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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71화 (71/200)

71화 침착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주말 오전, 보통이라면 집에서 여유롭게 모닝커피를 즐기고 있을 그린우드는 의회당 집무실 책상에 앉은 채 알렉스를 바라봤다. 간만의 지방 일정에 지친 몸을 이끌고 수도로 올라왔더니, 더욱 숨이 턱턱 막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베른, 베른하르트 공방 제 목걸이, 황후, 루멘시아 백작가, 프룬츠베르크 공국 소재의 건축 자재 회사. 앤트워프 해운.

알렉스가 내민 서류에는 진실만이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그 진실들이 모여 소리 없이 외치고 있는 가설은 그린우드가 감히 부담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었다.

그린우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몇 번이고 앓는 소리를 낸 뒤, 책상 위의 반쯤 피운 여송연과 성냥갑, 그리고 알렉스가 전한 보고서를 들고 집무실 문으로 향했다.

“…나가세. 보좌관은 남아 있고.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으니.”

그 말에, 알렉스는 보좌관의 당황한 표정을 바라보며 그린우드에게 대신 물었다. 적어도 그린우드를 옆에서 보좌하는 만큼, 어디로 가는지는 알아야 할 테니까.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알렉스의 물음에도, 그린우드는 여송연을 문 채 신경질적으로 성냥갑의 한쪽 면에 달린 사포에 성냥을 긁어 불을 붙이며 말했다.

“어디든지!”

그러자 알렉스는 당황한 보좌관에게 인사를 살짝 건네며 그린우드의 뒤를 따랐다. 말없이 조금 걷자, 의회당 뒷골목에 위치한 낡은 건물 출입구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알렉스는 출입구 옆에 세워진 간판의 그림을 눈에 담았다. 술, 그리고 지하를 뜻하는 화살표.

“음주를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생각됩니다만.”

알렉스가 아직 새파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지만, 그린우드는 손가락으로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 곧바로 지하로 향하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영업 개시는커녕, 이제 막 청소를 시작하는 단출하고 좁은 바가 알렉스의 눈에 담겼다. 수습생인듯한 젊은 청년은 그린우드와 그 뒤를 따르는 알렉스를 보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영업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후 5시부터 영업을 시작하니, 그때 다시 찾아 주신다면…….”

“커피나 차. 아무거나 한 잔씩 내와 주게.”

그린우드가 그렇게 말하며 실링 은화를 두 닢 내려놓은 뒤 멋대로 자리를 차지하자, 수습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카운터를 닦던 걸레를 내려놓았다. 그다음, 은화를 챙기고 뒤로 돌아 찻잔과 원두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알렉스는 그린우드의 옆자리에 앉으며 그린우드를 바라봤다.

“오베른 시의 경매장을 가 본 적 있나?”

“아니요, 제 대원 중 몇몇은 오베른 영사관으로 파견된 전적이 있는 거로 압니다.”

그 말을 들은 그린우드는 자신 앞으로 내어진 커피를 홀짝이며 보고서로 시선을 옮겼다. 알렉스는 마찬가지로 자신의 앞에 놓인 홍차를 바라봤다. 그린우드와 달리, 자신의 앞에는 우유와 설탕이 놓였다.

“자주 이용하시는가 봅니다.”

“가끔.”

알렉스는 티스푼으로 설탕을 두어 숟가락 넣은 뒤 휘휘 저으며 그린우드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린우드는 보고서에만 계속 시선을 쏟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마차를 타며 책 읽는 것조차 지겨워질 때,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해 본다네.”

이내 그린우드는 보고서를 덮으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누군가에게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아득한 길이의 삶이 주어진다면, 과연 그 사람은 무에서부터 시작해 세상을 완전히 손에 넣을 수 있을까.”

“……”

“생각을 이어 갈 때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더군. 왜인지 아나?”

그린우드의 물음에, 알렉스는 그린우드를 바라보며 답했다.

“한 사람이 손에 넣기에는 세상을 돌고 도는 자본이 너무 많고, 국가 체계는 고도화되어 있으며, 물리적으로도 너무 넓으니까. 파인우드, 라는 필명의 글쓴이가 쓴 칼럼이었지요. 한 8년 전.”

