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황후의 편지
탁.
스워포드는 자신도 모르게 보석함의 뚜껑을 덮었다. 아마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일 것이다. 누구 하나는 그 행동을 탓할 법도 했다만,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 경관 하나, 아카데미 졸업자 하나, 기사 작위를 가진 귀족 영애 하나, 그리고 군경력 16년의 장교 하나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분명히 봤다. 황후의 인장이 찍혀 있는, 편지가 있었다.
가장 먼저 충격에서 헤어나온 알렉스는 얼굴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린 뒤, 클린턴 경위를 향해 말했다.
“일단 편지는 옆에 치워 두고, 계속 진행하지.”
“아, 네. 알겠습니다, 대위님.”
알렉스의 지시대로 스워포드에게서 보석함을 다시 건네받은 클린턴 경위는 테이블 위에 보석함을 올려놓고 편지봉투를 옆으로 빼내어 두었다. 그러자 편지에 가려져 있던 찬란한 보석이 빛을 받으며 드러났다.
“…목걸이군요. 도그 칼라.”
누가 봐도 목걸이였지만, 일순간 그들을 덮친 찬란한 빛은 그 당연한 사실마저 잠깐 동안 말도 못 꺼내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목걸이의 이름을 떠올리자, 알렉스는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목걸이에 달린 보석의 가치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Dog Collar.
그 단어를 곱씹자, 알렉스의 표정은 더욱 싸늘해졌다. 이 목걸이의 의미를 깨달은 스워포드와 나이아도 알렉스를 따라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가자, 아델라인과 클린턴 경위의 표정도 덩달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잠시 생각을 이어 나간 알렉스는 스워포드를 향해 물었다.
“추적 가능하겠냐?”
“뭐, 추적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품질 보증서만 있다면.”
스워포드는 재주 좋게 목걸이 받침대를 들어내 그 뒤에 숨어 있는 종이를 꺼냈다.
“품질 보증서에… 젠장.”
스워포드는 품질 보증서 뒤에서 딸려 나온 종이를 꺼내 들었다. 황실 전속 공방의 도장이 찍힌 인증서.
“확실히 황실의 손을 거친 물건이 맞습니다. 베른하르트 공방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황실 공방에서 손봐서 맞춘 물건입니다.”
“왜?”
아델라인의 물음에, 나이아가 부연 설명을 했다.
“이런 종류의 목걸이는 사용자의 치수에 정확히 맞아야 하니까요.”
“아하… 하긴. 너무 작으면 불편할 거고, 너무 크면 안 어울리겠네.”
아델라인은 한숨을 푹 쉬며 다른 사람들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도 생각이 복잡해진 건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황후가, 황실이 나올 줄은 몰랐다.
“…공작 각하께서는 지금 의회에 나가 계시고.”
“네, 그렇습니다.”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바라봤다. 알렉스는 이미 아델라인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자신에게 방법이 있다는 속마음이 담겨 있는 듯했다.
“알렉스. 생각해 둔 방법이 있나요?”
그러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볼 만한 방법이 있습니다.”
* * *
늦어진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알렉스와 아델라인은 둘이서 저택의 정원을 걸었다.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의 조합은 걷는 것만으로도 상쾌한 기분이 들게 했다.
“이른 아침에 와 줘서 고마워요. 해야 할 일도 있었을 텐데.”
“제가 만져야 할 일은 다른 장교들도 할 줄 압니다. 그나저나.”
알렉스는 한숨을 쉬고는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방법을 모색했을 텐데, 괜히 아델라인에게 짐을 얹어 드린 것 같군요.”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그의 손을 잡았다. 제 차가운 손에, 아델라인의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그러자 알렉스는 귓바퀴를 살짝 붉히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저는 후회 안 해요. 제가 시작한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되어서 오히려 좋은걸요?”
아델라인이 밝게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자, 알렉스의 마음은 더욱 불편해졌다. 이렇게 해맑고 선한 사람을 향해서 수작질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심장을 쿡쿡 찌르는 듯했다. 그런 알렉스의 심정을 알아챈 건지, 아델라인은 그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그러니까 걱정 말아요. 저도 열심히 노력할게요.”
아델라인의 말을 듣자, 알렉스는 어째서인지 믿음이 가면서도 더욱 걱정이 쌓이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고 있었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를 느끼며 그녀를 바라봤다.
이렇게 작고 연약한 사람인데. 과연 잘 버텨 낼 수 있을까. 알렉스는 더욱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델라인을 응시했다. 그러자 아델라인이 알렉스의 손을 놓고, 양팔을 쭉 뻗어 알렉스의 양 볼을 꾹 누르듯 잡았다.
얼떨결에 얼굴이 아델라인의 작은 두 손에 붙잡혀 그녀의 눈높이까지 끌어 내려진 알렉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알렉스가 아델라인에게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델라인의 입술이 알렉스의 이마에 닿았다.
쪽.
