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치킨게임
“좋은 아침입니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아델라인의 눈가는 약간 거뭇해 있었다. 자정쯤에 알렉스가 보냈다는 노먼 중위의 말을 듣고도 잠이 안 와 새벽까지 뜬눈으로 지새웠으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좋은 아침이에요, 알렉스.”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바라봤다. 알렉스의 눈가도 거뭇해져 있었다. 몸에 남아 있는 화약의 잔향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델라인이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분명 하룻밤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던 거겠지.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메마른 입술을 봤다. 지금까지 목 한 번 축일 겨를도 없었던 걸까. 그 생각을 하자, 아델라인은 알렉스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 먹었어요?”
“…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알렉스는 아델라인을 향해 되물었다. 그러나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옆에 대기하고 있던 시녀에게 부탁했다.
“주방에 가서, 아침 식사 한 명분 더 준비해 달라고 전해 줘. 공작님께서는 아침 일찍 의회당으로 가셨으니 준비하는 데 얼마 안 걸릴 거로 생각하는데.”
“알겠습니다, 공녀님. 주방에 전달하겠습니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에게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9시까지 의회당으로 가겠다고 그린우드 부의장에게 전달했기에 여유롭게 아침을 먹을 여건도 되지 않았다. 이동 시간까지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나 어느새인가 자신의 손을 잡은 아델라인의 손길이 너무 따듯해서, 알렉스는 차마 그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며 식당 쪽으로 살짝 이끄는 그 모습에, 알렉스는 귀를 살짝 붉히며 따라갔다.
복도를 걷다가, 알렉스는 창문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왜 귓가를 붉히고 있는 걸까. 알렉스는 아델라인에게 한 손을 잡힌 채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나갔다. 전투는 끝난 지 꽤 지났고, 긴장과 흥분도 한참 전에 가라앉아 심장 박동은 정상을 되찾았었다.
근데 왜 나는 다시 얼굴을 상기돼 있는 걸까. 알렉스는 괜스레 뜨거워진 귓바퀴를 손가락으로 만져 보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때, 아델라인이 알렉스를 향해 질문했다.
“다친 데는… 없죠?”
아델라인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그러자 알렉스가 그녀에게 되물었다.
“아델라인은, 다친 데 없고요?”
“제가 다칠 일이 뭐가 있나요. 조금… 하암… 피곤하기는 하네요.”
아델라인이 입을 손으로 가리며 하품을 하자, 마치 전염이라도 되듯 알렉스도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하품을 했다. 그러더니,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풋, 하고 웃었다. 그사이, 어느새 그들은 저택의 식당에 다다라 있었다.
화려하되 경박하지 않은, 고풍스럽되 무겁지 않은 내부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이런 적당함이 가득한 저택에서 살아서 공작의 정치 성향도 중도에 가까운 걸까. 알렉스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아델라인을 따라 들어갔다.
아델라인이 멈춰 서자, 알렉스도 같이 따라 멈춰 섰다. 그러자 아델라인이 알렉스를 바라봤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알렉스는 그제야 무슨 이유로 그녀가 앉지 못하는지 깨달았다.
길쭉한 식탁 반대편에 있는 식기들. 알렉스는 그제야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평소처럼 아델라인의 반대편으로 가면 될걸, 멍하니 아델라인을 그대로 따라가 버린 것이다.
아델라인은 평소보다 훨씬 맹한 알렉스의 모습에, 신선함을 느끼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이마에 손을 짚어 보았다. 이마는 자신의 체온과 비슷하게, 적당히 따듯했다.
아델라인은 다시 손을 내린 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알렉스에게 물었다.
“많이 피곤해요?”
그러자 알렉스는 잠을 쫓아내려는 듯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내리누르며 식탁 반대편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아델라인은 그런 그의 손을 놓지 않으며 말했다.
“그냥 여기 앉아요, 식기야 옮기면 그만이지.”
