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고마워요, 곁에 있어 줘서
이른 아침, 옅은 햇살이 눈꺼풀을 간질이자, 아델라인의 눈이 절로 떠졌다.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자, 6시를 갓 넘긴 시침이 부지런히 찔끔찔끔 움직이고 있었다.
시녀들이 오려면 좀 이른 시간. 아델라인은 다시 침대에 누우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한 번 잠이 깨 버려서인지, 오라는 잠은 안 오고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뭐지?”
잠시 그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 아델라인은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숨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봤다. 검은 머리의 사내가 침대에 등을 기댄 채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알렉스?”
그 모습에, 아델라인은 순간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분명 10분 뒤에 깨워 달라고 했는데, 아침까지 자 버리고 만 것이다.
아델라인은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을 살폈다. 일을 혼자서 모두 끝낸 건지, 서류와 장부들은 알렉스가 가져왔을 때처럼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자신은 침대에 눕혀서 이불까지 덮어 주고, 알렉스 자신은 침대에 등을 기대고 꾸벅꾸벅 새우잠을 자는 모습에, 아델라인은 안쓰러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어차피 침대도 넓어서 둘이 같이 누워도 괜찮은데, 왜 이렇게 사람이 미련한 걸까.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잠시 바라본 뒤,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런 다음, 알렉스의 양쪽 팔 사이에 제 팔을 넣고 위로 끌어당기듯이 낑낑거리며 알렉스의 몸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생각보다 알렉스의 몸은 딱딱하고 무거웠다. 생각해 보니 근육은 지방보다 무거우니, 알렉스의 몸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무거운 게 당연했다.
그러나 알렉스를 이대로 계속 새우잠 자게 둘 수는 없는 상황. 아델라인은 어느새 이마에 맺히기 시작한 땀방울을 소매로 닦아 내며 다시 한번 팔에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어느 정도 힘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알렉스의 상체가 반쯤 침대 위로 올라왔다. 알렉스의 양팔을 붙잡은 채 잠시 숨을 돌린 아델라인이 마지막으로 힘을 줘 알렉스를 끌어올리려는 찰나.
“…지금 뭐 하십니까?”
“꺄악!”
언제 깼는지 모를 알렉스가 아델라인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아델라인은 깜짝 놀라 그대로 알렉스를 놓은 채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나마 아델라인은 푹신한 침대 위에 넘어졌다. 하지만 아델라인에 의해 몸이 반쯤 들려진 알렉스는 그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쿵!
“끄아아아…….”
꼬리뼈에 제대로 충격이 전해진 알렉스가 나지막한 신음을 뱉자, 아델라인은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그러나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잠시 심호흡을 반복하더니, 이내 고통을 덜어 낸 듯 침대맡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어느 정도 괜찮아졌네요. 그런데 지금 시간이…….”
알렉스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6시 5분. 이른 아침이었지만, 알렉스의 계획보다는 늦은 시간이었다.
“…부중대장이 뭐라 그러겠네.”
분명 아침까지는 돌아가겠다고 노먼에게 말해 뒀는데, 지금 가도 아침 점호에는 늦을 게 뻔했다. 물론 알렉스가 없다고 안 굴러가는 파견 중대가 아니다. 그래도 대원들에게 반쯤 농담, 반쯤 진심인 추궁을 들을 생각을 하니, 두어 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강제로 깨 버려서 가뜩이나 지끈거리는 머리가 조금 더 아파 오는 느낌이었다.
알렉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앓는 소리를 내자,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피곤해 보이는 표정을 보자, 지난번 갑자기 알렉스가 하루를 통째로 앓아누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야 아델라인 자신이 옆에 있었으니 대처가 가능했지만, 지금 이대로 보내면 길가에서 픽 쓰러질 것만 같았다. 결국,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말했다.
“좀 더 자다 가요. 분명 잠 많이 못 잤을 텐데.”
그 말에,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힘을 줄 필요도 없이, 팔을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아델라인의 손길을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이 손길을 뿌리칠 수 없었다. 하늘색 눈동자에 담긴 걱정이, 알렉스의 발길을 붙들고 있었다.
결국,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 한쪽에 털썩 눕고 말았다. 누우니 피곤에 절은 탓에 눈은 절로 감겼다.
그래도 일하러 가긴 해야 하는데… 가야 하는데…….
“한 시간 뒤에 깨워 주십시오… 출근해야…….”
마지막 말마저 잠기운에 뭉개졌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머리를 침대에 대자마자 잠에 빠지는 걸까.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차갑고 거칠거칠한 손을 잡고 그 옆에 누웠다.
하나뿐인 베개를 알렉스의 머리 아래 받쳐 준 아델라인은 그 옆에서 알렉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곤히 자는 알렉스의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았다. 너무 보기 좋아서, 한 시간 뒤에 깨워달라는 알렉스의 부탁을 들어주기 싫을 정도로.