그러면서 알렉스는 그린우드를 바라봤다. 마치 그 필명의 주인을 알고 있다는 듯한 시선을 받은 그린우드는 허허 웃으며 찻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치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그래. 나이아를 처음 만나 학문을 가르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내 생각이었네. 그런데 지금.”

그린우드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 믿음이 깨지려 한다면, 믿을 수 있겠나? 황후의 행동을 조… 유도하고. 오베른 시의 그 콧대 높은 경매장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가설이 여기 있는데.”

“아직은 아닙니다, 파인우드 씨.”

알렉스는 그리 말하며 차를 홀짝였다. 파인우드, 권력의 분산을 주장하던 익명의 칼럼니스트. 그러나 그린우드의 말은 충분히 그 정체를 추측하기 쉬웠다.

“둑이 넘치기 전까지는, 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나. 과감한 방법이 있고 침착한 방법이 있네.”

“제게 결정하게 해 주시는 겁니까?”

“현장에 맞춰 줘야겠지.”

그린우드는 어느새 찻잔을 비운 뒤 다시 청년에게 건네고 있었다.

“만약 그 누군가의 역량이 우리의 역량을 넘어선다면, 그 시점부터는 손 쓸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다가 우리의 역량을 훼손시킨다면 그 또한 안될 일이겠지요.”

“…침착하게, 하지만 과감하게?”

“침착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알렉스는 그리 말하며 찻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그럼 가 보겠습니다.”

“…골칫거리를 남겨 두고 가는구만.”

그린우드가 알렉스를 원망스레 바라보자, 알렉스는 그린우드를 향해 서류 가방을 들어 보이며 답했다.

“약속이 하나 더 있어서.”

그렇게 그린우드를 남겨 두고 일어난 알렉스는 계단을 올랐다. 이제 고민은, 일단은 그린우드에게 넘어갔다.

다시 의회당 뒷골목으로 올라온 알렉스는 대로변으로 나가 마차를 탔다. 오늘은 아델라인과의 수업이 있는 날. 하지만 오늘의 수업 장소는 다른 곳이었다.

마차를 타고 한 공원에 다다르자, 알렉스는 삯을 치르고 마차에서 내린 뒤 공원을 주욱 둘러봤다. 별반 다를 것 없는 공원이지만, 한가지는 달랐다. 바로 체스장이 있다는 점.

대부분이 서민들이었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여흥을 위해 일부러 수수한 옷차림을 입은 이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은 맑은 가을하늘 아래에서 각자가 가지고 온 체스 말들로 체스를 즐기고 있었다. 나무판자를 대충 깎아 만든 납작한 말들도, 흑단과 상아로 만든 말들도 같은 테이블 위에서 서로의 지혜를 겨루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아델라인이 다가왔다.

“오늘은 여기서 수업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체스 할 줄 아시죠?”

알렉스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체스는 빙의 이전에도 계속했던 취미 중 하나였다. 나이아를 상대로 몇 번 했을 때 이기기도 했었고.

“체스 말은 제가 가져왔습니다. 체스나 한 판 할까요?”

알렉스가 서류 가방에서 체스 말을 담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으며 알렉스를 향해 물었다.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 뭐 하나 걸고 할까요?”

“자신 있나 봐요?”

“체스는 조금 자신 있거든요. 그래서, 뭘 걸고 할까요?”

그러자 알렉스는 고민을 잠시 하더니, 빈 테이블에 앉으며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그러면…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 들어주기 어떨까요.”

알렉스는 자신의 앞에 검은색 말들을 놓으며 아델라인에게 제안했다. 얼떨결에 선을 양보받게 된 아델라인은 흰색 말들을 놓으며 알렉스에게 말했다.

“좋아요, 근데 오늘은 뭘 배우는 건가요?”

“시야의 중요성입니다.”

알렉스는 말을 다 놓은 뒤 아델라인이 먼저 말을 움직이길 기다렸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으며 킹 앞에 놓인 폰을 두 칸 앞으로 옮겼다.

“선을 양보한 걸 후회할 텐데요.”

“그건 봐야 알겠지요.”

