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날밤을 새우며
늦은 저녁, 아델라인은 가문의 장부를 확인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장부의 숫자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루멘시아 백작가냐, 아니면 스틸웰 공업이냐. 낮에 양측의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루멘시아 백작가의 제안은 분명 좋았다. 낮은 수익률은 분명 낮은 분양가를 의미할 거고, 낮은 분양가의 주거 공급은 수도 전체의 집값을 크게 안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딘가 마음에 걸리는 요소가 있었다.
자재 공급처. 프룬츠베르크 공국에 소재한 업체. 루멘시아 백작가를 지지하는 위원들은 동맹국이니 문제없다는 취지로 말하고 있었다. 운송비를 감안하더라도 자재비에서는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머릿속에는 어떤 ‘감’이 아델라인의 결정을 막고 있었다.
그때, 아델라인의 서재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아델라인, 들어갈게요.”
알렉스의 목소리에, 아델라인은 장부를 덮고 알렉스가 기다리고 있을 방문을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저번에 알렉스는 자재 업체가 프룬츠베르크 공국에 있다는 걸 알고 뭔가 알아챘다는 표정을 보였지. 혹시 알렉스라면 무언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아델라인은 그 문을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요.”
아델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정장 차림의 알렉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알렉스의 한 손에는 노끈으로 묶인 종이들이 한 묶음 들려 있었다.
“…그건 뭐예요?”
“재무부 자료하고 외무부 자료입니다. 생각보다 늦게 자료를 줘서, 정보가 아니라 자료로 받아야 했습니다.”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온 걸 보니 느긋하게 안부를 물을 때는 아닌 것 같네요.”
아델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서재 한쪽에 모아 뒀던 회의 자료를 가리키며 알렉스에게 말했다.
“따라와요, 오래 걸릴 것 같아 보이니까.”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회의 자료도 다른 팔에 안아 든 뒤 아델라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위해 침실 문을 열어 준 뒤, 옷장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슬리퍼를 꺼내 들었다.
“이걸로 신어요, 구두 신고 있는 것보다는 편하겠죠. 그리고, 여기는 카펫도 깔려 있으니까.”
아델라인은 푹신한 카펫 위에 털썩 앉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여기 앉아요, 제가 뭘 도우면 되죠?”
생각보다 적극적인 아델라인의 모습에, 알렉스는 어쩐지 미안함마저 느꼈다.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해 줄 수 없는 자신이 참 못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 알렉스는 자신의 슬리퍼로 갈아신은 뒤 아델라인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여기에서, 이 주소들의 부동산 거래 기록을 찾아야 해요.”
알렉스는 그리 말하며 그린우드가 재무부에서 가져온, 12년간의 부동산 거래 세금 납부 기록을 아델라인에게 건넸다. 세 권의 두꺼운 장부가 아델라인의 앞에 놓였고, 그 위로 주소들이 나열된 종이가 올려졌다.
“그동안 저는 외무부 자료를 찾아볼게요.”
알렉스는 그리 말하며 다른 종이 뭉치를 자신의 옆에 가져다 두고, 한 목록을 보며 그것들을 대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바닥에 앉은 채, 척척 서류들을 찾아 분류하고 비교하기 시작했다.
아델라인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일에 집중하는 알렉스의 모습은 꽤나 멋있고 보기 좋았다. 그렇게 잠시 알렉스의 모습을 바라보던 아델라인은 곧바로 납부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10년이라는, 강산도 변할만한 시간 동안 쌓인 기록들이었기에, 아델라인은 금세 눈이 침침해지는 걸 느끼며 눈을 비벼 가며 깨알만 한 글씨들을 읽어 내렸다.
그러나 채 한 권을 다 보기도 전에 아델라인의 눈은 끔뻑… 끔뻑… 천천히 감겼다 떠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결국, 아델라인은…….
“저… 10분만 있다가 깨워 줘요…….”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알렉스에게 부탁한 뒤, 그대로 알렉스의 허벅지에 머리를 얹고 잠에 빠졌다. 그러자 알렉스는 잠시 보던 서류들을 내려놓은 뒤, 그녀의 머리카락을 세심한 손길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안 그러면 또 무슨 맛인지 모를 머리카락을 입에 넣으며 잠꼬대를 해 댈 테니까.
그때, 아델라인의 침실 문에서 가볍게 노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뒤, 문이 살포시 열리며 안드레이가 한 손에 쟁반을 든 채 나타났다. 알렉스가 가볍게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안드레이에게 신호를 보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렉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절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안드레이는 아델라인의 손에서 주소 목록이 적힌 종이를 가져오고, 납부 기록 두 권 중 가장 최근의 장부를 집어 들어 비교하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머리를 정돈한 뒤, 다시 서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부르기도 전에 먼저 도와주겠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거절하냐.”
“방법은 많았잖습니까.”
안드레이는 그리 말하며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수첩에 메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안드레이는 알렉스의 옆에 팔걸이처럼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이게 그 ‘침착하게, 그리고 과감하게’의 산물입니까?”
“난 이런 걸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그린우드 그 양반은 그렇게 이해했나 보다.”
