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욕심
카페에 가서 아포가토를 즐기고, 식당에서 저녁 식사까지 하자 어느새 시침은 9시를 향하고 있었다. 혼자라면 이렇게 길게 시간을 쓰지 않았겠지만, 서로와 함께 하는 시간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렇게 늦은 저녁까지 함께 알렉스와 보낸 아델라인은 마차에 탄 채 반대편에 앉은 알렉스를 바라봤다. 오늘의 그는 평소와 비슷했지만, 어째서인지 고민이 많아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아무런 고민이 없는 사람이 지어 보일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아델라인의 물음에, 알렉스는 창가에서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일이야 많았다. 지금 당장도 아델라인과 중요한 정보를 저울질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러나 그걸 순순히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어떤 반응을 보이든, 자신이 그걸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만큼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알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닙니다. 그저 오늘은 유독 피곤하군요.”
알렉스는 평온한 얼굴로 아델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렉스의 대답에, 아델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대체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알렉스의 눈빛에서는 온통 자신을 걱정하는 기색이 묻어나 있었기에, 그저 아델라인은 알렉스를 믿을 뿐이었다. 그녀는 알렉스의 옆자리로 옮겨 앉아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는 알렉스를 믿어요. 어떤 선택을 해도, 그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해요.”
“…….”
“그러니까, 저는 걱정하지 말아 주세요. 제 손에도 주머니칼 하나 정도는 쥐고 있으니까.”
아델라인이 자신의 말을 인용해 말하자, 알렉스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미소를 띠었다. 이제는 자신의 사람이 아니게 된 안드레이가 아델라인의 곁에서 잘 자리 잡고 있다는 게 느껴졌기에 더더욱 안심되었다.
고마웠다. 모든 걸 밝힐 수 없는 자신의 사정을 이해해 주고 곁을 지켜 주는 그녀가 정말 고마웠다. 되돌아보면, 알렉스 자신도 그녀의 도움을 끊임없이 받아 왔다.
그렇기에 더더욱 아델라인을 지켜야 했다. 만약 그녀를 지키지 못한다면, 알렉스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어느덧 마차가 황궁 앞에 멈춰 섰다. 그러자 알렉스가 마차에서 내리기 전, 아델라인의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델라인.”
“네?”
알렉스의 부름에, 아델라인이 그를 바라봤다.
“오늘은 꼭 제가 전해 드린 주머니칼을 쥐고 계십시오.”
“…네?”
“저도 확실히 아는 건 없습니다. 단서가 없으니, 손에 쥔 패도 많지 않습니다.”
알렉스는 아델라인에게 다짐을 받겠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말했다.
“그러니 약속해 주십시오. 오늘 밤만큼은 제 말대로 하겠다고.”
알렉스는 어느새 아델라인을 향한 걱정과 우려가 흘러넘쳐, 표정을 넘어서서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아델라인은 그런 그를 안심시키듯, 알렉스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알렉스의 왼손 손등에 남아 버린 흉터의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그래.
이 사람은 이 흉터의 존재만으로도 믿을만한 사람이다. 내게 해가 될 일을 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러니 지금은 묻지 말고 믿자.
아델라인은 그렇게 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뒤, 알렉스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안드레이와 빈민가 일을 논의해야겠네요.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아마 새벽까지 함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델라인의 말에, 알렉스는 한결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놓았다.
“좋습니다.”
알렉스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뒤, 마차에서 내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던 알렉스는, 황궁으로 들어가기 전 미련이 남았는지 마차를 돌아봤다가, 다시 황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알렉스의 푸른 눈동자에는, 어느덧 살기와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 * *
수도 외곽. 황실 전용 사냥터 인근.
“이야… 외인 대대에서 얼마나 골라내신 겁니까? 쪽도 못 쓰고 털렸네.”
“자네들도 만만치 않았다네. 나도 하마터면 마법 쓸 뻔했어. 그나저나 괜찮겠나? 사냥해서 먹겠다고 먹을 거 안 가져왔다가 사냥도 못 해서 배고플 텐데.”
“뭐, 시가지 들어가면 아직 영업하고 있는 곳은 많을 겁니다. 저녁 배식은 치워 버렸을 테니 먹고 들어가야 욕 안 먹겠죠.”
저벅, 저벅.
수십 명의 라이플맨들이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관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외인 소대원들은 총 한 자루에 탄약낭과 잡낭만, 1소대원들은 외인 소대원들이 짊어져야 했던 배낭까지 두 개의 배낭을 앞뒤로 멘 채 걷는 중이었다.
묵직한 배낭을 두 개나 메고 먼 길을 걷는 건 꽤나 가혹한 처사이지만, 이 또한 패자의 운명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저 멀리서 제3 수도경비대의 제복을 입은 한 기수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마찬가지로 노먼과 라이플맨들을 본 기수도 손을 들어 그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것을 본 노먼은 손을 들어 대열을 멈춰 세운 뒤,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기수를 응시했다. 낯이 익은 얼굴. 그 기억이 맞다는 걸 확인시켜 주듯, 말에서 내린 기수는 노먼과 1소대장에게 경례를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제3 수도경비대의 채드윅 클린턴 경위입니다! 노먼 중위님과 외인 소대, 그리고 파견 중대 1소대 맞으십니까?”
확인차 건네는 질문에, 노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클린턴 경위는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 노먼에게 건넸다.
“파견 중대에서 제3 수도경비대를 경유해 보낸 지시입니다.”
