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삼자대면
아델라인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3일 뒤에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재건위원회의 다음 본회의 때는 사업 파트너를 한 명으로 좁혀야 했다.
스틸웰 공업 측으로 기운 위원은 두 명, 마찬가지로 루멘시아 백작가 측으로 기운 위원도 두 명. 입장을 내비치지 않은 위원은 아델라인을 포함해서 세 명. 커크만과 마일즈, 그리고 아델라인까지. 이 세 명의 향방에 따라, 수도 남부 재건 사업의 사업자가 정해질 터였다.
“나이아.”
“네, 공녀님.”
“지금 내 앞으로 들어온 소포는 다 막아 내고 있는 거지.”
“네, 다른 사용인들을 통해 들어올 수도 있어서 철저히 확인 중입니다. 그리고.”
막판이 되자, 아델라인을 향한 구애 아닌 구애는 더욱 쏟아져 들어왔다. 수많은 선물과 방문 신청이 쏟아졌다. 아마 아델라인이 기존에 쌓아 둔 평판이 영향을 끼쳤는지, 마일즈 의원이나 커크만 교수를 향한 것보다도 더 많은 양이 들어왔다.
솔직히 전임 육군본부장과 도시 계획 전문가보다는 얼마 전까지 말썽을 피우던 공작가의 외동딸이 훨씬 유혹에 약할 것 같았다. 아델라인 자신이 생각해도.
그러나 황후 덕분에 예방 주사를 맞아 버린 아델라인과 나이아는 철저히 그 모든 공세를 차단하고 있었고, 결국 아델라인 앞으로 온 두 장의 편지를 끝으로, 선물 공세는 멈췄다.
“스틸웰 공업의 마일즈 스틸웰 상무에게서 접견 신청이 들어왔네요. 그리고…….”
나이아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루멘시아 영애의 접견 신청이 들어왔어요. 이건 의외네요. 가문에서 사업을 담당하는 가신들이 있을 텐데.”
그러자 아델라인은 이상하다는 듯 나이아를 바라봤다. 피오나가 직접 만나고 싶다 전했다고?
“…루멘시아 영애가?”
“네. 여기 양측에서 온 접견 신청이요.”
나이아가 두 장의 편지를 아델라인에게 건넸다. 하나는 공장에서 찍어 낸 사무용지에 용건만 갖춘 딱딱하고 직관적인 글씨가 쓰여 있었고, 다른 하나는 화려한 편지지 위에 유려한 문구를 이룬 손글씨가 펼쳐져 있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오늘이나 내일 만나고 싶다. 이러한 시간대가 가능하니, 이 중 편한 시간대를 알려달라.
“…보통은 따로따로 만나는 게 옳겠지?”
“보통은요. 하지만 지금 고삐는 공녀님께서 쥐고 계시니까요.”
그 말에, 아델라인은 나이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냥 오늘 해결해 버리자. 두 사람 다 점심 먹은 뒤 티타임에 불러. 단.”
아델라인은 자신의 책상에 놓인 서류를 들어 보이며 나이아에게 말했다.
“그냥 다른 말 하지 말고 오라고만 그래. 다른 쪽이 올지 안 올지는 알려 주지 말고.”
“알겠습니다. 전달하겠습니다.”
* * *
마차에 탄 피오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내 오며, 이렇게까지 일이 안 풀렸던 적이 있었을까. 고민에 고민을 이어 갔다.
“쉽지 않네…….”
분명 완벽했다고 생각했던 계획이었는데, 점점 수를 쓸 수 없이 자신의 손을 벗어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일이 자신의 계획에서, 그리고 ‘그 책’에서 벗어났던 때가 언제였을까. 그건 분명 황후 암살이 실패했을 때였다. 그리고 그 실패의 기원을 따져 보면…….
“아델라인. 아델라인 폰 로피츠.”
아델라인은 확실히 변했다. 피오나를 질투하고 방해하다가 황태자와 세이드에게 죽어야 할 아델라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멀쩡히 활보하며 자유당의 중진 중 한 명인 그린우드의 추천으로 재건위원회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이건 아니야.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피오나는 어느새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 보랏빛 눈동자를 번뜩였다. 그때, 피오나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아델라인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델라인 자신의 최후를 알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바뀐 행동으로, 자신의 계획도 바뀐 거라면?
그때, 피오나의 눈에 창밖의 풍경이 들어왔다. 스틸웰 공업의 문양이 찍혀 있는 마차. 그 마차에서 마일즈 스틸웰이 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피오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둘을 동시에 부르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지? 득이 되는 게 있나? 피오나는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사이 피오나가 탄 마차는 저택의 정문에 멈춰 섰다. 로피츠 가문의 사용인들이 나와, 마차의 계단을 놓고 문을 열어 줬다.
“공녀님께서 기다리시는 중입니다, 영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고마워요. 이름이…….”
피오나는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민 집사를 향해 이름을 물으며 그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안드레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안드레이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피오나의 질문에 답했다. 고개를 숙이는 사이 번뜩였던 눈빛은, 평범하고 온화한 눈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 * *
“오랜만입니다, 여사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스틸웰 상무님,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저택의 응접실, 아델라인은 능숙하게 마일즈에게 자리를 안내하며 상석에 앉았다. 이내 시녀들이 찻잔들과 다과를 내놓았다. 아델라인의 잔에 홍차가 따라지는 사이, 한 시녀가 마일즈에게 질문했다.