알렉스는 마찬가지로 킹 앞에 놓은 폰을 전진시키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아델라인은 나이트를 움직여 알렉스의 폰을 위협했고, 알렉스도 마찬가지로 나이트를 꺼내 들며 전진한 폰을 뒷받침했다.

나이트 다음에 아델라인이 꺼내 든 수는 비숍. 비숍 다음에는 다시 폰… 수가 하나하나 쌓일수록 기물이 하나하나씩 판에서 벗어났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했던 아델라인의 얼굴은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반면 알렉스의 얼굴은 시작할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결국, 아델라인은 기울어 가는 판세를 뒤집어 보지도 못하고…….

“체크메이트.”

“…….”

보란 듯이 퀸을 한 번도 쓰지 않은 알렉스를 상대로 룩과 비숍, 그리고 나이트에 의해 체크메이트를 당하고 말았다.

알렉스가 체크메이트라 말한 뒤 아델라인은 뒤늦게 킹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지만, 이미 체크메이트는 체크메이트였다. 결국, 아델라인은 스스로 자신의 킹을 눕히고 말았다.

“졌네요.”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죠. 여기 같이 앉아 보시겠어요?”

알렉스는 아델라인에게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며 옆 테이블을 바라봤다. 마침, 옆 테이블의 경기에서도 한 노인이 중년의 신사를 바라보며 나이트를 움직였다.

“체크메이트.”

“좋은 경기였소.”

그렇게 악수를 나눈 노인은 마찬가지로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러자 알렉스는 기물을 정리하며 그 노인을 향해 말했다.

“한 수 같이 두시겠습니까?”

“아, 좋지. 한 수 부탁하겠네.”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옆자리로 옮겨 앉으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뭘 가르쳐 주려는 걸까? 아직은 알 도리가 없는 아델라인에게, 알렉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번 제삼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요. 단, 훈수는 두지 말기.”

“안 둘 거거든요!”

마치 약간 삐진 듯 퉁명스레 말하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미소를 띠며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의 시작은 아델라인과 같았다. 킹 앞의 폰을 움직이고, 나이트를 움직이고, 비숍을 움직이고.

그러자 아델라인의 눈에는 노인이 둬야 할 수가, 그리고 알렉스가 둬야 할 수가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입이 점점 근질거려 왔다. 아델라인은 결국 입을 두 손으로 꼭 막은 채 체스판에 집중했다.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아델라인을 흘끗 봤다. 보기만 해도 귀여웠다. 뭐라 훈수 두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아델라인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알렉스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귀에 속삭였다.

“얼마 안 걸리니까 참아요.”

아델라인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알렉스는 자신이 장담한 그대로, 노인을 빠르게 격파했다. 그러자 노인은 약간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알렉스를 향해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잘 두는군. 나중에 한 수 청해도 되겠나?”

“즐거운 한 판이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다시 두지요.”

알렉스가 가볍게 악수를 하자, 노인은 다시 다른 상대를 찾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맞은편에 앉으며 판을 바라봤다.

분명 같은 체스판인데, 왜 안 보이던 수가 알렉스의 옆에 앉았을 때는 잘 보였던 걸까.

아델라인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체스판 위에 올려진 말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이 품고 있는 질문이 무엇인지 아는 듯, 답을 알려 줬다.

“시야의 차이입니다. 판 위에 오른 사람은, 판 밖에 있는 사람들보다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지요.”

알렉스는 그리 말하며 말을 다시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아델라인의 앞에는 하얀색 말들이 놓였다.

“그래서 항상 객관적인 시야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게 결여된 채 수립한 전술은, 결국 망가지기 마련이지요.”

알렉스는 그리 말하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당신에게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하나.”

“…….”

알렉스의 능글맞은 표정에, 아델라인은 절로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끝내기에는 아델라인의 승부욕이 아직 활활 불타고 있었다.

“…한 판 더 해요! 소원권 내기로!”

그러자 알렉스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아델라인은, 알렉스에게 세 장의 소원권을 더 넘겨준 뒤에야 겨우 한 장의 소원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소원권으로 뭘 부탁할 거냐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댈 뿐이었다.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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