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영애!
“이것으로, 남부 재건위원회 예비 소집을 마치겠소.”
의회당의 한 회의실. 재건위원회의 위원 중 유일한 제국 의회 의원이기도 한 알베르데 그리보발 마일즈가 의사봉을 두드리며 해산을 선언했다. 그중 가장 말석에 있던 아델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회의실을 나섰다.
다행히 오늘은 간단한 통성명과 자료 공유, 그리고 역할 분담이 끝이었다. 아델라인이 위원으로 배정받은 명분은 그동안 아델라인과 로피츠 공작가의 사람들이 맡아서 처리하던 민간 기부 및 지원 관리.
하던 사람이 계속하는 게 좋다는 그린우드의 논리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논리를 검증하기 위해, 아델라인은 가장 먼저 그동안의 장부를 모두 공개해야 했다.
문제는 없었다. 나이아와 안드레이의 능력은 뛰어났고, 그를 보조하는 공작가의 인원들도 뛰어났으니까. 오히려 신경 쓰였던 건, 그 장부들을 보는 다른 위원들의 표정이었다.
“…좋지는 않았지.”
“어쩔 수 없지요. 이런 시선은.”
나이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아델라인의 뒤에 서서 그 모든 장면을 봤던 나이아의 눈에도, 다른 위원들의 표정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마치 핀잔을 주고 싶고 트집을 잡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아쉽다는 표정. 아델라인보다 열 살씩은 더 먹었을 것 같은 이들이 그런 태도를 보이자, 아델라인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깨에는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이 한가득 얹어진 것 같았다.
자신이 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델라인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회의실을 나왔다. 그때,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델라인, 벌써 끝났어요?”
알렉스의 목소리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돌려 그 방향을 바라봤다. 알렉스도 볼 일이 있었는지 정장을 입은 채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알렉스!”
왜 이리 반가운 걸까.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곁으로 가 손을 잡았다. 거칠거칠하고 차가운 손이지만, 잡고 있으면 마음이 따듯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부의장님을 만나 뵈러 왔죠. 보고해야 할 게 있어서.”
알렉스는 서류 가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때, 아델라인의 옆으로 한 중년의 남성이 다가왔다.
“아, 페드로 위원님.”
“로피츠 영애.”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며 경칭을 붙인 아델라인과 다르게, 페드로 위원은 고개조차 까딱이지 않은 채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그동안 고생 많았네. 생각보다 정리가 잘 되어 있더군. 귀족 영애답지 않게.”
마치 아랫사람을 칭찬하는듯한 말투. 아델라인은 아무렇지 않게 페드로를 바라봤지만, 그 옆에 있던 알렉스의 눈살은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나 아델라인이 가만히 있으니, 알렉스는 감정을 숨겼다. 그러나 아델라인의 손을 잡은 손아귀에 조금 더 힘이 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아델라인의 말에, 페드로 위원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떠나갔다. 그러자 알렉스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부당의 손을 잡고 이 자리에 앉은 인물이라, 부의장의 추천으로 이 자리에 앉은 아델라인을 더욱 고깝게 여기는 것 같군요.”
“굳이 그렇게 따지지 않아도, 다른 위원들도 절 그렇게 호의적으로 보지는 않는 것 같더라고요. 예비 소집이라 오늘은 별것 한 게 없지만, 앞으로는 이것저것 트집잡힐 것 같아요.”
아델라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알렉스에게 말했다. 나이아에게 몇 번이고 들어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대놓고 그걸 드러내니 화낼 타이밍도 놓치고 어이없을 뿐이었다. 그때, 회의실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한 사람이 둘을 향해 말을 걸었다.
“로피츠 위원, 그리고 매닝햄… 아직 대위인가? 오랜만이군.”
마일즈 의원이 알렉스를 향해 손을 내밀며 묻자, 알렉스는 그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답했다.
“아직 대위입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위원장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초선 의원에 위원장이라. 나도 정신이 없어 힘든 자리이네. 위원장이라고 달기는 했지만, 방금 나간 페드로 위원 같은 자들이 잡아먹으려고 간 보고 있기도 하지.”
마일즈 의원은 아델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초심자끼리 잘해 보세나, 나도 도움이 많이 필요할 테니.”
“감사합니다, 위원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은 각오군. 그나저나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가?”
아래를 슬쩍 내려다본 마일즈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살짝 당황했다. 아델라인의 손과 알렉스의 손이 단단히 잡혀 있었다. 뒤늦게 그 손을 풀려 했지만, 오히려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사교 시즌 때 파트너로 함께 활동했었습니다.”
“그렇군.”
마일즈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교 시즌의 파트너가 그 뒤에도 계속 함께한다는 건 보기 좋은 일이야. 둘의 사이가 좋아 보이니 마음이 편하군. 자, 그럼 나도 일정이 있어서.”
마일즈는 그렇게 말한 뒤, 손을 살짝 들어 인사하며 복도를 걸어갔다. 알렉스는 마일즈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아델라인과 나이아를 바라봤다.