알렉스는 그리 말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과감하고 빠르게 자료를 모아서, 침착하고 세심하게 정보를 추출해 달라는 의미였는데. 각 부처에서 침착하게 자료를 빼내서 과감하게 그걸 알렉스에게 날것 그대로 던져 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알렉스는 한숨을 쉬며 아델라인이 가지고 있던 서류들과 그린우드에게서 받아 온 외무부 자료 중 필요한 단서와 정보들을 추출했다. 세이드의 뒷배가 진짜 프룬츠베르크 공국에 손을 뻗치고 있다면, 사람과 재화를 제국에서 앤트워프 해운을 통해 가져온 흔적이 남아 있을 터였다.
그때, 안드레이의 손이 잠시 멎었다.
“중대장님.”
“왜.”
“기록이 나왔습니다.”
안드레이는 끄응, 소리를 내며 알렉스 옆으로 다가왔다.
“이번 사업에서 루멘시아 백작가의 자재 공급 업체인 헤클러 상회가 앤트워프 해운의 부동산을 매입한 기록이 있습니다.”
알렉스는 그 말을 듣고 안드레이가 손가락으로 짚은 납부 기록을 읽어 내렸다.
“…헤클러 상회는 무슨 돈으로 산 거지?”
“모르지요. 하지만 결제 방식은 나와 있습니다.”
안드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비고란의 기록을 짚었다.
“오베른 시의 메르츠 방크에서 인증한 송금환으로 결재했습니다. 꽤나 거금이군요. 아마 해외 자금을 세탁해 제국 내에서 사용하려 한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그 많은 현금을 실어 나르긴 힘들 테니 깨끗한 송금환이 필요했겠지요.”
“앤트워프 해운의 자산들은 일부러 장부에서 누락했으니, 안전하다고 믿고 있었겠지. 만일을 대비해 깨끗한 거래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납세까지 바로바로 했을 거고. 송금환 일련번호는?”
“여기 있습니다.”
안드레이가 수첩 종이를 찢어 건네자, 알렉스는 그 쪽지를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서가 모이기 시작했다. 이제 여기서 산출된 단서들로 추적을 맡기면, 나머지는 전문가들이 해 주리라.
“그나저나 질문 있습니다.”
“말해.”
알렉스가 아델라인의 입으로 또다시 들어가려는 머리카락을 걷어 내며 말했다. 그러자 안드레이가 알렉스에게 물었다.
“부사관 시절에 이거 못 해 먹겠다면서 때려치우고 장교로 가지 않으셨습니까? 근데 왜 지금은 자진해서 하고 계십니까?”
안드레이의 말에, 알렉스는 어느새 곤히 잠든 아델라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나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근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지.”
얼굴은 차갑게 생겼으면서, 어울리지 않게 속은 배려 넘치고 다정한 이 사람이 눈에 밟혀서.
알렉스는 속으로 말을 삼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내 사람들에게 이빨을 들이미는데, 맞서 싸워야지. 사냥대회부터 시작해서, 이미 우리 파견 중대도 얽힐 만큼 얽혔어.”
알렉스는 그리 말하며 안드레이를 바라봤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알렉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하는 거지.”
그 시선에, 알렉스는 자신감 빠진 목소리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안드레이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이제는 반쯤 식어 미지근해진 찻주전자의 홍차를 따라 한 모금 머금었다.
알렉스도 잔을 들자, 안드레이는 찻주전자를 들어 잔에 한가득 따라 주었다. 시원하지도, 따듯하지도 않은 찻물은 알렉스의 갈증을 더욱 돋구는 듯했다.
마치… 지금처럼.
아델라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지금으로서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을 간신히 달랜 알렉스는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이미 이 주제가 알렉스의 머리에 들어와 버린 이상, 이 콩알만 한 글자들이 알렉스의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결국, 알렉스는 서류들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아델라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가다듬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드레이가 듣든 말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델라인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라이플맨 한 명의 하소연이니까.
“솔직히, 많이 무섭다.”
알렉스는 찻잔을 비운 뒤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델라인이 날 떠나는 건 무섭지 않아. 근데 내가 아델라인을 떠나는 게 무섭다.”
“누구는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가정 꾸립니까.”
“알아, 아는데.”
알렉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내 일이 되니까 실감이 나는 거지. 과연 내가 이 일을 하면서 아델라인과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을까.”
전쟁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언제나 죽음의 위협은 라이플맨의 어깨 위에 얹어져 있었다. 다들 이미 그 무게가 익숙할 정도로 사선을 넘었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왔지만, 아델라인을 생각할 때마다 그 무게는 점점 무거워지는 듯했다.
“…저야 뭐 나이아 그 애 때문에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중대장님이 어떤 상황인지 공감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너무 고민을 오래하진 마십쇼.”
안드레이는 그리 말하며 알렉스를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한 달에 공녀님께 날아오는 청혼 편지가 얼마나 되는 줄 아십니까. 외모도 외모지만, 로피츠 공작가의 외동딸이라는 배경은 더 매혹적인 거 아시잖습니까.”
“저번에 들어 본 말 같은데.”
알렉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델라인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지금 당장에라도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겠나. 지금 당장 손에 쥔 일도 어떻게 틀어지고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확신하지도 못하는데.
만약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고, 지금보다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간 뒤, 예상치 못한 일로 한순간에 자신이 죽어 버린다면. 이 마음 여린 아델라인은 이겨 낼 수 있을까.
“…일이나 하자.”
결국, 알렉스는 눈을 살짝 비비며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밤은 길었지만, 마찬가지로 서류들도 한가득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