그 말에, 알렉스는 잠시 아델라인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옆자리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대기 중이던 시녀들이 빠르게 알렉스의 앞에 식기를 다시 놓아주었다.
“…배려해 줘서 고맙습니다.”
“뭘요, 저를 몇 번이나 구해 주셨는데.”
곧이어 식사가 나왔다. 알렉스와 아델라인은 식사가 나오자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음식을 덜어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나이아와 안드레이의 이야기는 둘 사이의 단골 주제였지만, 오늘은 한 명이 더 포함되었다.
“노먼 중위는 어떤 사람이에요? 새로 들어온 사람인 것 같긴 한데.”
그러자 알렉스는 계란프라이의 노른자를 터트려 적당한 크기로 자른 식빵에 묻히며 말했다.
“노먼 중위… 몇 번 함께 작전에 투입되었던 인연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제국군의 최우선 제거 대상이었고요.”
“그렇군요…가 아니라, 최우선 제거 대상이요?!”
아델라인이 깜짝 놀라 손에서 식기를 놓치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분명 겉보기에는 이국적으로 생긴 온화한 노인이었는데?
아델라인은 노먼의 얼굴을 떠올렸다. 많이 피곤했기에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런데도 온화하다는 인상은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인상의 소유자와 제국군 최우선 제거 대상이라는 호칭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알렉스는 아델라인의 표정을 옆에서 흘끗 보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랬었죠. 지금은 귀화해서 우리 부대에서 복무하는 중이고요.”
그 말을 하는 알렉스의 표정이 너무 평온하고 일상적이어서, 아델라인은 도저히 그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
“아, 특급 기밀을 말해 버렸네요.”
그 말에, 아델라인은 피식 웃음을 뱉고 말았다. 알렉스가 자신에게 기밀을 말해 줄 리가 없지.
“에이, 뭐예요. 긴장했잖아요. 보니까 집사장이랑 비슷한 나이에 조금 더 온화하게 생겼던데.”
“그렇기는 하지요.”
알렉스는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시계를 보고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8시. 아침의 혼잡한 출근길을 뚫고 수도 한가운데쯤에 위치한 제국 의회당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 이제 진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왜요, 또 어디 가요?”
아델라인이 묻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9시까지 그린우드 부의장을 만나야 합니다. 어제의 일 때문에 말이죠. 출근길이라 혼잡할 테니, 부지런히 걸어가야겠죠.”
“걸어간다고요?”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렇게 피곤해 보이는 알렉스가 또 그 먼 길을 걸어가게 할 수는 없었다.
“공작가의 마차로 데려다줄게요. 아, 아니지.”
아델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알렉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따라와요!”
아델라인은 알렉스의 손을 잡고 이끌며 식당을 나섰다. 그러자 알렉스는 순순히 이끌려 가기 시작했다. 미리 마차에 타 있던 나이아의 옆으로 아델라인이 먼저 타고, 알렉스가 뒤따라 마차에 오르자 마부는 마차의 계단을 걷어 내고 문을 닫은 뒤 저택을 빠져나갔다.
“마부, 서둘러 줘.”
“알겠습니다, 공녀님!”
* * *
피터 그린우드. 4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자유당의 당수이자 제국 의회의 부의장이 된 유능한 인물. 그렇기에 평소에는 직접 기자들의 질문에 답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보다 유창하게 말하는 대변인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당직 보좌관의 전언에 평소보다 일찍 집무실로 출근한 그는 책상 위에 잔뜩 쌓여 있는 서류를 말없이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그린우드의 수석 보좌관은 그린우드의 소리 없는 질문에 답했다.
“의회 출입 기자들이 작성한 기자 회견 및 인터뷰 신청서입니다.”
그 신청서들을 몇 장 집어 훑어본 그린우드는 한숨을 쉬었다. 수도 남부도 아니고 서부에서 발생한 총격전이었다. ‘빈민가 남부’라는 말로 넘길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아무리 빈민가 인근 지역이라도.
