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엑스트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62화 (62/200)

62화 대어를 잡아 보자

“…그렇게 되어서, 너의 협조가 필요하다.”

공작가 저택의 한적한 구석에서, 알렉스는 안드레이를 바라보며 말을 마쳤다. 이제는 군인으로서의 태가 거의 사라졌지만, 안드레이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알렉스의 말을 들은 안드레이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한 번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두 번, 세 번 연이어 한숨을 쉬고 나서야 안드레이는 한숨을 그치고 알렉스를 바라봤다.

“일이 어째 점점 커지는 느낌입니다. 위원회 위원이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할 수 있겠냐?”

“솔직히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서류를 조작하라는 것도 아니고, 있는 서류를 확인하라는 거니까. 뭐, 해야겠지요.”

안드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또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좀 쉬는 줄 알았건만, 또 일이군요.”

“미안하다. 이렇게 부담 주게 되어서.”

“아닙니다, 공녀님을 위해서 하는 거니 집사인 제가 해야 할 일이지요.”

안드레이는 시계를 본 뒤, 알렉스를 향해 말했다.

“그나저나 총기 훈련이라, 이것도 제가 도와줘야 하는 겁니까? 훈련 교관 일은 한 지 꽤 지났는지라 가물가물한데.”

“허공에다가 총을 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많이는 아니어도 매일 꾸준히 할 수 있도록 해 줘.”

“당연하지요. 기본 준비는 뒤뜰에 다 마쳐 놓았습니다.”

그렇게 말한 안드레이는 회중시계를 꺼내 보더니, 알렉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십시다. 기다리시는 중일 텐데.”

안드레이가 알렉스를 이끌고 뒤뜰로 가자, 나무판자로 만든 사람 모양의 표적지와 간이 사로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 마련된 의자와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델라인도 보였다. 아델라인은 사냥대회 때 입었던 수렵복을 입고 알렉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스가 다가가자, 아델라인도 자리에서 일어나 알렉스에게 다가왔다.

“어제 잠은 푹 잤어요? 오늘은 얼굴이 한결 편해 보이네요.”

“푹 자고 일어났습니다. 아델라인은 푹 쉬었나요?”

“저도 마찬가지로 푹 쉬었죠. 그래서, 오늘은 뭘 하는 거길래 수렵복을 입으라고 하셨을까요?”

아델라인이 알렉스를 바라보며 묻자, 알렉스는 허리춤의 피스톨을 꺼내 보이며 아델라인에게 말했다.

“원래 검과 총은 나중에 가르치려 했는데, 상황이 바뀌었으니 커리큘럼도 바뀌어야겠지요.”

그는 손에 든 권총을 돌려 손잡이 방향을 아델라인에게 내밀며 말했다.

“오늘은 사격에 대해 알려 드릴 겁니다. 한번 잡아 보시지요.”

그러자 아델라인이 손을 뻗어 피스톨로 향했다. 나무 손잡이를 쥐고 피스톨을 들어 보이자, 생각보다 훨씬 묵직하고 차가운 감각이 아델라인의 손에 얹어졌다.

아델라인이 총구를 들려 하는 찰나, 아직 곁을 떠나지 않은 알렉스가 그녀의 손을 지그시 눌렀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귀에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방에 사람이 있을 때는, 총구를 들면 안 됩니다. 오발 사고가 날 수 있어요.”

“아, 네!”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점점 조급해지는 걸 느꼈다. 총을 쥔 순간부터, 아델라인의 온몸에 펼쳐진 신경이 이질적인 감각을 만들어 냈다. 단지 총을 쥔 것뿐인데,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귀는 먹먹해졌으며 머릿속은 하얗게 탈색되기 시작했다.

그때, 알렉스의 속삭임이 아델라인의 정신을 꿰뚫었다.

“긴장하지 말고. 호흡법부터 알려 줄게요.”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어느새 그녀의 어깨 위에 얹어져 있는 알렉스의 손이 느껴졌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의 목소리만큼은 더더욱 잘 들렸다.

“자, 따라 해 봐요. 박자를 세어 가면서 스으읍, 후우우. 세 박자씩. 해 볼까요?”

알렉스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알렉스의 손이 얹어져 있는 어깨에서 박자가 느껴졌다.

톡, 톡, 톡. 톡, 톡, 톡.

세 박자씩 끊어진 그 박자는 마치 아델라인이 따라야 할 호흡법을 안내해 주는 이정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델라인은 양손으로 피스톨을 쥔 채, 알렉스의 박자대로 호흡에 집중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톡, 톡, 톡. 톡, 톡, 톡.

스, 으, 읍. 후, 우, 우.

“멈추지 말고, 계속.”

어느새 알렉스의 손길은 사라졌지만, 아델라인은 스스로 일정한 규칙에 맞춰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고 있었다. 시야는 다시 맑아졌고, 주변의 자잘한 소리도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새가 짹짹거리는 소리, 잔디 사이를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들이.

그때,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그만. 어때요, 이렇게 숨을 쉬어 보니까?”

알렉스의 물음에, 호흡을 멈춘 아델라인은 신기하다는 듯 알렉스를 바라보며 질문에 답했다.

“심호흡하니까 좀 긴장…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게 사라진 것 같아요.”

“좋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갈까요.”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뒤로 가서, 뒤에서 안는 듯한 자세를 잡았다. 그의 숨결이 귓가를 스치자, 아델라인은 본능적으로 화악,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두 손으로 쏘는 자세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오른쪽 발은 뒤로 반 발짝 물러서는 겁니다.”