“홍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다른 음료를 원하신다면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홍차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일즈는 시녀에게 괜찮다, 말한 뒤,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그러나 아델라인은 마치 누구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차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그걸 포착한 마일즈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응접실로 또 한 사람이 들어왔다.
피오나의 등장에, 마일즈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차는 봤다. 하지만 기껏해야 사업을 진행하는 가신들이 타 있을 거로 생각했지, 루멘시아 백작의 외동딸이 올 줄은 몰랐다.
“오랜만입니다, 여사님.”
“어서 와요, 영애. 이쪽으로 앉으세요.”
잠깐 자리에서 일어난 아델라인은 마일즈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마일즈와 피오나가 자연스레 서로 마주 보게 되었다.
잠깐 차 한 모금 할 시간, 그러면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진 뒤, 아델라인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 쪽에서도 일정이 있는지라, 불가피하게 두 분을 한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네요. 자, 그러면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죠.”
아델라인의 말에, 마일즈는 마른 침을 삼켰다. 두 사람을 동석시킨다는 건, 상대방에게 책 잡힐 일 하지 말라는 뜻.
그러자 마일즈는 서류 가방 한편의 보석함을 꺼내는 대신, 보고서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델라인이 꺼낼 예상 질문을 모두 분석해 주석으로 달아 둔 확장판이었다.
그러나 아델라인이 꺼낸 질문은, 마일즈의 예상 범위에 없는 답이었다.
“이 사업을 왜 하시려 하나요?”
그 말에, 마일즈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니, 사업을 하는 이유가 수익 실현 말고 더 있겠는가. 마일즈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그사이, 피오나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온 수도 남부의 주민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더 나은 주거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자립을 돕는 것이죠.”
“…좋은 말이네요.”
“로피츠 여사님께서 솔선수범하신 길을 따르고 싶어서, 저도 아버님께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두 가문의 뜻이 다르지 않을 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피오나의 선한 인상은 그녀의 말에 신빙성을 얹어 주는 듯했다. 마치 이익은 상관없다는 듯 꺼내는 말은 사업가로서 이 자리에 앉은 마일즈의 앞에 놓인 서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냥 차라리, 자신도 번드르르하게 말을 할까. 사회적 공헌, 봉사, 자본가로서 사회에 대한 의무 등등… 지금 당장에라도 꾸며 낼 말들은 많았다.
그때, 아델라인이 마일즈를 바라봤다.
“스틸웰 상무님께서는?”
아델라인의 맑고 푸른 눈동자. 그 눈동자를 보자, 마일즈의 머릿속에서 자라나던 여러 잡념이 사라졌다. 후발 주자는, 스틸웰의 방식이 아니다. 가식을 뒤집어쓰면서까지 후발 주자를 자처할 바엔, 차라리 진솔함으로.
“포기하기에는 얻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차를 홀짝이며 마일즈를 바라봤다. 좀 더 말해 보라는 신호였다.
“20%의 수익률을 제시한 것은, 주주들을 설득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 이후에도, 스틸웰 공업은 수도 남부에서 사업을 확장해 나갈 계획입니다. 더 많은 자본이 투자될 것이며, 그만큼 더 많은 일자리가…….”
달그락.
아델라인이 소리를 내며 잔을 내려놓았다. 마일즈의 말을 끊기 위한,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그러자 피오나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마일즈의 얼굴에는 냉기가 돌았다.
“…….”
아델라인은 차를 홀짝였다. 잠시 뒤, 아델라인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두 분의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선택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피오나는 아델라인을 향해 악수를 청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승리자의 미소였다.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얼요, 찾아와 주셔서 고마워요, 영애.”
아델라인과 가볍게 악수를 나눈 피오나는 먼저 응접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본 마일즈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상무님.”
아델라인은 악수를 가볍게 한 뒤, 책상에 있던 마일즈의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위원회를 통해 받은 사업 계획서보다 더 두텁군요.”
“…오늘 여사님을 설득하기 위해 준비한 주석들도 달려 있으니 더욱 두꺼울 겁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보고서를 쭉 훑어봤다. 그의 말대로, 보고서에는 빈 곳이라고는 없이 빼곡하게 메모들이 채워져 있었다. 아델라인은 그걸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건 제가 가져도 될까요.”
“…….”
“이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자 마일즈는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결정은 빨랐다. 어차피 이틀 뒤에는 아무것도 아닌 휴지 조각이 될 보고서.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이었다.
“원본은 제 사무실에 있습니다.”
“좋네요. 그러면, 멀리까지 나가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델라인이 그리 말하자, 마일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시녀의 안내에 따라 저택을 나섰다. 어깨에 힘이 빠진 듯한 마일즈의 뒷모습을 보며, 아델라인은 안드레이를 불렀다.
“안드레이.”
그러자 응접실 한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드레이가 아델라인의 부름에 응답했다.
“네.”
아델라인은 안드레이에게 마일즈의 보고서를 건네며 말했다.
“…새로운 서류야. 그동안 내 눈치 보면서 서류 뒤적거리느라 힘들었을 텐데. 나이아에게 말해서 서류 가져다 뒀으니까, 자료 분석 편히 해.”
그러자 안드레이는 아델라인이 건넨 서류를 받아들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실은, 중대장님께서 관련된 일로 의논하고 싶으신 게 있다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