기사를 쓰기 위해 찔러보는 건 당연하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물어뜯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의장님께도 비슷한 양의 신청서가 갔습니다. 그러나 부의장님께서 답하시는 게 적절할 듯합니다. 자유당 내각이 상황을 제어하고 있음을 알려야 합니다.”
“그래… 공작을 방패 삼는 모양새는 도움이 안 되지… 빌어먹을. 오늘 일정 중 뺄 수 있는 게 있나?”
“오늘 오전은 수도 남부 대화재 이재민 구호소 방문이 있습니다. 그다음으로 자유당 원내 회의가 오후 3시에 있습니다. 두 일정 중 하나를 취소하고 기자 회견을 열어 조기에 정리해야 합니다.”
그린우드는 책상 의자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정책과 이미지냐, 당에 대한 통제력이냐. 오늘 하루의 행마는 내일의, 한 달 뒤의, 그리고 3년도 안 남은 총선의 행마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대위는?”
성도 붙이지 않은 그저 ‘대위’라는 단어였지만, 보좌관은 그가 누구를 찾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9시에 오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린우드는 벽시계를 바라봤다. 30분도 안 남은 상황. 수도에서 군사 작전을 벌일 거면 통보라도 해 주란 말이 그렇게 응하기 어려웠던 걸까. 이렇게 일을 벌여 놓고 뒤늦게 말하러 오면 자신은 어떻게 대응하라는 걸까.
물론, 백번 양보해서 알렉스의 행동은 정당성이 있었다. 내각에 의해 어느 정도 자유로운 행동을 보장받았고, 그 자율성을 십분 활용해 촉박한 상황 속에서도 파견 중대에 대한 위협을 끊어 낼 수 있었다. 수도 서부에 자리 잡은 범죄 조직의 아지트를 털어 버린 건 일말의 여지도 없는 훌륭한 성과였다.
그래도, 그래도 좀 미리 말해 주길 바라는 건 너무 과도한 욕심일까. 그린우드는 한숨을 푹 쉬며 알렉스에 대한 생각을 넘겨 버린 뒤 보좌관에게 질문했다.
“수상 각하는 관저에 계신가? 반응은.”
“…의회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또?!”
그린우드는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말이 존중이지, 자신은 이런 곤란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뜻 아닌가!
그린우드는 처음으로 자신의 신분과 경력이 원망스러워졌다. 군 복무를 잠깐이라도 했었다면, 아니면 뒤에 단단한 뒷받침이 되어 줄 가문이 있었더라면. 저런 유약한 인물 대신 자신이 직접 수상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텐데. 그린우드는 간신히 감정을 다스린 뒤 보좌관에게 말했다.
“…수상께, 방향을 정해 주실 것을 부탁… 아니. 방향을 정하라고 하게. 방침을 정해 주지 않는다면 뭘 하겠다는 건가.”
“알겠습니다, 부의장님.”
그린우드는 한숨을 쉬며 책상 위를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 왔다. 더욱 암담한 점은, 이게 끝이 아닐 것이라는 점이었다.
“극약 처방은 극독과 구별할 수 없다…….”
그린우드는 교수 시절, 옆 연구동의 의학 교수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지금 상황과 빌어먹도록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녹색 알약으로 병은 확실히 낫고 있었지만, 몸은 쇠약해지고 있었다.
치킨 게임. 혼란을 견디지 못한 제국이 먼저 전쟁을 일으키느냐, 아니면 그 전에 이 혼란을 파견 중대가 종식하느냐. 마치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드는 두 황소를 보는 것 같았다.
그때, 집무실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부의장님. 대위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린우드는 보좌관의 말을 끊으며 지시를 내렸다.
“들어오라 해.”
그러자 문이 열리고 알렉스가 들어왔다. 그러나 곧바로, 예상치 못한 손님도 알렉스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로피츠 여사께서도 동행하셨습니다.”
보좌관의 못다 한 말이 뒤늦게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린우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델라인이, 그 옆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