알렉스의 말대로, 아델라인은 얼굴이 붉어진 채 다리를 벌리고 오른쪽 발을 뒤로 물렸다. 알렉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연신 아델라인의 귀를 간질였기에, 그녀의 귀는 더욱더 뜨거워져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렉스의 1대 1 밀착 강습은 계속 이어졌다.

“그다음,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오른팔은 곧게 뻗어 주고, 이를 보조하는 왼팔은 옆으로 적당히 굽혀 줍니다. 오른팔을 곧게 뻗어야, 반동을 버틸 수 있습니다.”

알렉스가 뒤에서 아델라인의 손과 팔을 잡고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가늠자와 가늠쇠가 일직선상에 놓였다. 그리고 알렉스의 큰 손이 아델라인의 작은 손을 감싸며 그녀의 자세를 고정해 주었다.

“자,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의 흔들림을 줄여야 하는데, 이때 손 떨림을 제어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쏴도 못 맞춥니다.”

“아, 알겠어요.”

방아쇠를 당긴다고 생각하니, 아델라인의 머릿속이 다시 점점 새하얗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그때, 아델라인의 귓가에 큰 소리가 들렸다.

탕!!

“히익!”

아델라인은 귀를 울리는 큰 소리에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러다 슬며시 눈을 뜨자, 당연히 피어오르고 있어야 할 총구의 연기가 보이지 않았다.

알렉스는 미소를 지으며 뒤에서 감싸 안다시피 하던 아델라인에게서 반걸음 물러났다. 어느새 아델라인이 들고 있던 피스톨도 알렉스의 손에 들려 있었다.

“너무 긴장하면 사고 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안드레이가 자세 같은 거 봐 줄 거니까 매일 조금씩 시간 내서 연습하십시오. 다음번에는 실사격으로 연습해 보겠습니다.”

“알렉스으…….”

아델라인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알렉스를 올려다봤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알렉스에게 안겨 있었던 기분이 좋아, 화를 낼 정도로 감정이 끓어오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화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내적 갈등을 겪고 있던 그때, 알렉스가 아델라인을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전술적 고려 사항 분석에 대해 배운 거, 오늘 시험인데 공부 많이 해 두셨습니까? 임무, 적, 가용 병력, 기상과 지형에. 시간제한과 민간 고려 사항까지. 여섯 개 항목 다 정리하셔야 합니다?”

알렉스의 질문에, 아델라인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후다닥 위로 올라갔다. 알렉스는 그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저 올라가면 바로 시험 칠 겁니다! 벼락치기라도 하세요!”

그렇게 아델라인을 보낸 알렉스는 피스톨을 바라봤다. 피스톨의 부싯돌에는 가죽 커버가 씌워져 있었다. 그걸 보며 조금 전까지의 아델라인의 온기를 떠올린 알렉스는 귀를 살짝 붉혔다.

“그냥 방아쇠 당기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커버도 씌워져 있는데.”

그걸 본 안드레이가 이해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알렉스를 향해 핀잔주듯 묻자, 알렉스는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변덕이다, 변덕. 일단 자세부터 바로잡는 게 중요하기도 하고… 근데 너 안 올라갔었냐?”

“로피츠 공작의 외동딸을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평민 장교에게 어떻게 맡깁니까. 제가 남아 있어야죠.”

“젠장.”

알렉스는 쓰게 웃으며 안드레이를 바라봤다. 안드레이도 알렉스를 잠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제, 정말 열심히 하더군요. 밤늦게까지.”

“…….”

“덕분에 저녁 내내 몇 번이나 불려 갔는지. 가물가물하던 기억도 다 끄집어내서 설명해 줘야 했습니다.”

“그러냐.”

알렉스는 부싯돌에 씌워진 가죽 커버를 벗겼다.

“…좋아하시죠.”

“…그렇게 보이냐?”

“그 벌게진 귀나 식히고 말씀하시죠.”

안드레이의 말에, 알렉스는 새삼스레 자신의 귀를 만져 보며 중얼거렸다.

“이래서 짬 찬 부사관들이 무섭다니까.”

“이건 이제 막 킹스 실링 받고 입대한 훈련병들도 알 겁니다.”

안드레이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까지 숨길 겁니까?”

“…….”

“아니, 언제까지 숨기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안드레이의 물음에, 알렉스는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쉴 뿐이었다.

“누군 숨기고 싶어서 숨기는 줄 아냐. 바쁘니까 그런 거지.”

“누군 그거 몰라서 묻는 건 줄 아십니까. 뭐, 알아서 잘하시리라 생각하지마는.”

안드레이도 한숨을 쉬며 알렉스에게 말했다. 그사이, 알렉스는 표적을 향해 피스톨을 겨누고 있었다.

스으읍.

“공녀님도, 천년만년 기다릴 수는 없을 겁니다.”

후우우…….

알렉스의 입에서 숨이 천천히 새어 나오듯 내쉬어졌다. 그리고.

“알아. 하지만…….”

알렉스가 입을 열고 말을 하는 사이,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알렉스의 뒷말은, 곧바로 터져 나온 총성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말을 안드레이만큼은 제대로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가 걷히자, 표적의 머리 한가운데에는, 깔끔한 탄흔 하나가 생겨나 있었다. 사격의 결과를 확인한 알렉스는 피스톨을 허리춤의 홀스터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내 마음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러기냐.”

“알겠으니까 어떻게 할지나 빨리 정하시라고요. 지금처럼 이렇게 천년만년 그러실 겁니까.”

“알았어, 알았어.”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피스톨은 가벼워졌지만, 발걸음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