알렉스의 파견 중대장 인장을 확인한 노먼은 봉투를 뜯어 두 장의 명령서를 꺼냈다. 잠시 뒤, 명령의 내용을 읽은 노먼과 그 옆에 있던 1소대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1소대장, 자네들이 이쪽으로 가게. 우리는 시가지 작전에 익숙지 않으니, 자네들이 더욱 도움이 될 거야.”
“알겠습니다, 중위님.”
두 장의 명령서 중 한 장을 건네받은 1소대장은 고개를 끄덕인 뒤 지도를 꺼내 들어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사이 노먼은 뒤를 돌아보며 그들에게 외쳤다.
“외인 소대! 자기 군장 챙겨라! 시간이 많지 않다!”
* * *
새벽 1시 30분.
정장 차림의 알렉스는 관사 탄약고에 넣은 장부들을 바라봤다. 한가득 쌓여 있던 탄약들 대신 들어찬 그 장부들은 귀중한 자료들이었고, 정보의 보고였다. 그리고… 무슨 대가를 치르든 바꿀 수 없는 물건이었다.
알렉스는 자신의 옆에 서서 자신과 같이 탄약고 내부를 바라보는 2소대장에게 물었다.
“2소대장.”
“말씀하십시오.”
탄약고의 문고리를 쥔 알렉스는 그 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욕심이 많은 것 같습니까?”
“중대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알렉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복무했을 30대의 소위가 알렉스에게 되물었다.
수많은 전장을 겪어 왔던 이 젊은 중대장도 확신이 서지 않아, 부하인 자신에게 존댓말로 조언을 청할 때가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알렉스는 천천히 문을 닫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의견을 구하려 하는 거지요.”
“이미 내친걸음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나아가십시오, 중대장님.”
그 말에, 알렉스는 2소대장을 바라봤다. 2소대장은 알렉스에게 탄약고 키를 건네며 말했다.
“우리가 얼굴도 당당히 못 까는 놈들에게 선택을 강요당할 정도로 약하진 않잖습니까?”
툭툭. 2소대장의 손이 알렉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자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열쇠를 건네받고 탄약고의 문을 닫았다.
철컹.
열쇠로 문을 잠근 알렉스는 바닥에 내려놓은 서류 가방을 집어 든 뒤 2소대장에게 열쇠를 건넸다.
“그러면, 갔다 오지.”
알렉스의 말투가 다시 평소의 모습을 되찾자, 2소대장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알렉스를 향해 경례했다.
그래. 저 모습이 자신의, 이 파견 중대의 중대장다운 모습이었다.
“다녀오십시오, 중대장님.”
배웅을 받으며 나가자,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알렉스를 맞았다. 허리에 찬 피스톨과 세이버를 가리기 위해 입은 정장 코트가 아니었다면 약간은 춥다고 느낄 정도였다.
한적하고 서늘한 밤거리에는 한두 명의 취객만이 보일 뿐, 말 그대로 고요함 그 자체였다. 길가에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이 아니었다면 방향을 가늠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길거리를 순찰하는 수도경비대원들도 보였지만, 수는 많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알렉스의 앞에는 빈민가와 접해 있는 지역에서 볼 법한 허름한 여관이 있었다.
창문을 모두 가린 이상한 모양새. 알렉스는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안으로 들어가자, 조용히 앉아 있던 적지 않은 수의 장정들이 알렉스를 바라봤다. 겉으로의 위장은 평범한 여관이었지만, 그 속은 다른 용도를 지닌 전형적인 아지트였다. 적진으로 들어온 꼴이지만, 알렉스의 행동은 잠시의 주저함도 없었다.
저벅, 저벅, 저벅.
털썩.
알렉스는 후드를 쓴 채 혼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남자의 테이블로 다가가 그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맥주를 마시고 있던 남자도 잔을 내려놓고 알렉스를 바라봤다.
“왔군.”
“초대를 받았으니 와야겠지. 안 그래?”
알렉스는 서류 가방을 책상 위에 텅! 큰 소리가 나도록 내리치며 올려놓았다. 갑작스러운 알렉스의 행동에 주변에 있던 장정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알렉스를 노려봤지만, 알렉스도 맞은편의 남자도 흔들림 없이 서로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후드는 벗지, 세이드.”
알렉스의 눈이 후드의 그늘에 가려진 세이드의 눈을 정확히 응시하자, 세이드도 후드를 벗어 알렉스를 마주 봤다. 세이드는 알렉스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서류 가방을 응시하며 물었다.
“같이 온 사람은 있나?”
“있었나? 모르지는 않을 텐데.”
알렉스는 피식 웃으며 세이드를 향해 비꼬듯 말했다.
“뭐, 내가 몰래 중대원 몇 명 데리고 왔을까 봐. 안 본 사이에 쫄보가 다 됐구만.”
“지금 누구 앞에서!”
알렉스의 말에, 주변에 있던 장정 중 몇 명이 둔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알렉스는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세이드를 응시했다.
네가 조용히 시키라는 무언의 압박. 부하 한 명 끌고 오지 않은 알렉스를 상대로 수를 앞세워 겁박한다 해도 통하지 않으리라는걸 알기에, 세이드는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발끈해서 일어났던 장정들이 다시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하자, 알렉스는 세이드에게 말했다.
“관사에서는 아무도 데리고 오지 않았다. 이제 조금 안심되나?”
“…….”
부하들 앞에서 위엄을 보여야 했지만, 어느새 주도권은 알렉스에게 넘어가 있었다. 그사이 알렉스는 손에 쥔 주도권으로 판을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면, 뭘 원하는지나 말해. 피곤하니까.”