“혹시 이 뒤에 다른 일정이 계획되어 있나요?”
그러자 아델라인은 나이아를 바라봤고, 나이아는 수첩을 꺼냈다. 다행히 오늘은 예비 소집을 대비해 뒤의 일정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말에, 아델라인은 나이아를 향해 말했다.
“그러면 나이아는 구호소에 들러서 현장 상태 점검하고 와 줘. 장부 같은 걸 들고 와야 할 수 있으니 마차 타고 가.”
“그러면 공녀님께서는……?”
아델라인이 타고 온 마차를 나이아만 타고 간다면 아델라인은 어떻게 공작가로 돌아오려는 걸까. 그러나 아델라인 옆에 있는 알렉스를 보자, 나이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에 답했다.
“알겠습니다, 공녀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위님, 공녀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 언제까지 돌아가야 해?”
“아무래도 저녁 식사는 공작가에서 드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할게.”
알렉스는 나이아의 말을 머릿속에 넣어 뒀다. 그렇게 나이아와 헤어진 뒤 의회당을 나오자, 청명한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의 햇살이 두 사람을 맞았다.
“날씨가 참 좋네요.”
“햇빛은 아직 따갑지만요. 이제 점심시간이니, 식사하러 갈까요?”
사람이 참 신기한 게, 알렉스가 점심시간이라고 말하자 그제야 배가 고파져 오는 게 느껴졌다. 뭘 먹을까. 많은 후보가 떠올랐지만, 딱히 ‘이거다!’ 할 메뉴는 없었다.
그러자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손을 잡은 뒤 그녀를 부드럽게 이끌며 말했다.
“일단 밖으로 나가 보죠. 나가 보면 무언가 보이지 않을까요? 산책하기 좋은 날씨이기도 하고.”
알렉스의 제안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그를 따라 걸었다. 거리에는 한낮의 햇살을 즐기며 여유롭게 길을 거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금 있으면 추수제네요. 식량 사정도 조금은 더 나아지겠죠.”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곡물 가격이 낮아지면, 이번에는 많이 비축해 둘 생각이에요. 빈민가의 사람들에게 임금을 줄 때는 아무래도 돈보다는 식량이 더욱 와닿는 것 같더라고요.”
“수도의 물가가 착하진 않으니까, 식량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안드레이의 제안이었어요. 대민지원 경험이 있었더라고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만큼이나, 안드레이도 마르고 닳도록 구른 군인이었다. 대민지원 업무는 신물 나게 해 왔던 일 중 하나였다.
“우리 같은 경보병들은, 타지의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줄 알아야 하니까요.”
알렉스는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아무리 잘 싸운다 한들, 다른 지역의 숲이나 산에 들어가면 그곳의 사냥꾼이나 약초꾼과 비교하면 애송이나 다름없죠.”
“전술적 고려 사항 중 ‘지형’에 관련된 건가요? 아, 민간 고려 사항에도 포함되겠네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수업이 헛되지 않았는 듯, 어느새 아델라인은 배운 것을 바탕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분석할 줄 알았다. 성장한 아델라인의 모습에, 알렉스는 어느새 뿌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지형과 민간인에 관한 일이죠. 사냥꾼들이나 약초꾼들과 척을 지게 되면, 아무리 훈련을 잘 받은 경보병이라도 이겨 낼 수 없습니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반대로 말하면, 그 사람들을 포섭할 수 있으면 그 산과 숲은 우리의 손에 들어오는 거죠. 그래서 대민지원에 익숙한 거고요.”
“그렇구나… 아.”
알렉스의 말을 듣던 아델라인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혹시 그러면… 다른 여성들을 만난 적도.”
“당연히 있죠. 애초에 사냥꾼들이나 약초꾼들을 포섭하려면, 그 가족들에게도 잘 접근해야 하니까요.”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당연히 여자들이 있겠지. 남자만 약초꾼, 사냥꾼 하라는 법도 없고.
그렇게 아델라인의 머릿속에는 점점 더 깊은 궁금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걸 대놓고 물어보기에도 부끄러워, 아델라인은 알렉스와 잡고 있는 손에 무심코 더 힘을 주며 입을 뗐다.
“그럼… 그중에 혹시… 그…….”
아델라인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뭉개자,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질문이 대충 무엇인지 짐작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좋아했던 사람도 있냐고요?”
“어, 어? 어, 어…….”
머릿속에 있던 애매한 질문을 알렉스가 확정지어 줬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알렉스를 올려다봤다.
그러나 알렉스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알렉스의 확고한 대답에, 아델라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귀에 입을 가져간 뒤 속삭였다.
“안심하세요, 아델라인.”
알렉스의 갑작스러운 속삭임에, 아델라인은 몸이 얼어붙은 듯 멈춰 버리고 얼굴을 화악 붉혔다. 그러나 알렉스는 개의치 않고, 아델라인의 귀에 속삭였다.
“나는 다른 데 눈 돌리는 사람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