그러자 알렉스의 얼굴이 주체할 수 없이 달아오르며 붉어졌다. 하도 붉어져서, 그 얼굴을 잡고 있던 아델라인의 얼굴도 덩달아 뜨거워질 정도였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가고, 아델라인은 변명하듯 알렉스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이, 이건. 그러니까… 그… 그래, 부정적인 생각 그만하라고요. 저번에 알렉스도 그랬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아델라인이 알렉스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알렉스는 얼굴의 열기를 가라앉히고는 아델라인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왜 이 순간에, 갑자기 아델라인의 입술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걸까. 알렉스는 무심코 아델라인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알렉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델라인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새하얗고 뽀얀 아델라인의 얼굴은 어느새 홍당무가 되어 있었고, 맑고 큰 눈은 질끈 감겨 있었다.
아델라인의 입술에, 알렉스의 입술이 포개어지기 직전. 일순간 아델라인의 질끈 감긴 눈을 본 알렉스의 머릿속에 일말의 자제심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알렉스는 방향을 틀고 말았다.
쪽.
알렉스의 입술이, 가볍게 아델라인의 볼을 스쳤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슬며시 눈을 떠 알렉스를 바라봤다.
아델라인의 맑은 하늘색 눈을 바라보며, 알렉스는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
“너무 떨고 있는 것 같아서. 이 정도로 참는 거예요.”
“…….”
아델라인은 멍하니 알렉스를 바라봤다. 키스할 거라고 예상했고, 그래서 긴장하기는 했었다. 알렉스가 싫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처음이니까.
그러나 알렉스가 자신의 입술 대신 볼에 입을 맞췄다는 걸 알자, 자신을 배려해 준 알렉스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 아쉬움 때문에, 아델라인은 방금까지 알렉스의 볼을 잡고 있던 조그만 손으로 주먹을 쥔 뒤 알렉스의 옆구리를 때렸다. 아델라인으로서는 나름 힘을 준 거지만, 알렉스의 몸은 움찔조차 하지 않았다.
“…악!”
아델라인이 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그제야 아파하는 연기를 하는 모습이 얼마나 얄미운지, 아델라인이 진짜 체중을 실어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이건 예상을 못 했던 건지, 알렉스는 옆구리를 붙잡고 이를 악물고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끄아아아…….”
“괜, 괜찮아요?”
알렉스가 주저앉자,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감싸 안으며 그를 살폈다. 알렉스의 표정은 진짜였다. 그러자 아델라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미안해요, 미안해…….”
몇 번의 심호흡 끝에, 알렉스는 간신히 충격을 이겨 내고 호흡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알렉스는 곧바로 아델라인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저는 괜찮…….”
쪽.
우연한 접촉이었고, 가벼운 사고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접촉 사고는 어느새 식어 있던 두 사람의 얼굴을 그 어느 때보다 붉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개를 서로 반대로 홱 돌렸다. 아델라인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쪼그려 앉아 애꿎은 땅바닥만 바라봤다.
분명 같은 입술일 텐데, 왜 볼에 닿았을 때보다 훨씬 복잡한 느낌이 드는 걸까. 아델라인은 붉어진 얼굴로 슬쩍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바라봤다.
알렉스는 서 있는 상태로, 아델라인과 마찬가지로 몸을 돌린 상태였다. 알렉스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알렉스의 한껏 달아오른 귀만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아델라인의 시선을 느낀 알렉스가 애써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아델라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정작 할 말은 잘 떠오르지 않는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말을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그… 저… 그… 일단은…….”
그러자 아델라인도 일어나 알렉스를 향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머릿속에서 하고 싶은 말들이 떠올랐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그럴 것까지는… 일단은… 그…….”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너무 갑작스러웠지만, 이 사실을 ‘없던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그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알렉스의 입에서 한 가지 제안이 나왔다.
“…사고인 걸로 할까요.”
그 말에, 아델라인이 알렉스를 바라봤다.
“그… 없던 일로 하는 것보다는.”
알렉스는 잠시 심호흡을 하며 얼굴의 열기를 식힌 뒤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사고로 하죠. 우연히 벌어진 사고.”
그 말에, 아델라인은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고. 없던 일도 아니고, 계획된 일도 아니니까.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여 알렉스의 제안에 답했다.
“좋아요. 방금 일은 사고였던 걸로.”
그때, 저 멀리서 나이아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델라인은 아직도 잔열이 남아 있는 얼굴로 나이아를 바라봤다.
“…황궁에서, 답이 왔습니다.”
나이아가 아델라인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그 봉투에는, 보석함 안에 있던 황후의 편지와 같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네.”
아델라인은 그 봉투의 인장을 뜯어, 내용을 읽어 내렸다.
“점심을 같이하자는데요. 계획에 문제가 생길까요?”
아델라인이 알렉스를 바라보며 묻자,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변동은 없습니다. 다만 조금 서둘러야겠군요.”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따가 약속한 곳에서 만나요.”
“좋은 소식 들고 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알렉스는 고개를 숙이며, 나이아와 함께 걸어가는 아델라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뒤. 자신에게 다가오는 스워포드에게 말했다.
“움직이자.”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