일이 정해진 듯하군. 지금부터 잘 듣게.”

* * *

스무 명 정도만이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파견 중대 관사. 할 일이 없을 때 습관적으로 하는 총기 정비마저 끝내 버린 알렉스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군사학. 이미 임관과 함께 내던진 책을 다시 붙들고 있으려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델라인이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알렉스는 다시 시선을 책으로 향했다.

어떻게 하면 아델라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할 수 있을까. 지금 연구 중인 제병 협동 개념에 대해서 알려 주면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알렉스는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빈 종이를 꺼내 올려놓은 뒤, 오른손에 펜을 들고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여과 없이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제병 협동. 전쟁사. 현대 군사체계 수립 과정.

전쟁법. 전시 외교. 전시 경제. 전시 행정.

구급법, 트리아지.]

“…젠장.”

알렉스는 마지막으로 쓴 ‘트리아지’라는 단어 위에 한 줄을 가로로 지익, 그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치 않았는지, 또 한 줄을 지익, 그었다.

그러나 두 줄도 충분치 않아 보였다. 이 단어는, 순진한 눈빛을 지닌 아델라인이 배우기에는 너무 역겨운 단어였다. 사람의 생명을 저울질하는 그 행위는 결코 보람찬 일도,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니었다.

알렉스의 눈앞에서, 아델라인의 해맑은 미소와 알렉스가 건너왔던 전장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요새의 벽이 무너져 생긴 경사로에 쓰러진 이들이 해맑게 웃고 있는 아델라인을 향해 손을 뻗으며 절규하고 있었다.

살려 달라고, 도와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잠시 뒤 외침은 저주로 변했다. 아군을 외면하며 나아가는 자신을 향한 저주가 되어 있었다.

그 저주들이 귀를 먹먹하게 채우고 있을 때, 한줄기 목소리가 알렉스의 귀에 들려왔다.

“…렉스. 알렉스!”

아델라인의 목소리에 앞을 바라보자, 진짜로 그녀가 문을 살짝 열고 얼굴을 빼꼼 내민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델라인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의회에서 질의응답하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라는 생각을 하며 눈을 비비자, 아델라인은 그 모습을 보며 알렉스에게 물었다.

“들어가도 돼요?”

“아, 아. 예. 들어오세요.”

“고마워요.”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허락을 받은 뒤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 사이 알렉스는 책상 위에 있던 종이를 빠르게 서랍 안에 넣었다.

“오늘 본회의 참석하지 않나요? 일찍 끝났네요.”

“일찍 끝난 게 아니라, 시작도 못 한 거예요. 자유당하고 황색당에서도 결원이 생긴 상태에서 남부당이 보이콧을 걸어서 100명을 채우지 못했어요.”

아델라인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알렉스의 표정이 덩달아 안 좋아졌다. 물론 상황 자체도 좋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알렉스의 마음을 건드는 건 잔뜩 그늘진 아델라인의 얼굴이었다.

잠시 아델라인을 바라본 알렉스는 스토브 앞으로 다가가 차를 끓이기 시작하며 아델라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여기는 무슨 일로? 수업은 내일일 텐데요.”

“아, 그게. 마일즈 의원님께서 알렉스에게 가 있으라고, 연락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런가요?”

알렉스는 두 잔에 차를 따른 뒤 하나를 건네며 아델라인에게 물었다.

“더 말씀하신 건 없고요?”

“네. 한 한두 시간 정도 걸릴 거래요.”

“…그렇군요.”

한두 시간. 그러면 최소한 한 시간 정도는 아델라인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거겠지. 물론 만족스러울 만큼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아델라인과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알렉스는 침대맡에 앉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서, 답은 생각해 봤어요?”

“아. 그거요?”

아델라인은 자연스레 알렉스의 오른쪽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이아는 알아챈 것 같던데, 안 알려 주더라고요. 선물 포장은 대신 풀어 주고 싶지 않다면서.”

“기다림도 추억의 한 부분이니까요. 그 기다림이 헛되지 않을 겁니다.”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말을 들으며 차를 홀짝였다. 분명 설탕 같은 건 없을 텐데, 개운하고 살짝 단맛이 느껴졌다. 혹시 알렉스가 설탕이라도 넣었나 싶어 그를 돌아보자, 알렉스도 덩달아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순간 까먹어 버린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바라봤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좋았다. 그러나 마냥 알렉스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기에는 살짝 부끄러웠으므로 아델라인은 시선을 돌려 대화 주제를 찾아냈다.

“…어깨에 찬 건 뭐예요?”

아델라인이 알렉스의 어깨에 배낭끈처럼 메인 가죽끈을 살짝 잡아당기며 묻자, 알렉스는 차로 입술을 적신 뒤 아델라인에게 답했다.

“숄더 홀스터입니다. 주변의 누군가가 추천을 해 줘서, 써 보는 중입니다. 익숙해질 때까지는 계속 차고 다녀야지요.”

“아침부터 밤까지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델라인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멋있었다. 미국 드라마에서 형사가 차고 다닐 법한 장비를 알렉스가 차고 있는 모습은 꽤나 그럴듯했다.

“어울리네요. 보기 좋아요.”

“고마워요, 아델라인.”

알렉스는 귀를 살짝 붉히며 차를 홀짝였다. 혼자 있을 때는 지루하기만 하던 공간이었는데, 아델라인과 함께 있으니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뭐라도 이야기를 이어 가고 싶은데, 어째서인지 대화 주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는 거라고는 의회, 위원회, 세이드, 업무 내용 등등, 지금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겁고 딱딱한 이야기뿐이었다. 결국, 대화 주제를 찾지 못하고 아델라인을 바라보자, 어느새 그녀는 꾸벅꾸벅 고개를 기우뚱거리며 졸고 있었다.

알렉스는 이리저리 요동치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손으로 멈춰 세운 뒤, 마치 아기 눕히듯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그다음, 개어 두었던 이불을 끌어 올려 그녀의 몸을 덮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순식간에 졸고 잠에 빠질까. 새근새근 잠든 아델라인의 눈가에 얹어진 다크서클을 보자 알렉스는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보통의 귀족 영애라면 지금쯤 일어나 티파티를 하거나 살롱을 누비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덜컥 재건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일하고 있었다.

아델라인이 보람을 느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니 그린우드에게 아델라인의 임명을 제안한 자신의 행동이 약간 후회되었다.

그때, 아델라인이 제 머리를 쓸어 주던 알렉스의 손을 붙잡고 볼에 가져다 댔다.

“차가워… 좋아…….”

“…….”

잠꼬대를 웅얼거리는 아델라인의 볼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알렉스의 얼굴이 또다시 붉어졌다. 뿌리칠 수야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기에 알렉스는 얌전히 자신의 손을 아델라인에게 맡겼다.

알렉스는 다른 손을 뻗어 지겹도록 봤던 『군사학개론』 책을 가져와 무릎 위에 얹고 읽기 시작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이렇게 하면 이 지루한 책이 조금이나마 아델라인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실없기만 한 생각을 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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