아델라인은 시계를 흘끗 본 뒤, 알렉스의 몸에 이불을 덮어 줬다. 한 시간뿐인 잠이라도, 따듯한 잠자리에서 자는 게 더 좋겠지.
알렉스의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 올린 아델라인은 그 옆자리로 들어가 손을 잡고 다시 누웠다. 알렉스와 손을 잡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언제부턴가 안도감을 느끼고 마음이 놓였다.
아델라인은 그런 알렉스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고마워요, 곁에 있어 줘서.”
* * *
스륵.
알렉스가 눈을 떴다. 시계를 보자, 아델라인에게 부탁했던 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델라인이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알렉스는 혹시나 아델라인이 깰까,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아델라인의 손을 떼어 내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그런데도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깨우지 않고 침대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미안해요.”
알렉스는 아델라인이 누워 있는 침대의 한쪽으로 가, 무릎을 꿇고 귀에 속삭였다.
이 모든 일을, 아델라인에게 솔직히 말해 줄 수 없다는 게 알렉스의 가슴을 후벼팠다. 아델라인에게 모든 걸 말해 주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알렉스의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알렉스는 군인이었다. 법률과 명령으로 행동의 정당성을 부여받고, 행동할 힘을 부여받는 존재이다. 따라서 행동할 수 있는 범위도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알렉스는 달랐다. 그린우드와 필즈먼의 권한을 빌려 합법과 불법 사이에 그어진 선을 따라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외무부와 재무부의 자료를 빼 오고, 재건위원회의 자료와 함께 비교하며 정보를 추출한다. 알렉스가 발을 담갔던 육군 정보국에서도 이런 사례는 흔치 않았다. 당연히 이런 사례가 대외에 알려진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델라인에게 섣불리 말을 잘못해 이 위험한 줄타기에 끌어들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얼마 전의 자신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무조건 아델라인과 거리를 뒀을 것이다. 안드레이를 곁에 둔 이상,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달랐다. 아델라인과 거리를 둔다는 생각은 하기도 싫었다. 왜냐하면…….
“그리고… 고마워요. 곁에 있어 줘서.”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변함없이 따스한 온기와 미소를 주는 아델라인의 존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으니까. 아델라인이 계속해서 해맑은 미소를 지을 수 있게 하려면 ‘최악을 피하는 것’ 정도로는 부족했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하루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델라인을 지키기 위해서, 오늘도 알렉스는 아델라인 곁을 떠나야 했다. 알렉스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어 내며 서류를 챙기고 방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안드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차를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만.”
안드레이가 알렉스의 손에 들린 묵직한 서류 더미를 바라보며 말하자,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의회로 가야 해서, 그냥 걸어가거나 돈 내고 마차 타고 가야지. 무슨 말이 나올 줄 알고.”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알렉스는 안드레이를 바라봤다. 그는 마치 안드레이에게 다짐이라도 받을 것처럼, 힘을 실어 말했다.
“너는 로피츠 공작가의 사람이다. 공작가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
“아델라인… 공녀는 널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기대에 완전히 응하지는 못하더라도 실망은 시키지 말아야지.”
어찌 보면 선을 긋는듯한 말.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알렉스의 속마음을 안드레이가 모를 리 없었다.
“항상 명심하겠습니다.”
안드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안드레이에게 경례를 받는 게 아니라 묵례를 받는 건 어색했지만, 직접 안드레이의 마음가짐을 확인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알렉스가 몸을 돌려 가려 하자, 안드레이는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며 알렉스를 멈춰 세웠다.
“이건 챙겨 가셔야지요. 제가 나름대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앤트워프 해운이 가지고 있던 부동산 중 오베른에 위치한 부동산과 수도 인근의 광산이 오베른 시에서 영사관의 보증 아래 헤클러 상회로 넘어갔더군요.”
“……!”
“다리는 맛이 갔어도, 감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안드레이는 그리 말하며 씨익 웃어 보였다. 아직 주머니칼의 날은 날카롭게 살아 있었다.
“고생했어.”
알렉스는 두루마리를 품속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걸 보며, 안드레이가 물었다.
“그래서, 내일 내려야 하는 결정에 대해서는 전하실 말 없으십니까?”
“…아직 불확실한 정보로 생각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이 말 만큼은 전하고 싶은데.”
알렉스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안드레이를 바라봤다.
“‘돈을 싫어한다’라고 말하는 놈은 돈에 미친 놈이라고.”
“동서고금 언제나 먹힐 말이군요.”
안드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알렉스를 짓궂은 말과 함께 배웅했다.
“살펴 가십쇼, 가다가 길가에서 쓰러지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